Search Results for 'Vita sine libris mors est'

9 POSTS

  1. 2010/09/07 소설가의 죽음 (2)
  2. 2008/12/08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 (2)
  3. 2008/10/20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4. 2008/09/13 그날 밤의 거짓말 (2)
  5. 2008/04/24 보트 위의 세 남자
  6. 2008/01/21 처녀들, 자살하다 (2)
  7. 2007/10/30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8. 2007/10/03 허삼관매혈기 (6)
  9. 2005/10/05 파이 이야기 (13)

소설가의 죽음

Posted 2010/09/07 00:24, Filed under: Column/Historical

 숫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요즘의 나에게 문학은 환상과 같다. 어느 사이에 문학은 손을 뻗어 붙잡고 싶지만 좀처럼 붙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름다운 문장에 환호하던 난 사라지고, 이제는 마음껏 써지지 않는 토해내면 보잘 것 없는 문장에 좌절하는 나만 남았다. 어린 시절 문학은 나에게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세상에는 감히 정복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 속에서 내 지성뿐만 아니라 허영심 또한 자라났다. 하지만, 어두운 도서관의 서가를 정복하는 즐거움이 대제국의 황제가 되는 기쁨과 같다고 믿던 소년의 꿈은 달마다 차고 비기를 반복하는 월급 통장 사이에서 어느새 사치품으로 전락했다.


 달콤하고, 편안하고, 즐겁고, 안락하지만 문학이 없는 오늘의 내 일상에 던져진 낯선 소식이 바로 주제 사마라구의 죽음이었다. 내가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던 그 즈음에도 이미 노령의 그였던 만큼 죽음은 당연한 순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운 여름을 이기기 위해 차가운 물과 벗하는 동안 블리문다의 아름다운 모습이, 하늘을 날기 위한 투쟁이, 모두가 눈이 멀어 버린 세상에서 눈이 멀지 못한 저주를 안은 한 여자의 삶이, 늘 소설 속 어디쯤 자리 잡고 있다가 종국에는 쓸쓸하게 죽어간 한 마리 개가 마음을 스쳐갔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내려진 결정이 우리를 만들어간다는 노작가의 인터뷰가 생각나 마음에 깊은 파문을 남겼다.


 매일 새로운 이야기가 세상에는 쌓여가지만 대가다운 상상력과 필력을 이야기에 담아 삶의 본질을 함께 고뇌하고, 통찰을 제시하던 거장들의 시대는 이제 저물어가고 있다. 끝이 없으리라 믿었던 소설의 전성기도 이렇게 대가들의 소멸과 함께 끝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 삶의 이십대를 풍요롭게 수놓던 그의 작품을 기리며!

 

2010/09/07 00:24 2010/09/07 00:24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

Posted 2008/12/08 22:49, Filed under: Review/Book

_서두를 열려고 얼마나 많은 문장을 쓰고 지웠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처럼 아름다운 소설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것은 쉽지 않다. 마음속을 뒤흔든 이 격랑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내 피가 너무 뜨겁고, 이 격정을 있는 그대로 문장으로 옮기기에는 내 능력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_르누와르가 그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여성들에게 느꼈던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을 읽으며 소년의 껍질을 벗고 어른이 되었던 스물둘의 그 겨울이 생각났다. 깊게 감긴 두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귀를 댈 수밖에 없었던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주가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의 전율과 감각이 문장을 읽는 동안 몸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부끄러움과 수줍음에 놀라 당시에는 미쳐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이 몇 해가 지난 다음에야 나를 찾아왔다. 이제는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누군가의 따스한 온기와 머리칼 냄새와 함께.

뱃놀이하는사람들의점심

_지금보다 한참 어렸던 어느 해 가을 지기들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의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 모두 알리사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이 안타깝다는 것. 줄리에타가 제롬에게 건넨 마지막 문장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만큼은 모두 동의를 표했다. 이제 그 지기들에게 고하노니 지드의 알리사가 우리에게 안겨주었던 가슴 먹먹한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인물이 한 소설에 등장했으니 어서 책장을 펴기를. 알퐁진이라는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두 번 세 번 문장을 씹어 삼키기를, 굽은 손의 르느와르가 당신 가슴을 그리고 싶었다고 내뱉는 장면에서 벅찬 감동을 느끼기를 빌어본다.

_귀스타브 까유보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화려한 재능을 꽃핀 대가들의 그림자에 가려 지금까지 제대로 조망 받지 못했던 그를 음지에서 끌어내 그의 업적과 고뇌, 삶을 보여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퐁 드 뢰로프>나 <비오는 날의 파리>를 그의 걸작으로 꼽지만 난 <바닦을 깎는 남자들>과 <노젓는 남자들>들을 더 사랑한다.

_어린 시절 처음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을 도록을 통해 보았을 때 몇 시간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을까, 그들의 시선이 바라보는 곳 찾기를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이 지닌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이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싶다. 만약 워싱턴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이 그림을 보고자 필립스 컬렉션에서 하루를 보낼 것이 분명하다.

_하나의 그림이 새로운 시대를 규정했다면 이 소설은 하나의 그림 속 인물과 그림의 완성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시대를 보여준다. 보불전쟁과 파리코뮌의 상처를 넘어선 1880년의 파리와 그 속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플라뇌르를 즐길 수 있다.

2008/12/08 22:49 2008/12/08 22:49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Posted 2008/10/20 10:13, Filed under: Review/Book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를 익히 아는 친구들에게 난 100퍼센트라는 개념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루키의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만큼 공감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으며, 되려 길고 구차하며 초라한 오욕의 기록에 새로운 한 획을 더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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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이 소설에는 꼭 '100퍼센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만나는 기분'이란 표현을 써줘야 한다. 그 외의 어떤 표현도 이 소설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고 초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만약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뒷머리에 전달되는 아찔한 멍함 따위의 표현을 이 소설에 쓴다면 그것을 이 책은 욕되게 하는 것일 뿐더러 내 삶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오랫동안 사람의 뇌리에 남을 화려한 결혼식 다음 날 아침 처참하게 살해된 한 남자의 운명을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극중 화자인 나의 해석을 통해 재구성한 소설이다. 그렇지만, 얇은 책장과 단순한 줄거리임에도 이 소설의 느낌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걸출한 문학적 재능을 선사 받은 사람들만이 투사해낼 수 있는 삶의 정수를 독자로서 느끼는 것과 표현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련의 주인공이 잠에서 깨어 살해되기 전까지 몇 시간 동안 그가 걷고 만난 사람들을 추적하며 마르케즈는 수많은 여러 우연이 만들어 낸 살인사건을 조명한다. 동시에 독자는 카브리해의 작은 항구 마을과 그 주민들의 삶을 내 이웃의 삶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눈앞에 영사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주변인물들의 나래이션을 듣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한 남자의 최후와 그 뒷이야기들을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잔인하기 그지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삶의 참모습을 깨닫게 된다.

마르케즈가 『납치일기』에 보여주었던 르뽀르타쥐에도 충분히 감탄했던 나로서는『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 더 남길 말이 없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능가하는 숨겨진 보물이라는 부연 아닌 부연이 내가 이 책에 더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 아닐까 싶다.

2008/10/20 10:13 2008/10/20 10:13

그날 밤의 거짓말

Posted 2008/09/13 17:04, Filed under: Review/Book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줄어드는 책장에 아쉬움이 앞선다. 그리하여 종막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를 따라잡길 잠시 멈추고 차를 우려낸다든지, 산책을 한다든지 따위로 유예를 연장하고 만다. 더욱이 이런 소설은 풋사랑의 내음이 밴 연애편지를 읽듯 한 줄 한 줄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시처럼 아름답고, 작은 계류처럼 섬세하게 흐르는 문장을 음미하려면 말이다. 사실 부팔리노의 『그날 밤의 거짓말』을 평범한 추리소설처럼 플롯과 반전을 중심으로 읽는 것은 바보들이나 할 짓이다. 경험 많은 독자라면 작가의 의도를 쉬이 짐작할 것이 분명하고 반전에 깜짝 놀라기보다는 게임에 참가한 죄수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속에 뒤섞인 진실과 거짓이 만들어 내는 정체성의 혼란과 욕망. 두려움에 공감하며 젖어오는 마음을 추스르러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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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데카메론'이란 표현의 마수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대개의 사람들은 구성의 유사성과 본문에 언급된 '하룻밤의 데카메론'이란 표현 때문에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중심으로 이 책을 설명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구성보다도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이야기들이 지니는 '데카메론적 풍미'다. 십여 년 전 『데카메론』을 읽던 소년이 접한 다채로운 삶을 소설 속 이야기들은 한층 위트 있게 겹쳐 놓는다. 묵직한 장정을 자랑하는 책 두 권을 가득 채운 이야기를 단 네 편의 이야기로 함축해내는 재주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날 밤의 거짓말』의 매력은 사형수들에 대한 연민에 있다. 사형을 하룻밤 앞둔 죄수들의 고백에는 속임수라는 당과가 발라져 있지만 진실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되려 거짓의 이면에 놓인 것은 죽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삶을 정리하며 내뱉은 회고다. 젊은 '학생'은 『지붕 위의 기병』 같은 사랑을 고백하며 삶을 갈구하고, 남작은 태 속에서 시작된 자기 복제의 저주를. 병사는 파괴적이고 부평초 같은 삶을, 시인은 시인이 꿈꿀 법한 자극적인 사랑을 노래하며 사형대로 걸어간다. 죽음이라는 사랑과 희망도 절망도 모두 무로 돌려버리는 최후의 종언과 입맞춤하려고 말이다.

죽음과 직면할 때 사람들은 가장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낸다고 한다. 부팔리노의 『그날 밤의 거짓말』은 이런 명제를 다시 한 번 증명한다. 삶을 꿈꾸지만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네 명의 사형수들이 겪는 하룻밤의 게임을 통해서 말이다.

2008/09/13 17:04 2008/09/13 17:04

보트 위의 세 남자

Posted 2008/04/24 08:37, Filed under: Review/Book

이 소설의 존재를 안 것은 스무 살 무렵의 일이지만 실제로 그 소설을 인용한 것을 본 것은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 할 것도 없고』를 읽는 동안이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 주인공은 우연히 '보트 위의 세 남자와 한 마리 강아지'를 조우하게 되는데 코니 윌리스는 이 소설에서『보트 위의 세 남자』가 지닌 명랑하면서도 경쾌한 분위기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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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때부터 이 소설을 읽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게 된듯 싶다. 해적판으로 100쇄나 찍어냈다는 전대미문의 소설. 영국문학의 정수로써 평가받지는 못하지만(비평가들은 대체로 이 작품에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가장 가벼운 소설을 읽지 못한다면 내 看書癡歷에 가장 미진한 부분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세 남자와 한 마리 강아지가 떠나는 탬즈강의 보트 여행을 따라가는 일은 즐겁기 짝이 없다. 준비만으로 충분히 부산스런 런던의 하숙집, 갑문, 강둑을 지나치는 세 남자가 벌이는 게으름의 대결. 처량하게 내리는 빗속에서 벌어지는 대탈주. 사실 경쾌한 유머만으로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유머는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는 소재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캐릭터에서 비롯된 유머와 시의적절한 위트는 독자의 시선을 붙잡기에는 충분하지만, 독자에게 만족감을 전달하긴 어렵다.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람들의 기호와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은 그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채로운 요소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보트 위의 세 남자』는 이런 주장에 부합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유머와 위트가 돋보이기 때문에 일견 스탠딩 코메디의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와 탬즈강 보트 여행 동안 지나치는 지역들에 대한 생생한 서술, 인간성에 대한 장난기 넘치면서도 따스한 통찰은 소설의 저변에서 이야기에 풍미를 더한다. 웃음을 이어가되 지나치지 않고, 여정을 진척시키되 지리하지 않다. 한꺼번에 몰아서 읽기에는 쉽게 배탈이 날 것 같은 책이지만 한 장(章) 한 장씩 읽다 보면 입가에 멀리는 만족스러운 달콤한 웃음을 쉬이 보게 된다.

눈에 띄는 유사성이 없음에도『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나 독일동화집에 실린 슈라라펜란트 혹은 코케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던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봄이 좋을 소설.

2008/04/24 08:37 2008/04/24 08:37

처녀들, 자살하다

Posted 2008/01/21 08:09, Filed under: Review/Book

소피아 코폴라의 <Lost in translation>이 유명세를 타기 전 그녀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처녀자살소동(the virgin suicides)>를 통해서였다. 유치한 역제가 내 심기를 건들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파격적인 소재에도 꽤 괜찮았다. 되려 한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막막함이 나를 사로잡기도 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스파이더 맨>에서 리버스 키스신으로 나와 친구들을 탄사를 자아내기 이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금발 소녀가 한 사람의 배우로 자라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ER에서도 잠시 등장하지만 TV 시리즈니까 논외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럭스를 연기한 키얼스틴 던스턴보다 메리를 연기한 A.J. 쿡의 외모에 더 끌렸지만 이제와 낡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일은 좀 부질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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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난 영화 속의 이야기가 그저 시나리오인 줄로 알고 있었다. 몇 달 전 서점에서 우연히 원작과 조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화는 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그 기저에 90년대 초엽의 명랑함을 깔고 있으며, 사건의 세부묘사에 집중하기 보다는 제한된 표현의 틀 안에 이야기를 짜맞추려고 노력했다. 반면 소설은 70년대 중반을 사실적 색채로 그려내고 있다. 더욱이 필름에서는 영화적 서사를 위해 핵심적인 플롯을 꽤나 건너 뛰었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풀리지 않았던 미진함과 인물 사이의 간극은 소설을 통해서는 손쉽게 풀린다. 문장이 아니라면 그 어떤 장르로도 이 소설이 그려내는 사건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사실 처음 책등에 인쇄된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견될 만한 작품이라는 광고 문구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어쩌면 먼 훗날 가장 위대한 성장 소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리 높은 가능성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 소설에 관해 논평하기란 쉽지 않다. 흠잡을 데 없는 이 소설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고, 걸작으로 살아남기에는 1%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집어내기는 어렵다. 그저 꽤 많은 책을 읽어오면서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일종의 감이라는 것인데 내 심장과 머리를 뒤집어 놓은 그 '싸함'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기백을 압도하는 박력의 부제는 이 소설의 앞날에 대한 전망을 조금은 어둡게 만든다. 어쩌면 이런 내 감상은 미국 작가들에 대한 그동안의 내 실망과 이 소설을 제외하면 그다지 주목받을 만한 소설을 써내지 못한 작가의 탓도 있다.(제프리 유제니디스는 몇 해 전 『미들섹스』라는 작품으로 풀리쳐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주목받을 만한 작품인든 아니든 간에 남녀추니 Hermaphroditus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좀 괴기스럽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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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주의 교외도시에서 벌어진 리즈본가의 다섯 자매의 자살 사건을 다룬 이 소설은 철저히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유지한다. 사건은 이웃 거리에 살던 '나'를 통해 중계되는데 사건의 전개와 함께 '나'와 친구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 정작 발견해야만 했던 것을 발견해내지 못한 관찰 놀이의 후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회환과 죄책감. 흐릿해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이루지 못한 운명에 대한 한 조각의 미련이 자아내는 향은 정말 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자살이라는 주제를 무모할 정도로 심각하게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적절한 '거리 두기'와 장면의 전환, 관찰자의 시점이동에 따라 독자는 더욱 뚜렷하고 섬세하게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다.

사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첫 번째는 만약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언제쯤 이 소설을 권할 수 있을지 고민된다는 생각이었고, 두 번째는 내 형제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연과 강도는 다를지언정 나 역시 이 책에 등장하는 소년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이 소설은 정말이지 『데미안』과 비슷하다. 문장마다 새롭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들이 묻어난다.『데미안』처럼 이 소설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거울 속에 비치는 상이 감정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까지 닮았다. 짧은 문장으로 이 소설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 바보처럼 글자를 적어내려 가는 어리석음을 어째서 자초하는지 모르겠다.

P.S.
언제인가 결혼이라는 굴레를 굴레로 여기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사람을 만난다면 둥그런 허벅지를 베고 누워 이 책을 읽어주고 싶다. 단락마다 내가 가졌던 느낌을 설명하다 보면 어느새 그녀의 눈가가 그렁그렁해질지도 모르고 그것은 나에게 확신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2008/01/21 08:09 2008/01/21 08:09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Posted 2007/10/30 11:01, Filed under: Review/Book
 뒤렌마트의 <로물루스 대제>에는 닭 모이를 주는 일에 몰두하며 수많은 죄업을 토대로 번성한 로마를 역사에서 퇴장시키기로 한 황제가 등장한다. 물론 이 로물루스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던 시기에 고작 십 대 초반의 소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부정하래야 할 수 없고, 또 이렇게 거창한 계획같은 것은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불문가지지만 그럼에도 천 년을 넘게 이어진 제국의 초라한 죽음에서 무언가 극적인 요소를 찾으려는 극작가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할 만하다. 그런데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언급하기에 앞서 뒤렌마트로 글머리를 여는 것일까? <로물루스 대제>와 이 소설에는 도대체 어떤 유사점이 있기에……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는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비견될 만한 소설이다. 이것이 소설임에도 말이다. ‘있음 직한 사실’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음에도 이것은 전혀 소설 같지 않다. 책등에 인쇄된 문구처럼 그는 그저 역사의 장막을 걷어올렸는지도 모른다. 비등한 또 다른 비유를 쓰자면 현대 한국 작가의 소설에 사마천의 『사기』에 버금가는 정치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경우랄까? 그러니 이 소설에 대한 칭찬은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 그 누구도 바보가 되고 싶지 않은 이상 클라우디우스에 관하여 쓰고 싶지 않게 만드는 이 소설 앞에서 호평을 나열하는 짓은 그런 바보들의 행렬에 동참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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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4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의 기구한 삶을 1인칭 화자로 다룬 이 소설은 20세기 전반부 로마사에 대한 논의의 거의 모든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번진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호의적인 연구와- 다시 말해 제정으로의 이행이라는 엄청난 작업에 성공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광적인 숭배- 한편으로는 원수정이라 불린 이 시스템이 실제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인척 관계에 있는 소수의 귀족 지배층의 협력에 의하여 운영되는 더욱 좁아진 과두정이라는 개념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과두정이 진짜 황제정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의 도상에서는 타키투스의 관점을 인용한다. 바로 공포와 피의 숙청이 만들어내는 권력의 독점화 과정이다.

 이 소설은 공화국의 이상을 지닌 마지막 로마인인 클라우디우스가 생존을 위해 바보가 되고, 결국 황제가 되었지만, 황제이기에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는 황제가 지닌 권력조차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권력자와 개인, 권력과 역사, 권력과 권력자, 제국과 종속민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생생한 실례를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달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만들어낸 독창적 결과물인 ‘황제(카이사르)’는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의 죽음에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어떤 종교보다도 단단하게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그래이브스는 클라우디우스라는 인물의 아이러니를 강조하고 있다. 그가 좋은 황제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정상화시키고자 노력했기에 공화정의 이상은 결정적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그가 네로라는 최악의 선택지를 통해 그 가문의 종말을 꾀하려고 했음에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의 가장 사악한 창조물인 ‘카이사르’는 계속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뒤렌마트의 파라독시와 그레이브스의 패러독스가 겹친다. 역사 앞에서는 예외인 어느 개인도 없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헤로데 아그리파라는 개성적 인물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로마에 대항하려고 일어섰으나 제대로 서보지도 못하고 운명한 이 불운한 왕의 역설과 리비아와, 칼라큘라를 미혹시켰던 신성(神性:메시아)을 통해 그는 종교의 본질이 결국 사람이 믿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의 투사하는 고차원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이런 역할 이외에도 그레이브스가 또 다른 소설을 통해 플라비우스를 주인공 삼아 권력의 본질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로 삽입된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클라우디우스라는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본 권력의 암투와 인간의 본성은 소설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게다가 선량한 클라우디우스가 권력에 다가설수록 변모하는 과정은 너무나 섬세해서 종장에 이르기 전까지는 인식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늙은 통나무 왕’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방백이다. 이 소설은 많은 것을 담고 있지만 그 가운데 나를 가장 깊게 매료시킨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시라노에서 폴스타프를 거쳐 리어왕이 되어버린 한 절름발이 남자의 기구한 운명에 잠시 몰입을 한들 그것이 잘못이 될까? 사랑스럽지도, 당당하지도 않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한 남자에게 헌사로 받쳐진 이 소설에 열광한다 한들 그것이 무엇 그리 잘못이 될까?  
2007/10/30 11:01 2007/10/30 11:01

허삼관매혈기

Posted 2007/10/03 09:23, Filed under: Review/Book
험난한 시대에 냉혹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곧은 신념을 갖는 것이 올바른 일이기는 하지만 곧은 신념이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것은 돌연변이 혹은 아웃사이더란 꼬리표뿐이다. '무엇이 옳은 것이냐'보다 '무엇이 좋은 것이냐'가 화두가 된 이 시대에 삶은 소리 없는 전장이 되었고, 논쟁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다. 이제 나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아주 가끔 사람 좋게 웃어 보는 정도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허삼관매혈기』에 들어가기 앞서 구구절절이 나 스스로가 악당임을 밝히는 이유는 내가 허삼관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고 더 나은 훈련을 받았음에도 남편으로서의 그의 마음을 아비로서의 그의 마음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지만 단언하건데 노인이 되어서도 난 그의 마음을 따라잡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나에게 소중한 것은 나 자신뿐이란 마음이 나이를 먹어도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악당 흉내를 내며 용렬함을 감추는 것이 전부이다. 이 정도의 용기 밖에 갖지 못한 나로서는 한 평생을 살아도 그가 보여준 행동을 머리로 이해는 해도 몸으로 보여줄 수 없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오랜 시간동안 이 소설을 읽기를 망설였던 이유는 이런 스스로의 비겁함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 것 같다.-한편으로는 공지영과 이문구의 추천사가 눈에 거슬렸다- 나에게는 할 일이 많고, 결코 허삼관의 마음 같은 것은 알 필요조차 없이 바쁘게 살아야만 한다고 세뇌를 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장의 끝에 이르렀음에도 그리 후회스럽지는 않다. 이런 저런 비평으로 본질을 희석시킬 의도도 없다. 너무나 특별한 시기의 중국이라는 배경과 강한 콘트라스트의 사진을 보는 듯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의미하는 핵심이 배경을 뛰어 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내게 남겨진 것은 난 너무 늦었으니 훗날 딸자식이라도 하나 갖게 되면 허삼관 같은 사위를 데려오기를 비는 정도다. 게다가 그런 사위라면 아주 가끔 남몰래 황주 한 잔을 같이 기울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2007/10/03 09:23 2007/10/03 09:23

파이 이야기

Posted 2005/10/05 10:46, Filed under: Review/Book
어떤 이들은 우리 시대를 일컬어 ‘소설이 죽음을 맞이한 시대’라고 안타까워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소설이 낳을 수 있는 감동은 사라져 버렸다고 성급하게 말을 뱉는다. 하지만 이들의 노파심과 비아냥이 근거 없는 낭설인 것만은 아니다. 빠르고 화려한 영상 예술에 소설이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현듯 나타나 삶에 충격을 던져주고 가는 것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적어도 내 삶에서는- 아직 소설의 위상을 넘볼 것은 없다. 소설은 아직 죽지 않았다. 문장에 담을 수 있는 상상력은 아직 밑천을 들어내지 않았고, 문장이 품을 수 있는 미묘한 맛은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이것이 소설이 죽었다는 말이 틀린 이유이다. 사실 소설의 죽음에 대한 반박으로 글 머리를 여는 것은 파이 이야기(Life of Pi)의 책날개에 실린 한 줄의 코멘트 때문이다.

‘소설이라는 예술이 죽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얀 마텔의 소설을 읽어보라’

<식스 센스>나 <디 아더스>의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감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파이 이야기>의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마지막 3부에서 들어 나는 진실은 사람을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아니 전율 이전에 차라리 마지막 인터뷰를 읽지 않았던 잠시 전으로 돌아가고 싶기까지 하다. 기억 속에 담긴 문장은 제자리를 찾아 맞물려 돌아가며 거대한 파랑을 만든다. 파랑은 이내 폭풍우를 몰고 오면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길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언어의 마술사라는 작가에 대한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흘러간 문장을 음미해 보면 허망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흉강을 가득 채운 채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머문다. 역치 바로 아래 상태에서 우리는 작가의 언어에 길들어 진다. 뱅골 호랑이와 표류하던 소년이 호루라기로 호랑이를 길들였던 것처럼 작가는 역치 바로 아래 상태까지 내몰았다가 잡아 당기기를 반복함으로써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상상력의 적을 제압한다.

소설에 매혹당하지 않았다면 혹은 이야기에 취해 있지 않았다면 놓치지 않았을 사실들을 망각하면서 우리는 뱅골 호랑이와 인도 소년의 태평양 표류기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곤 이내 파이의 생존에 응원을 보낸다. 중요한 것은 행간에 숨겨진 복선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에 몰입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 이 상태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이 멋진 소설을 음미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1부가 다소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1부의 다소 지루하고 늘어진 서술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2부의 속도감과 억제된 슬픔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1부가 그려내는 파이라는 캐릭터를 충분하게 음미하지 않으면 소설을 끝까지 읽어도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3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더 크다. 시간이 제법 흐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진실에 이르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추측에 머물러 있는 진실과 확연하게 드러난 진실은 충격의 여파가 다르다. 가능성과 사실은 전혀 다른 영역과 관념을 추상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3부의 존재로 인하여 이 이야기는 더 이상 역경을 이겨낸 소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파이 이야기>는 고전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동화 같은 외피에 쌓여 있지만 이 속에 담긴 이야기는 맑고 순수한 그래서 생각이 필요 없는 동화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책은 평생동안 ‘사랑한다. 리차드 파커’ 라는 파이의 외침을 잊지 못하게 만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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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5 10:46 2005/10/0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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