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선 (La Ligne noire)
Posted 2008/05/17 01:15, Filed under: Review/Book오래전 친구들과 떠난 여행길에서 가장 잔인한 묘사에 대한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누가 어떤 의견을 내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온전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했던 말만큼은 분명히 기억한다. 등뼈가 드러난 날씬한 등허리에 떨어지는 핏방울. 헤모글로빈에서 산소가 환원되기 바로 직전 검은색에 가까운 진한 보랏빛의 핏방울이 백합처럼 하얀 살결에 떨어지는 묘사가 가장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는 가장 잔인한 묘사라는 것이 요지였다. 버스 뒤에서 텁텁한 팩소주를 돌리며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찌른 부분은 빅토리아 시대의 고리타분함만이 아니라 섹슈얼리티와 결합한 이단의 제단에 봉헌된 피의 전승과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폭력과 성의 끈끈한 유대라는 주절거림이 첨언 되었다는 것도 기억이 난다.

사실 범죄 소설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여는 이유는 오랜만에 이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양들의 침묵』을 읽으며 내가 가졌던 느낌. 한니발 렉터와 스털링 사이의 창살을 두고 피어나는 성적 긴장감(이제야 고백하자면 나와 지기 하나는 이 성적 긴장감이 해소되길 기다리며 수능 보름 전에 출간된 『한니발』을 탐독했던 미친 짓을 태연스럽게 실행에 옮겼다), 잔혹한 동시에 아름다운 범죄.
긴장과 이완을 오가는 통에 시작된 동화현상. 살인에 대한 매혹. 육체에 대한 묘사 없이도 느껴지는 섹슈얼리티. 부적절한 즐거움.
표현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가져다주는 쾌감. 그 느낌을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 바로『검은 선』이다.
물론 『검은 선』 자체는 격찬받을 정도로 매끄럽고 훌륭한 소설은 분명 아니다. 빼어난 부분이 많지만, 전체적인 골격은 조금 덜 다듬어지고 성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매끄럽게 이어지던 매혹적인 핏빛 이야기는 어설프게 서두에서 흘린 사건의 복선과 끝이 훤히 보이는 결말 사이에서 빛이 바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과거의 잔혹한 범죄 소설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살인의 유사성이나, 상징성, 인물에 대한 묘사와 잔혹함의 본질에 접근하면서 겪게 되는 변화가 때로는 초연하고 담담하게, 때로는 사냥개에게 쫓기는 들짐승이 되어 숨이 턱에 걸려 헉헉거리는 마냥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팩소주의 그 텁텁함과 잔혹한 소설이 가져다주는 guilty pleasure를 직시할 수 있었던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어수룩한 묘사 속에서 광기의 맛깔스러움을 찾아내 수 있는 이에게.(프랑스에서 『늑대의 제국』과 거의 연달아 출간된 것을 고려하면 한국어판 출간은 정말 늦지 않았나 싶다)
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