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역사 핑크 카네이션
Posted 2008/06/12 09:05, Filed under: Review/Book오랫동안 난 로맨스 소설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해 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단순한 치기에 불과하지만 그 시절 겁 없이 손 댄 수 십 권의 책무더기가 준 교훈을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허투루 잊지 않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플롯과 묘사, 판에 박힌 듯 똑같은 등장인
물 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곤 권태 밖에 없다는 것이 그 당시 내가 이 장르를 빠져나오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확고해져 하나의 의지가 되었다. 혹자가 제인 오스틴 역시 조지언 시대의 로맨스 소설 작가가 아니겠느냐고 변명을
늘어놓을 때면 로맨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키스라든지, 애무를 인용하며 짓궂게 사람들을 놀려대던 편벽하고 못된 습관 역시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로맨스 소설에 대해 뒤바뀐 내 감상을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이유는 이 소설이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스파이라는 포장을 뒤집어쓰고
있긴 해도 본질적으로는 로맨스 소설이기 때문이다. 첩자들이 벌이는 활극은 이 소설에서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복잡하고,
정교하며 세련된 이언 플래밍식의 스파이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대신 사랑에 빠진 샐쭉한 청년 스파이가 하나 있다. 이중 스파이가 등장하지 않는 점이 흥미롭긴 하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청년 스파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시골 처녀를 아페리티프 삼아 음미하는 부분이다.
『핑크 카네이션, 비밀의 역사』『검은 튤립 마스크』『에메럴드 링의 기만』『크림슨 로즈의 유혹』으로 이어지는 이 시리즈에서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을 설명하는 서장에 불과하다. 핑크 카네이션이란 스파이링이 형성된 시작에 초점을 맞추면서 앞으로 전개될 애정 전선의 서막을 살짝 들춘 정도가 이 소설에서 다룬 전부다. 하지만, 일견 유치해 보이는 제목만으로 이 소설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 같은 엄격한 눈빛과 결연하게 치켜든 턱으로 무관심을 가장해도 실상 그가 보는 것은 깊게 파진 앞섬 사이로 보이는 앙가슴이나 살품, 얇은 셔츠 사이로 보이는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여인들>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만한 곧은 등, 혹은 한 팔에 감길 것 같은 세류요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나 여성미를 우아하게 그려내는 둔부라는 사실을 이 소설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