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는 누구? (Whose body?)
Posted 2008/03/23 21:42, Filed under: Review/Book런던에서 보낸 한 달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소설 속에 묘사되는 거리와 장면들을 언제든지 기억에서 꺼낼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이 소설의 경우, 첫 장에 등장하는 피터 경이 경매에 참가하려다가 그린파크 맞은편에 있는 피커딜리 거리의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사용했음 직한 거리를 상상해본다든지, 빗속에 하이드 파크 코너에서 내려 파크 레인을 따라 걷는 범인의 뒷모습을 그려본다든지, 빅토리아역에서 베터시 공원을 지나 프린스오브웨일즈 거리를 지나 이름 모를 시체가 발견된 퀀캐롤라인맨션으로 향하는 주인공을 뒤쫓는다든지 하는 일은 소설을 읽는 새로운 재미다. 기묘한 분위기를 지닌 캠든 타운의 한 거리인 그레이트 오몬드가에서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뛰어오는 스코틀랜드 야드의 파커 경감보를 상상하는 일은 또 얼마나 즐거운지.

세이어즈의 문체와 그녀가 그려내는 일상은 마치 지금껏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혹독한 전쟁 따위는 없었던 'Belle Epoque' 의 하루마냥 활기차고 유연하기 그지없다.
시티는 공황의 따위는 모르는 것처럼 활기차고,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만 숨겨져 있다. 물론
폴 존슨에 의하면 이 시기의 영국은 유사 이래 어느 제국이 영위했던 것보다 더 광대한 범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전성기였다지만 현대 소설에서 묘사되는 1920년대와 이 소설이 그려내는 그 시대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은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추리소설의 황금기에 후반에 등장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과 비교해보자면 그녀의 트릭이나 플롯은 조금 단순하다. 게다가 묘사의 아름다움 역시 크리스티 쪽이 우월하다. 그러나 세이어즈의 소설에서는 시대와 삶이 살아숨쉬는 듯한 사실성이 느껴진다. 크리스티의 소설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한 반면, 세이어즈의 소설은 마치 이브닝 스탠다드에 실린 살인사건 르뽀르타쥐마냥 생생하기 짝이 없다.
P.S.
살인의 해석과 다르게 이번 번역은 그다지 매끄럽지 않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은 명확하나 자연스러움이 떨어진다. 1923년 영국에서는 누구가 쉽게 인식했을 차이를 현대의 독자에게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번역은 기이한 경계에 걸쳐 버렸다.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뉘앙스에 군더더기가 남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