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Review/Performance'

13 POSTS

  1. 2008/05/21 투란도트 (Turandot)
  2. 2007/11/25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2)
  3. 2007/11/21 트로이의 여인들
  4. 2007/11/03 포킨의 춘향, 에이프만의 뮤자게트 (2)
  5. 2007/10/23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6. 2007/08/28 달링(Not now darling) (2)
  7. 2007/05/03 사운드 오브 뮤직
  8. 2006/09/19 Wicked (2)
  9. 2006/09/11 Troilus and Cressida (3)
  10. 2006/09/04 Magia de la Danza (2)
  11. 2006/08/28 레미제라블
  12. 2006/04/29 맥베드 the show
  13. 2005/10/15 햄릿-셰익스피어난장 (6)

투란도트 (Turandot)

Posted 2008/05/21 06:03,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Puccini
<영 인디아나 존스 the Young Indiana Jones chronocles>의 미방영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는 인디의 어머니가 피렌체에서 푸치니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토스카 Tosca>와 <라보엠 La Bohéme>, <나비 부인 Madama Butterfly> 과 <투란도트 Turandot>의 작곡가인 푸치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예술적 창조력은 이미 1910년을 경계로 내리막길로 접어든 것으로 본다. 에피소드에서는 그런 푸치니의 창조력 결핍을 인디의 모친과의 결실을 맺지 못한 사랑 탓으로 돌리는 대범함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무엇이 그의 음악적 영감의 불꽃을 사그라지게 하였는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말년의 평범함을 뛰어넘는 지극히 천재적이고, 영광스러웠던 젊은 시절의 그가 우리가 알고 있고, 또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고 듣고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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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andot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투란도트>와의 첫 만남은 1990년 로마 월드컵에서 칼라칼라 욕장을 배경으로 당대의 세 테너가 주빈 메타와 함께 공연했던 모습이다. 파파로티가 부르던 Nessen Dorma를 듣는 동안 마음속을 채웠던 감동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처음으로 오페라가 지닌 매력을 맛보았던 그 순간을 잊게 된다면 내 삶은 얼마나 황량하고 공허한 것이 될까? 극 중에서 칼리프가 부르는 '내일 새벽까지 내 이름을 알지 못한다면 난 공주를 얻게 되리라'고 노래부르던 그 목소리에 담긴 자신만만함과 충만한 에너지가 나를 어떻게 매혹시켰는지를 표현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버겁기만 하다.

하지만, 오늘날 <투란도트>에 대한 내 느낌은 열 살 소년이 느꼈던 감동과는 또 다르다. 이것은 비단 <토스카>나 <라 보엠>에서 보여주었던 활기차고도 기민하던 푸치니의 스타일과 <투란도트> 사이에 놓인 간격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푸치니의 사후 <투란도트>를 완성한 프랑코 알파노의 잘못도 아니다. 기실 3막의 1장 중반을 경계로 느껴지는 이질감이, 리우의 죽음과 함께 갑자기 일관성을 잃고 흘러가기 시작한 음표의 기다란 행렬이 사실 푸치니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미완성작이 되어버린 오페라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는 바로 나의 편벽하고 고약한 습성 탓이다.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들을 때마다, 어느 까페에 앉아 무료한 표정을 짓는 동안 실내에 Nessen Dorma가 울려 퍼질 때마다, 만약 『제인 에어 납치사건』에서처럼 시간을 여행할 수 있게 된다면 푸치니에게 항암제를 먹이고 <미저리>의 케시 베이츠처럼 푸치니 곁에 앉아 <투란도트>를 완성하게 만들고야 말 거라고 다짐하는 내가 바로 문제의 진앙이다. 기이한 열정에 이끌려 1926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좌에서 토스카니니가 3막 1장에서 지휘봉을 내려 놓으며 '오페라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에스트로는 숨을 거두었습니다.'라고 관객에서 고하는 장면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망상에 잠기는 일을 <투란도트>의 피날레보다 더 좋아하는 굼뜨고 하릴없는 내가 문제다.  

Turandot in Sejong Centre directed by Pizzi
자금성에서의 말 많았던 공연 이후 <투란도트>는 만다린 풍의 무대와 의상이 표준으로 자리 잡은 듯싶다. 하지만, 이런 표준화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었던 <투란도트>를 즐길 기회를 박탈당했다. 만다린이 중국 문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색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항상 만다린 풍 <투란도트>만 봐야 한다는 것은 꽤 슬픈 일이다. 오페라가 지니는 특성에 동양적인 색채를 가미하려는 의도에서 벗어나 이제는 중국적인 빨간 색조에 오페라라는 껍집을 뒤집어 씌운 듯 어색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서의 피치 공연은 DVD로 접한 테아트로 레알 마드리드의 색채가 흐릿하다. 피치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토플리스 무용수들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올해에는 지난해의 공연에 비해 무대 디자인이 암담할 정도로 단조로와 졌기 때문이다. 3막 동안 바뀌지 않는 오페라 무대는 그것이 지닌 광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평면에 그려진 우울한 천조각과 다를 바가 없다. 양 대전 사이에 유행하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거장들의 무대를 재현해 달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닐까?

칼리프 역을 맡은 테너의 작은 성량, 단조로운 음색은 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 줄 수도 있다. 자부심과 충만한 에너지를 느낄 수 없는 Nussen Dorma도 참아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참아주고 나면 이 공연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말은 핑, 팡, 퐁이 모두 바리톤인 줄 착각했다는 말이나(사실 핑만 바리톤이고, 팡과 퐁은 테너야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셋의 릴리프가 극에서 제일 나은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길이 없다,) 티무르가 눈이 먼 상태라기보다는 그저 늙고 병든 힘없는 노인으로 보였다는 것밖에 없다. 또, 핑, 팡, 퐁이 모두 대신처럼 보였다는 점에서 내 좌석에서는 셋을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 가를 설명하는 지난한 작업 외에는 이 공연에 대하여 더 쓸 말이 남지 않게 되어버린다. (실제로 핑은 재상, 팡은 시종장, 퐁은 요리사다.)

P.S.

2008/05/21 06:03 2008/05/21 06:03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Posted 2007/11/25 22:59,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인 <라 트라비아타>의 전주곡을 듣고 있노라면 음악이 마음을 매만져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고독과 방황으로 점철된 삶을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으며 말 없는 응원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울적한 마음에 술 한 잔이 청하고 싶은 날이면 어김없이 이 곡을 찾게 된다. 뒤마 피스의 본래 이야기가 졸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말이다.

기억을 돌이켜 보면 내가 처음 라 트라비아타를 접한 것은 17 살 봄으로 기억된다. 지금에야 클래식 음반들의 주요 판로가 된 패키지 판매지만 그 당시만 해도 패키지 상품의 수는 다양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당시 내가 노리던 패키지는 EMI의 세라핌 시리즈였는데 썩 나쁘지 않은 공연을 저렴한 가격에 CDP안으로 초대할 수 있다는 장점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사들인 세라핌 시리즈의 오페라 시리즈에 포함된 것은 <라 보엠>과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와 <토스카> 였고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들이다. 물론 그때의 나는 특별히 누구의 지휘를 좋아한다든지, 소프라노와 테너를 차이를 구분하는 수준에 이르지도 못했고, 사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La Traviata performed by ENO

어찌되었던 이렇게 시작된 라 트라비아타와의 만남은 꾸준히 계속되었음에 도 기실 오페라를 직접 본 것은 작년의 일이다.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토트넘 코트에 클래식 매장이 어마하게 큰 버진 레코드숍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국내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디뉴 리파티의 음반을 찾으러 갔다가 친절하고 예쁘기까지 한 점원으로부터 ENO에 대한 소개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ENO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과거 새들러즈 웰즈 컴퍼니였다는 부연 설명을 듣는 순간 한물간 삼류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전쟁이 끝난 이후 식민지의 이탈과 함께 시작된 오페라단의 감원으로 어려움을 겪던 난 소프라노가 지친 몸을 의탁하던 문제의 장소. 뭐 나처럼 소설에 미친 사람에게 이 정도라면 충분히 들려볼 만한 이유가 된다. 더욱이 소설 속에 묘사된 런던 팰러디움과 함께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양식의 건축물의 화려함을 보여준다는 런던 컨실리움을 보고 싶은 욕망을 꺾을 수 없었다.

ENO의 특이한 점은 오페라를 영어로 부른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어가 아닌 영어라는 사실이 귀에 거스렸지만 편견과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수 십 년 동안 개작에 개작을 거듭한 번안이 놀랄 만큼 선율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배우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노래 부른다는 점에서 표현의 전달력이 이탈리아어보다 높았다. 사실 몇 단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듣는 아리아보다는 그래도 귀에 익숙한 언어로 듣는 노래가 한결 더 마음에 와 닿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런 언어적 특성은 배경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내가 본 <라 트라비아타>는 1830년대 더블린을 배경으로 당시 더블린이 자랑하던 환락을 원작의 파리만큼이나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었다. 연극처럼 잘 꾸며진 배경과 과감하게 손 본 번안은 매끄럽게 맞물러 돌아가고 있었고, 가수들은 넓은 극장을 가득 채울 만큼 풍부한 성량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에 그들의 목소리가 지닌 풍부한 감정과 젊고 아름다운 소프라노까지 더해 진다면 더 이상의 공연에 대한 감상은 쓸모없는 첨언이 될 것이 분명하다.

La Traviata performed by Teatri Real Madrid

화려한 명성에도 비싼 입장권이 아까운 공연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예상보다 이런 공연들은 많다. 피치라는 당대에 가장 유명한 예술 감독의 지휘에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라 트라비아타>는 그저 그런 공연임이 분명하다. 양분된 무대의 화려함은 빼어났으나 어람용 공연장의 음향 반사는 오페라에 적합하지 않았고, 가난한 내가 살 수 있었던 3층에서 보기에 주역들의 성량은 모기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었으며, 관능미 넘치는 육신의 아름다움에도 그들의 목소리는 벨칸도 창법은 고사하고 단조로움의 재배 아래 있었다.  브린디시를 주도해야 할 합창은 얼음처럼 뻣뻣했으며, 프라마 돈나는 리릭 소프라노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기보다는 수브레토에 가까웠고, 주연 테너는 베이스 부포에 가까웠다. 뭐 그래도 2막의 제르몽과 비올레타의 앙상블부터 3막의 알프레도, 비올레타, 제르몽, 듀폴의 앙상블은 그나마 좀 나았지만 이 오페라의 수준은 진행 중에 브라보가 고작 한 번 밖에 터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충분하다.

관능적인 소프라노와 모델처럼 시원하게 생긴 테너들이 무대의 장악한 이 시대는 한 편으로는 눈이 즐거워서 반갑지만, 한 편으로는 이것은 좀 아니다 싶기도 하다. 아름답고, 노래까지 잘 부르는 재주 많은 가수들을 원하지만 선량한 마음보다는 심술을 부릴 때가 잦은 신은 결코 재능과 행운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눈이 즐거우면 귀가 좀 덜 즐거운 법이고, 귀가 즐거우면, 눈이 좀 덜 즐거운 법이라는 법칙에 순응하는 수 밖에.

오페라를 보기 전 친구에게 피치의 전매특허인 상반신 누드의 무용수들이 등장할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 말을 전반만 맞았고, 나머지 절반은 틀렸다. 차라리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 자신감 없는 무용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설픈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는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쏜살처럼 사라져 버린 무용수들 앞에서 무어라고 말해야 하나. 관객들이 바라보는 것은 벌거벗은 무용수 한 사람이 아니다. 관객의 처지에서 벌거벗은 무용수는 그저 극의 진행상 보이는 배경의 하나일 뿐이다.

사실 화려한 투우사의 노래와 멋진 집시의 춤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이만저만 실망인 공연이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꼭 집어 말할 만큼 큰 실수는 없었던 듯싶다. 그러나 무언가 탁월한 감동으로 내부를 진탕 시킨 것 또한 없었다. 그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무대와 아름다운 가수들의 재주를 바라보는 동상이 된 기분을 빼고는 내가 얻은 것은 없다. 음악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양철 인간이 된 것처럼 객석에 앉아있는 나는 두 번 다시 이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낯설고 또 낯설었다.

2007/11/25 22:59 2007/11/25 22:59

트로이의 여인들

Posted 2007/11/21 22:09,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지금 생각해 보면 용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17살 무렵 내가 가장 좋아하던 비극의 주인공은 안드로마케였고 이를 사람들에게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프랑스 비극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이들로서는 그 유명한 연극을 떠올리며 17세기 연극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건만 애석하게도 당시 내 주변에 에우리피데스는 고사하고 라신을 읽은 사람도 없었던 암흑의 시기였으니 만큼 사람들에게 안드로마케는 안드로메다 성운의 자매쯤으로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다.

어찌 되었건 『트로이의 여인들』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중에 꽤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다.  <전쟁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로 규정되지만 사실 이 세 편의 희극 사이에는 <복수 3부작>과 다르게 이야기의 연속성이 없다. 오히려 『트로이의 여인들』은 훨씬 이전에 출품된 『안드로마케』와 더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두 연극 모두 일리아드의 후일담을 다루고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인생 역경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연극은 같으면서도 조금 다르다. 『트로이의 여인들』이 전쟁이란 외부성으로 말미암아 한 가정이 어떻게 파괴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면 『안드로마케』에서는 가정 갈등으로 말미암아 한 가정- 보다 정확하게는 한 여성이- 어떻게 파괴될 뻔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극을 비평하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항상 제기되는 문제지만 희극의 텍스트를 읽는 것과 연극을 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똑같은 대사라도 연출가의 의지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캐릭터 간의 비중 분배도, 극을 이끌어 가는 힘도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범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릴 공통분모라는 것이 존재한다. 결국, 고전의 경우 이 공통분모에 충실할수록 원전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여기서 멀어질수록 실험 정신이 투철하다는 평판을 얻게 되는 셈이다.

사실 내가 본 『트로이의 여인들』의 연출은 파격적일 정도로 인물 간의 균형이 깨져 있었고 기존의 해석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대부분의 해석에서 카산드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 목소리를 내지만 아무도 그것을 듣지 못하는 진공의 벽에 둘러싸인 인물로 그려진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녀의 정신은 신과 운명의 희롱 앞에서 처참하게 부서져 있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알고 있기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약한 처녀이자 한편으로는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기에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기뻐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반면 안드로마케는 남편에 이어 아이까지 잃고, 가장 증오 해야 할 적의 아내가 되는 운명을 지닌 여성으로서 전쟁으로 파괴된 가정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헤카베는 트로이의 여왕이자 최후의 생존자로서 국가의 소멸과 폭력의 재생산이라는 메커니즘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주체다. 결국, 보통의 연출에서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이야기의 주재자는 헤카베가 되며, 안드로마케의 여성성은 비극을 심화시키는 중요 도구다.

하지만, 이 연출에서의 중심인물은 헤카베가 아니라 카산드라다. 그녀의 선이 굵은 연기는 신들의 장난에 가장 처참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순수한 처녀가 아니라 지독한 광기를 품은 처벌자로써 그려진다. 헤카베는 마지막 남은 자식인 카산드라의 변화와 손자의 허무한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안드로마케는 그저 원작이 있기에 등장하는 수준으로 전락한다(그녀의 격렬한 몸짓으로 표현되는 고뇌는 솔직히 아무런 공감도 자아내지 못했다)


아니 애둘러 말하는 것은 이제 멈추어야겠다. 이 연극은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위안부 문제를 조금 언급하고 있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전쟁에서 무고한 희생자 역할을 도맡는 것은 가장 연약한 여성과 어린아이라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지는 못하다.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대사는 원전에 기초하며 나레이션 역시 원전에 충실한 편인데도 그리스 비극의 특징인 등장인물의 운명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강렬한 동화 현상이 없었고, 배우들의 연기를 선이 굵고 움직임이 컸으나 단지 그것뿐이었다. 연극은 시각적 효과를  통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을 진정으로 아프게 만드는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찰하기 보다는 절규 자체를 보여주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물론 나레이션을 창으로 처리한다든지, 격렬한 안무를 통해 신 내림를 표현함과 동시에 강간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이나 인물의 내적 고뇌를 형상화 시켰다는 점에서는 약간 점수를 줄 수도 있으나 뭐 그 정도야 요즘 세상에 흔해 빠진 것이 아닌가? 표정이 없는 배우는 그저 대사를 읊는 마리오네트에 지나지 않는다. 연출의 지시에서 벗어난 배우 개인의 캐릭터 해석이 있었더라면 한층 나은 극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연극에서 배우는 그저 연출의 의도를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투사하는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P.S.

연휴동안 본가에 내려갔다가 트로이의 여인들을 다시 읽는 동안 처음 시작 장면과 카산드라와 관련된 부분을 다른 희극과 헷갈려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내 기억이 그리 온전한 편은 아니라는 반면 교사로 삼아야지 싶다.

2007/11/21 22:09 2007/11/21 22:09

 독설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독설이 예의에 벗어난 과격한 행동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이전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상대를 찌름과 동시에 나 역시 무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설을 퍼부어야 할 순간이 있으니 바로 함부로 기사를 쓰는 후안무치한 작태이다.

 최근 발레계의 가장 큰 이슈는 보그에 게재된 김주원의 사진이었다. 나이 지긋한 노신사의 훈계조의 칼럼도 읽었고, 지극히 도식적인 논리 구조에 따라 몸이 상품이 된 시대라는 개탄의 목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나라면 그런 글을 쓰기 이전에 최소한 사실 확인 정도는 했을 것 같다. 김주원이 무엇이 아쉬워서 몸으로 유명세를 얻어야 하며, 까닭 없이 보수적이기만 한 발레계에서 주홍글씨를 받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누드- 인지도 및 포지션 향상 - 몸의 상품화로 이어지는 해석이 꽤 정확하게 핵심을 집어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모든 경우를 설명할 수 있는 최적의 구조는 아니다. 차라리 나라면 '몸'의 역동성을 겨우 그 정도 밖에 해석해 내지 못한 자칭 전문사진작가들이 망쳐놓은 좋은 기회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다음은 불성실한 기자의 한심한 작태이다. 어느 일간지에 실린 이 공연의 논평은 정말이지 두 번째 인터미션에서 재빠르게 자리를 뜬 채로 대충 기사를 작성했음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기사의 초점은 <포킨의 춘향>을 통해 한국 발레 역시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방향으로 논지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논조는 공연을 단 한 순간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포킨의 춘향은 너무나 낡은 스타일의 안무라 무대와 의상에 대단히 공을 들였음에도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없다. 본격적인 현대 발레로 재편하려고 투입해야 할 자원과 노력은 예측하기조차 힘들 정도이고 설령 그것에 성공하더라도 이 발레는 결코 한국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저 한국적인 옷을 빈에서 벌어진 어느 코미디에 덧씌워놓은 것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공연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에이프만의 뮤자게트> 였다. 인터미션에서 재빠르게 얼굴이 꽤 알려진 발레리나의 코멘트를 따낸 다음 콧노래를 부르며 조기 퇴근을 즐겼을 그 기자의 모습을 생각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을 잡을 수가 없다.

 어찌 되었건 첫 번째 공연인 <레 실피드>는 상쾌한 바람 대신 춘곤증을 유발하는 졸린 바람이 부는 다듬어지지 않은 고전 발레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고, <포킨의 춘향(사랑의 시련)>에서는 소재가 지닌 반복의 지루함을 덜고자 도입한 새로운 배경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언가 새롭거나 탁월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듯이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무용수들의 가능성을 낡은 안무에 가두어둔 속박이 매 순간순간 느껴졌다는 것 이외에 여기에 관하여 더 남길 말은 없다.

 하지만 <에이프만의 뮤자게트>의 경우에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좋은 공연이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바흐의 바이올린 콘체르토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이 이토록 발레와 잘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에는 알지 못했었다.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뭉텅한 소리와 콘체르토를 끌고나가기에는 3% 부족한 제1 바이올린 만 제외하면 연주도 훌륭했고, 김형웅의 신들린 듯한 춤사위 역시 아름다웠다. 조명과 암전이 조화를 이룬 무대와 진중하면서도 빠른 움직임, 현대 발레가 보여주는 아카데믹한 모든 동작들을 완벽한 호흡으로 맞추어내는 솜씨에 감탄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감탄해야 할까?

 두 해전 우연히 <뮤자게트>의 공연 클립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공연이 그리 나쁘지 않은 공연이었음에도 국립발레단의 솜씨는 기립 박수조차 모자랄 호연이었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춤사위의 흐름을 보고 있노라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잔 실수 하나 없이 아귀가 착착 맞아떨어진다고 해야할까? -여기에서 피날레의 군무가 지니는 논리적 불완전성과 전형성은 에이프만의 현기증으로 의제로 해 두자!- 그동안 국립발레단의 정기공연은 클래식 발레에 머물러 있었고, 최근에서야 러시안 모던 발레로 영역을 확장했는데 이제는 현대 발레 역시 정기공연에서 보게 될 날이 머지않았나 싶다.

P.S.
그렇다면, 근래들어 자주 공연되기 시작한 해외 무용단들의 내한 공연이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것은 순전히 기회비용을 심각하게 따지는 미친 내 사고의 탓이다.

포킨의 안무는 키로브 이전 마린스키 발레의 원형을 느끼기에 딱이다. <레 실피드>의 경우 <불새>보다 더 유명한 작품이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불새>가 더 볼만하다.

VIP석에는 근래 들어 회사 협찬으로 나누어진 초대권을 들고오는 넥타이 부대들의 출현이 잦다. 남자들 셋만 모이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제멋대로 군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나 역시 이 범주에 속하지만- 게다가 이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발 '브라보'는 한 번만 하자. 괴성으로 이어지는 '브라보'를 삽 십 초 간격으로 계속 듣는 것은 누구에게나 심적으로 괴로운 일이다. 대신에 공짜 초대권으로 꽃다발을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매 공연 빈손으로 무대 인사를 하는 발레리나를 보는 것은 이제 지겹다.

2007/11/03 13:25 2007/11/03 13:25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Posted 2007/10/23 14:02,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Romeo and Juliet
희극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를 뽑으라면 열에 아홉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린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난 이 걸출한 희극을 연극 무대에서 본 적이 한번도 없다. 너무 널리 알려진 작품이기에 되려 만나기 힘들다고나 할까? 아니면 이미 너무나 다양한 변주를 접해왔기에 여간 특이한 해석이 아니라면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일까?

어찌되었건 난 올리비아 핫세 보다는 루즈 바어만의 <Romeo + Juliet> 세대에 속한다. <바스켓볼 다이어리>의 이미지를 더욱 섬세하게 스크린에 투사한 레오에 열광했던 누이들을 바라보았고, 결코 미인은 아님에도 눈길을 끄는 클레어 데인즈를 극장에서 목격한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실 라디오헤드의 'exit music'과 카디건스의 'lovefool'이 들어 있는 O.S.T.를 들으며 입가에 걸렸던 만족감이 십 년이란 시간에도 불구하고 선하다. 그런데 발레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한 이 글이 어째서 이런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일까? 아직 베로나에서 만난 줄리엣은 시작도 못했는데 말이다.

Romeo and Juliet Op.64 composed by Sergey Prokofiev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스코어를 처음 접한 것은 시기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밤이었다. 그 시절에나 지금에나 난 좀처럼 라디오를 듣지 않는데 그 날에는 까닭 모르게 친구의 워크맨을 빼앗아 들었고 야간자율학습 시간 내내 이름 모를 클래식 프로그램에서 나온 연주에 심취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로얄 오페라 하우스 혹은 코벤트가든으로 불리는 장소에서의 실황 연주라는 말에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기행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런던을 떠올리던 내 표정은 지금도 선하다. 어두운 창문에 반사되는 그 표정을 발견하는 일은 그 후로도 수 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코피예프의 곡은 3막 전반부까지는 경쾌하기 그지없다. 언제인가 내 친구는 이런 분위기를 'steppe-like'라고 설명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난 이 말 이상으로 그 느낌을 설명하는 적절한 단어를 발견하지 못했다.-물론 지리학에서의 의미는 다르다- 빠르고 적당히 경쾌하며 못내 사랑스러운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난 3막의 'Romeo bids Juliet farewell'를 가장 좋아한다. 이 시점을 경계로 긴장감이 점차 고조되면서 비극이 최고조로 이르기 때문이다. 마치 톨스토이를 읽다가 갑자기 도스토예프스키로 넘어가는 분위기랄까? 하지만 3막 후반부의 'Dance of the girl with lillies' 분위기는 정말 독특하다. 어찌 보면 극적 긴장의 최고조이고, 다르게 보면 통일성을 깨는 불필요한 스코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발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지게 된다. 평범한 비극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비극을 뛰어넘는 가슴을 찌르는 절규로 남느냐의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BRB's R&J choreographed by Kenneth MacMillan vs Universal Ballet's R&J choreographed by Oleg Vinogradov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아직 리뷰를 쓸 정도로 다양한 발레를 보지는 못했다. choreographer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각자의 특징을 구분하며 발레를 즐기기에는 내 몰입의 정도는 미천하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발레 안무의 스타일을 구분하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난 가을에는 Birmingham Royal Ballet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볼 기회가 있었고 지난주에는 Kirov Ballet로 구분되는 유니버셜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볼 기회가 있었다. 사실 확연히 다른 스타일의 안무를 볼 기회는 많지 않다. 게다가 설령 본다하더라도 그 차이를 구분하는 작업은 녹녹하지 않다. 더욱이 나처럼 발레의 문외한이라면 말이다.

키로프 발레(혹은 마린스키 발레)는 상페테르부르크에서 비롯되었다. 아직 러시아가 차르의 지배하에 있을 무렵에는 임페리얼 발레로 불렸던 이 발레단은 이후 수많은 클래식 발레를 새롭게 안무했고, 결국 스탈린 시기에는 클래식 발레와 구분되는 모던 러시안 발레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 스타일은 <스타르타쿠스>에서 절정을 보인다. 이후 키로프의 명성은 볼쇼이 밀려 점차 희미해지지만 여전히 키로프 발레가 배출한 안무가들은 활동은 전설에 가깝다. 반면 로얄 발레의 경우 그 성격은 모호하다. 과거의 로얄 발레의 코리어그래퍼들이 연출한 발레는 확연하게 키로프 혹은 볼쇼이 스타일과 차이를 보이지만 오늘날에는 볼쇼이보다 더 볼쇼이적인 발레를 선보이는 것으로 정평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이 라는 발레로 주제를 한정시키면 로얄 발레의 맥밀런의 스타일이 조금 더 낫다. 그는 키로프 발레 스타일의 완성된 동작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면서도 극의 서사 구조 안에서 죽음이 가져다주는 불쾌한 증거와 운명의 부조리함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 비노그라도프는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너무 클래식하기 때문이다. 맥밀런의 안무가 서사극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무언의 몸짓이 만들어내는 절규를 관객에서 전달했다면 비노그라도프의 안무는 흐름은 아름답지만 평범하다. 물론 이런 비판에는 발레리노의 잦은 실수가 한몫 거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의 안무에서 러시안 발레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안무 동작을 발견하기란 되려 쉽지 않았다. 설령 pas de deux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전개되었다 하더라도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고전 희극을 해석하는 능력과 이를 안무로 형상화하는 능력은 맥밀런이 한 수 위다.

하지만 비노그라도프가 키로프 발레가 변신하는 과정의 부산물이라면 이런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그의 발레는 완성작이 아니라 변화를 모색하는 진행형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거와 변화가 함께 공존하는 기인한 발레로 연출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최근 유니버설 발레단의 외도와 연습 부족으로 클래식 발레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기에 너무나 평범한 인상의 발레로 전락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다. 기나긴 그의 삶에 대한 헌사로 받쳐진 졸렬한 발레 한편이 그의 세련되고도 우아한 태도와 도대체 어울리지 않은 점만 빼면 말이다.
2007/10/23 14:02 2007/10/23 14:02

달링(Not now darling)

Posted 2007/08/28 22:45,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소극장의 묘미는 배우의 눈동자와 뺨의 작은 경련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객석과 무대사이의 거리가 주는 재미이다. 조명을 반사하는 눈동자는 때로는 불같은 열기로 타오르기도, 때로는 관능적인 나른함을 품고 있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눈동자는 마주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그런 눈동자들만이 아니다. 기실 내가 좋아하는 눈동자들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틈을 노리는 결의 혹은 예기치 못한 어긋남에 당혹한 눈동자이다. 복선을 암시하기 위해 영리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칠 때 공유하게 되는 은밀한 공모감은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소극장에서는 소품이며 무대며 코러스나 코믹 릴리프에 크게 신경을 할애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배우와 스토리텔링뿐이다.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레이 쿠니와 존 채프만의 코메디인 <달링(Not now darling)>은 이런 소극장의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한 연극이다. '도발적인 섹시 코메디'라는 광고 문구와 달리 목울대를 자극하는 관능적인 열기는 없지만 정신없이 꼬이고 꼬이는 상황극의 묘미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땀에 젖은 셔츠와 이마의 흥건한 물기는 사건의 심화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며 속옷차림으로 뛰어다니도록 운명 지어진 미인들이 늘어갈수록 두 명의 남자 주인공이 해결해야할 문제 역시 난해함을 더해간다. 사실 <달링>의 연기는 열연이나 호연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수준에 가깝다. 하지만 탄탄한 극작의 힘과 유쾌한 분위기는 범용한 연기를 호연 이상으로 느끼게끔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일부 배역들의 확연한 연기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리드 캐릭터들의 중심 잡힌 캐릭터 해석은 부자연스러운 흐름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선보인다.

적절한 방백의 사용과 사건의 전개 가운데 깔린 복선. 복선을 고조화시키는 배우들의 의뭉스런 표정은 처음 접한 이야기임에도 리듬있는 해석이 자연스럽게 가능하도록 도왔던 것 같다.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팝콘처럼 즐기기 적절한 연극.

P.S.
신문을 통해 '극적 반전'이라는 말을 수없이 읽었으나 실제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쉬운 연극을 보면서, 거기에 배우들이 표정을 통해 '이 부분이 복선이예요'하고 성실하게 외치는 극을 보면서 반전 운운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근래들어 이유 없이 유행하기 시작한 'Deus ex machina'를 입술에 올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2007/08/28 22:45 2007/08/28 22:45

사운드 오브 뮤직

Posted 2007/05/03 15:37,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며칠 전 아마존에 주문했던 <사운드 오브 뮤직>이 도착했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나누어 써야 하는 문제의 두 주지만 잠시 틈을 내본다.

내 주변에는 유난히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간의 강을 한참 거슬러 가다 보면 1992년쯤 그 첫 인물과 조우하게 되는데 그가 부르는 ‘Do-Re-Mi’가 무슨 연유로 고까워 보였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당시의 내게 줄리 앤드루스는 부잣집 마나님 자리를 노래 하나로 꿰어 찬 성분 불명의 전직 수녀에 지나지 않았고 그보다는 스위스로 탈출한 이후 이 대가족의 호구지책이 불분명하다는 사실이야말로 내 관점에서는 진짜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생각을 여과 없이 말하는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권장 사항이 아니다. 날 선 말투야 말로 선량한 아이들의 꿈과 마음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작년 11월의 첫째 수요일. 리젠트 스트리트에서 까나비 스트리트로 길을 바꾸어 가던 순간 귓가에 ‘my favorite things’가 들려왔다. 인파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다소 의아할 무렵 눈 앞에 <사운드 오브 뮤직>의 리바이벌 공연을 알리는 거대한 광고판이 보였다.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오랜 덤덤함을 털기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때는 없을 것이라고 어떤 목소리가 작지만 분명하게 속삭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 우연은 절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길에 London Palladium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How do you solve a problem like Maria? >를 보면서 코니 피셔가 평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노래 하나는 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한참 전에는 스칼렛 요한슨이 마리아 역을 고사했다는 가십을 읽은 적도 있다. SJ의 풍만한 몸매는 좋아하지만 그녀가 마리아를 연기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넌센스에 가깝다. 무엇보다 내 도전 의지에 불을 지른 것은 연말까지 전회 매진 되었다는 극장 직원의 퉁명한 목소리였다.

좀 성급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운드 오브 뮤직>은 <레미제라블>에 필적할 만한 뮤지컬이다. 그 작은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서정적이다. 바이올린 주자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놓은 고독함을 어루만질 정도로 빼어난 연주를 자랑하며, 코니 피셔는 고작 열 번 남짓의 프리뷰만에 무대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생리적인 눈물 이외의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벽하게 무시하던 내 삶에 감동이 만들어내는 무언가 끈적한 것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일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무엇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근래 웨스트 엔드의 유행이 되다시피 한 수직 공간을 2개로 분할함으로써 얻는 공간감 대신에 사선과 거대한 원반을 이용해 수직 공간을 평면으로 바꾸는 기염을 토했다. 숨겨진 크레인과 잘 계산된 구조 공학이 만들어내는 무대의 변형과 결합은 단지 놀랍다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잘 짜여진 무대와 규모를 능가하는 실력을 보여준 오케스트라(?), 프리뷰를 제외하면 고작 2번째 공연임에도 손발에 척척맞는 배우들의 호흡. 1막에 비해 2막의 이야기 전개가 조금 덜 매끄러운 연출이었지만 여러 장점들에 가려 불평할 작은 틈조차 찾지 못할 정도의 공연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앨범은 공연만큼이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내가 느꼈던 감동이(정확하게는 내가 기억하고 느낌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이어피스로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내가 본 공연과 어떻게 다르고, 작은 디테일들이 변했는지를 찾아보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이런 잔재미도 진짜 공연에 비하면 하품 나올 정도로 지겨운 재미에 불과할 뿐이다.

P.S. leave a message, if you want musical numbers.

2007/05/03 15:37 2007/05/03 15:37

Wicked

Posted 2006/09/19 21:07,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런던에서 제작된 뮤지컬과 뉴욕에서 제작된 뮤지컬의 차이점을 굳이 비교하자면 서정성과 주제를 변주해 내는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아니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음악에 사용되는 전자 음악의 빈도에서도 꽤 차이가 난다. 뉴욕이 오리지널 버전인 뮤지컬들이 디즈니풍의 화려한 볼거리와 퍼레이드같은 군무로 승부를 건다면 런던이 오리지널 버전인 뮤지컬들은 서정적인 선율과 선이 굵은 연기력으로 승부를 건다. 솔직히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판단하기 이르지만 나에게 조금 더 호소력 있게 다가온 뮤지컬들은 런던이 오리지널 버전인 뮤지컬들이었다.

사실 지난 토요일 밤을 심심하지 않게 만들어 준 'Wicked'는 런던에서 공연된지 고작 2주 밖에 되지 않았고,  다음주까지가 프리뷰 기간일 정도로 이곳에서는 낯선 뮤지컬이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의 반응은 다소 호들갑스러웠고-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상황을 영국 사람들의 소시민적인 오버 기질이라고 정의내리기 시작했다- 실제 퍼포먼스에 비해 과도하게 즐거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후하게 점수를 주어도 고작 73점 내외인 공연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란 아직 버겁다. 물론 이미 지출한 비용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태도는 그것이 설령 최악의 공연일지라도 호들갑이라는 위약을 투여한 채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아직까진 무리다.

그러나 이런 오버 기질보다도 나를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하모니가 부재한 코러스였다. 춤 솜씨 하나만큼은 발군이었지만 시골 교회의 성가대만도 못한 화음은 정말이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극장의 음향 시스템도 최적화되지 않아서 소리가 난반사되었으며 공연 스텝과 연기자간에 호흡이 맞지 않아 애드리브가 이어지는 상황조차 빈번했다. 하지만 브로드웨이 뮤지컬인만큼 볼거리 하나만큼은 풍성하다. 쉴새 없이 몰아치는 군무의 역동성은 혀들 내두를만 하고, 풍성한 소품의 활용과 창의적인 무대 디자인은 높은 점수를 줄 만 하다. 그러나 소설만큼 재미있지는, 상상하던 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놀랍지는 않다.

Wicked는 정신 없이 산만하고, 주제를 향한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 화려한 무대와 소품, 잔재미는 있으나 이야기 축선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 이것은 가장 완벽하게 공연된 무대에서조차 내가 불만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말이나 다름 없다. 기회가 된다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뮤지컬이지만 연인과 함께라면 대답은 결단코 'No'이다.

아니 이 뮤지컬의 진짜 문제는 창법에 있지 않을까 싶다. 위키드는 즐거운 뮤지컬이지만 심금을 울리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결어되어 있다. 이파마와 피요르의 사랑이, 글린다의 애처로움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어도 마음 속으로 스며들지는 않는다. 목소리가 아름다워,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결혼이란 것을 해보자고 마음먹게 되었다던 누군가의 말을 긍정하는 나로서는 이 뮤지컬에서 어떤 정서적인 아름다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단지 그 역할을 연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스럽게 만드는 캐릭터란 가면이 이 뮤지컬에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내가 십대 소년이었더라면 미친 듯이 열광했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내게 이 뮤지컬은 뭐랄까? 사탕과자처럼 좀 짜증스런 물건이다.

어찌되었던 다시 착한 관객으로 돌아가 촌평을 해보자면 이 뮤지컬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험이란 시간이 가져다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을 버리고 9살 소년이 되는 것이다. 아름답고 누구에게나 사랑받지만 진짜 그녀가 원하는 사랑만큼은 얻을 수 없는 한 마녀의 잔잔하지만 구슬픈 미소와 투쟁 끝에 진짜 사랑과 자유를 얻게 되는 또 다른 마녀의 해피앤딩에 집중해 보는 것.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한 남자와 그 남자를 오해 끝에 사랑해 버린 한 여자.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조차 모르는 우유부단한 한 남자의 성장을 선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이 두가지가 그나마 이 뮤지컬을 재미있게 감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2006/09/19 21:07 2006/09/19 21:07

Troilus and Cressida

Posted 2006/09/11 21:01,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근래들어 주말에는 계속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있다. 지난 주의 여행지는 Shakespeare의 고향인 Stratford-upon-Avon이었다. 영국에서 처음하는 기차 여행의 당황스러움과 그 허름한 역사는 논외로 하고 15분이면 시내 지리를 꿰뚫을 작은 도시에서 보내는 주말은 2주째 계속되고 있는 좋은 날씨와 어울려 꽤 평화로웠다.

사실 이곳에서 볼만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생가가 아니다. 이곳의 알짜배기는 바로 로얄 셰익스피어 컴퍼니 소속의 극장이다. 강변을 따라 3개의 극장이 염주알처럼 들어서 있는데 한참 시즌인 지금으로서는 세계 각지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또 하나 인상깊었던 점은 강둑에 매인 보트들이 모두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로잘린이라는 이름의 보트를 무척이나 타보고 싶었는데 혼자 보트를 젓는 일을 꽤나 등급이 높은 청승이라 그만 두었다. 물론 만약 나중에 런던으로 출장 올 일이 있으면 주말을 이용해 근사한 데이트를 즐겨보기라는 더 중증의 청승을 떨며 말이다.

개인적으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한 번 밖에 읽지 않았기에 공연이 시작되기전 이틀 동안 급하게 텍스트를 해석하고 암기하니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희극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듯이 이 희극은 셰익스피어의 다른 희극에 비해 갈등 구조의 합리성이 떨어지고 내적 갈등의 심화 과정이 어설프다. 한 마디로 좋은 희극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올해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로얄 셰익스피어 컴퍼니를 대표해 출품된 작품이고 신문에서 너무나 많은 지면을 할애에 다루었으며 한국에서 공연되는 것을 볼 기회가 희박한 작품이라고 생각했기에 선택한 공연이었지만 역시나였다. 설익은 배우들의 연기와 갈등 구조의 빈약함은 화려한 무대와 다양한 창의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려지지 않았다. 뭐랄까? 명성에 걸맞지 않은 연기력에 놀랐다고 해야하나? 하지만 주연 배우들에게 탓을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태도이다. 제목과 다르게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어려운(난해하지는 않다) 작품을 고른 그들의 선택과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어찌 되었던 영국에서 본 최초의 연극 공연이고 무대의 폭 넓은 활용과 크고 또렷한 발성, 두터운 조연급들의 호연과 화려한 무대 디자인.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창신성만큼은 꽤나 돋보였다. 매우 포멀한 리뷰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 내가 느낄 수 있는 공연의 깊이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또 한 가지 변명을 덧붙이자면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친구들에게 공연과 여행에 관하여 엽서를 썼기에 더 이상 쓸 말이 남아 있지 않다는 탓도 크다.

P.S.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영화에 비해 현실은 제약적이며, 이성적이다. 하지만 그 제한된 범위의 행동만으로도 난 충분히 감동했고 평생동안 잊지 못할 그 무엇이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추억하며. Amor est vitae essentia

2006/09/11 21:01 2006/09/11 21:01

Magia de la Danza

Posted 2006/09/04 21:32,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지난 토요일에 본 발레 공연은 국립 쿠바 발레단의 런던 데뷰를 위한 리허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옳을 것 같다. 정식으로 하나의 발레극을 공연한 것이 아니라 가장 유명한 발레 몇 개의 하일라이트를 짜깁기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젤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호두까끼 인형과 코펠리아, 돈키호테, 백조의 호수의 Grand Pas de Deux와 솔리스트들의 Pas de Deux로 구성된 이 날 공연의 완성도가 낮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유명한 발레의 장면 장면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음은 물론이고, 표현력이나 기술이나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날 공연에서 부족한 것은 무대 디자인과 의상 디자인이었다. 한국의 화려함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국립 쿠바 발레단의 소박하다 못해 때로는 촌스럽기까지한 무대와 의상 디자인에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발레단 소속 오케스트라의 실력은 정말이지 놀랄만한 수준이었다. 물론 트럼본 독주에서 소소한 실수를 계속한 아저씨 한 분 덕분을 제외하면 말이다. 차라리 앰프를 트는 것이 나을 것 같은 한국의 오케스트라와 비교해보자면 이것은 정말 들을 만한 음악이었다. 가볍기 그지 없는 토슈즈들의 착지음과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섬세하게 어울려 만들어 내는 소리를 묘사하자면 아름답다라는 형용으로는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소리를 느낄 틈이 없다. 완벽한 아름다움에는 강력한 흡입력이라는 그림자가 따라 붙기 때문이다.

발레리나들의 신체 조건을 비교해보자면 한국의 경우가 더 크고, 날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의 주연급 발레리나들을 보게 되면 그들의 몸짓에서 대단한 자신감이 느껴지곤 했는데 국립 쿠바 발레단의 경우에는 키는 작지만 한국의 발레리나에 비해 탄력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의 발레리나를 볼 때마다 느끼곤 했던 자신감 대신에 호소력있는 표현력을의 후광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의 발레리나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보다는 고고한 존재로 보여졌다면 이들은 포옹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무엇보다 긴 다리와 손짓, 탄력적인 허리가 만들어내는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는 움직임은 경탄스러웠다.

발레리노의 경우 신체 조건이나 기술이나 한국의 발레리노들이 이들에 비해 빠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근력의 차이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한국의 발레리노들이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움직임이 이들에게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솔리스트의 실력이 주연급 발레리나들 못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코다에서 보여주는 움직임을 통해 보건데 국립 쿠바 발레단단의 실력은 평균적으로 고를 것이 분명하다. 발레리나/노의 층이 두껍다는 점이야말로 이들의 정식 데뷰 무대의 성공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볼쇼이 발레단이 그 명성을 잃어가는 지금. 그들의 명성을 이어갈만한 연습량을 보유한 발레단은 아마 여기뿐일 것이다.

끝으로 발레 관객에 대해 촌평하자면 영국에서는 무엇을 하던 경제력과 클래스라는 단어가 머리 속을 맴돌게 된다. 내가 앉은 서클은 그다지 비싸지 않은 자리였기 때문에 주말 저녁에 무언가 문화적 요소가 강한 데이트를 즐기려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정 표현마다 터지는 영국 남자들 특유의 명랑 반 성적인 위트가 반 섞인 코웃음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니 상대의 무릎을 애무하기 바쁜 커플들 틈에서 발레를 보고 있는 내 자신이 조악하게 느껴졌다. 어려운 표현을 깔끔하게 성공시킬 때마다 터져나오는 매우 작은 탄성과 박수 소리에 동참하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전해져 오는 동시상영 극장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경험과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진지한 사람들 속에 끼고 싶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초콜릿 봉지 소리에 집중을 방해를 받을 때마다 살의가 조금씩 커졌다.

방해 요소 덕분에 종종 집중이 깨지기고 했으나 어찌되었건 이 날 공연은 몇해 동안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은 채 다른 발레를 보는 기준이 되어줄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가장 유명한 발레의 하일라이트들을 한 자리에서 보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정상의 언저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발레단의 공연이라면 말이다.

2006/09/04 21:32 2006/09/04 21:32

레미제라블

Posted 2006/08/28 23:26,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17살 때부터 어제에 이르는 그 긴 시간동안 가능하면 난 뮤지컬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을 자제해왔던 것 같다. 한국에서 초연되기 시작한 수많은 공연들에 흥분하면서도 애써 초연한 척 굴었던 것 같다. 왜냐고? 정확한 이유같은 것은 시간의 흐름에 지워져 기억나지 않지만 뮤지컬의 대중화와 함께 매우 특별한 기호였던 뮤지컬 감상이 평범함의 굴레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뮤지컬이 내 인지의 영역에 포섭된 97년경에는 아직 뮤지컬이 대중화되기 이전이고 요즘처럼 20대 여성들이 열광하는 하나의 문화적 트렌드로 정착되기 이전의 시점이다.

폴 오스터에 대한 언급이 주변에서 사라진 것처럼 snobbery한 경향을 지닌 나에게 대중화는 견고한 regime의 붕괴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의도에서 이런 서두를 쓰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유명세와 대중화는 항상 타인에게 무언가 소중한 것을 빼앗긴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시오노 할머니가 공화정 로마에 대한 혼자만의 은밀한 소유욕을 박탈한 것처럼 2000년대 들어 관객 100만 시대에 접근한 뮤지컬 또한 그런 바람직하지 않은 박탈감을 선사했노라고 투정부려 보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다시 97년으로 돌아가서 누이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그 화려함에 매료된 나는 록뮤직을 들으며 반항적인 태도로 똘똘 뭉쳐있어야 할 그 시기에 뮤지컬 스코어를 들으며 시간을 보낸 듯 싶다. 친구들의 생일 선물로 주말 하루를 꼬박 받쳐 근사한 뮤지컬 테이프를 만들며 지겨운 십대를 어서 벗어나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레스터 광장에 군집한 수많은 극장을 순례하는 방랑자가 되고 싶다고 되뇌였던 것 같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캐츠가 한국에서 초연되던 그 즈음에 티켓 가격과 공연의 질을 저울질 하던 나는 한국에서는 절대 뮤지컬을 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옹졸한데다가 분별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다짐이 분명하다. 하지만 다짐은 결심이 되는 법이고 결심은 행동을 제약한다. 아니 그후의 삶이 나에게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옳다. 굳이 소소한 이유를 한 가지 더 들자면 절친한 나의 지기 모는 대학 신입생 시절 사모하던 처자와 '키스 미 케이트'를 보고 난 후에 채인 적이 있는데 그 사건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음 속으로 '뮤지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샤콘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분별없는 짓이다'하고 되뇌였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시작은 사실 순탄하지 않았다. 연휴를 포함한 토요일 저녁 공연의 티켓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난 오피셜 에이전트가 아닌 리셀러의 문을 노크했다. 전화기 한 대와 재털이, 현금 박스와 티켓이 담긴 작은 가죽 가방이 전부인 사무실의 문을 말이다. 한국에서의 나라면 절대 과세를 회피해서 얻는 수익에 일조하는 일을 피했겠지만 상황이 안좋았다. 아니 호기심이 작동했다는 것이 더 옳다. 뭐 그렇다고 내가 암표를 거래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 만큼은 암표상이나 진배 없었다.

이곳의 시스템은 한국의 90년대 초반의 극장을 연상시킨다.(멀티플렉스 이전의 조직폭력배에 의해 운영되는 극장을 상상하면 된다) 촌평을 하자면 전혀 선진국답지 않다. 모든 시스템이 경제적 합리성에 의해 조직화되기 보다는 가능한 많은 단계를 거쳐 과세를 회피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국의 티켓 가격이 상한이 정해진 네덜란드경매 방식에 의해 점차 가격이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이곳은 경매 참가의 기탁금이 높은 상태에서 가격이 점차 오르는 보통의 경매 방식으로 가격이 결정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암표가 아닌 이상 한국의 가격은 아무리 수요가 많아도 액면가 이상으로 상승할 수 없지만 이곳은 최적 가격의 하한은 정해져 있지만 수요에 따라 상한은 꽤 높게 형성될 수 있다. 사실 내가 구매한 표는 이미 발권된 취소표의 일종이었다. 한국에서라면 박스오피스에서 수수표를 떼고 취소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재판매되는 것이 주를 이루겠지만 이곳에서는 티켓 리셀러가 하나의 직업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재패니즈가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표를 보내달라고 전화기에 말하는 리셀러의 담배 연기에 익숙해질 무렵 티켓이 도착했다. 리셀러가 나한테 언급한 어퍼 서클보다 좋은 자리에 위치한 스톨스의 자리였다. 너무 좋은 티켓을 가져와 손해를 봤다는 혼잣말이 이어졌찌만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속담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통하는 법이다.

무어씨가 예약한 자리는 스톨스의 2/3지점에 왼쪽 사이드로 시야 확보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고 나처럼 체격이 큰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선호하는 자리였다. 게다가 옆자리에는 소설에나 등장할 '100%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유럽인답지 않게 늘씬하고 예쁜 그녀 덕에 좌석을 여유롭게 쓴 것은 차제하고 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나를 향해 멋적게 웃어주는 웃음이 꽤나 시원스러웠다. 불어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이 또 다시 후회스러웠지만 한국에서 홀로 다닌 그 많은 공연에서는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행운에 내심 신바람이 났다.

오페라 글라스를 빌려달라는 속삭임이 귓볼에 닿을 때의 짜릿함과 왼팔을 통해 전해지는 포근함에 브레이크 타임에도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30초쯤 전방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리면 이내 눈이 마주치고 이방인들 끼리만 통하는 선량한 웃음이 우리 사이를 배회했는데 친구들 사이에 통하는 농담으로 치자면 '비포 선라이즈'를 찍을 절호의 찬스였다. 하지만 사람의 본바탕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이곳에서 매일 느끼게 되는 하나의 자각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보수적인 한국 남자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레미제라블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은 CD를 들어보는 일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일은 힘들더라도 시간을 내어 레미제라블을 정독해 보는 일이다. 어려서 읽은 장발장이 아니라 두껍고 읽기 힘든 위고의 원작 소설을 말하는 것이다. 위고가 술회한 혁명의 끝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아도 생략의 묘와 진지한 연출 관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이라이트 버전의 CD를 통해서 들었을 때 원작 소설에 비해 부족하다고 느껴지던 많은 빈 공간들이 뮤지컬에서는 매우 명확하게 묘사되는 것은 물론이고 중요성까지 부여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의 짜릿함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사실 나를 즐겁게 한 것은 나의 영원한 우상인 '에포닌'이었다. 소설에서부터 미친 듯이 빠져들었던 그 역할을 되새김하는 즐거움은 물론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넘버인 'On my own'를 현장에서 듣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흥분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Phantom of the opera를 뮤지컬의 수작으로 평가하지만 심장을 울리고 사랑이라는 난해한 테마에 사람들을 동조하게 만드는 힘은 레미제라블만 못하다.

무엇보다 이 뮤지컬의 압권은 'Drink with me'가 귓가에 스며들때 느껴지는 감정의 격랑이다. 티켓 가격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된 시점이, 두 번 세 번을 다시 반복해서 봐도 괜찮을 뮤지컬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이 바로 이때였기 때문이다. 마리우스의 Empty chairs, Empty tables 역시 하이라이트 버전에서 느낄 수 없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으며 자베르의 자살로 불리는 부분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개인적으로 평가하기에 내가 본 공연의 경우 성인 코제트를 연기한 배우를 제외하면 내가 가진 하이라이트 버전보다 더 나은 음색과 표현력을 보여준 공연이었고 장발장과, 자베르, 에포닌과 마리우스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는 기립 박수가 쏟아질 만큼 정말 빼어난 공연이었다. 누군가 뮤지컬에 대해 물을 때면, 혹은 스물 여섯을 지나간 가장 인상깊은 사건들을 회상할 때 반드시 생각날 그 어떤 것으로 말이다.    

2006/08/28 23:26 2006/08/28 23:26

맥베드 the show

Posted 2006/04/29 19:01,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예술의 전당에 갈 때면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오페라 하우스로 들어갈 일이 생길 때면 카메라를 챙기지 않거나 필름을 모두 써버리고 들어가게 된다. 텅 빈 낭하의 원주에 등을 기대고 중앙 궁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입체감을 좋아했을 누군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월극장에서 즐겼던 이런 짧은 감상도 프로그램을 펴자마자 깨지게 되었다. 이페머러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나로서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헐거운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헐거운 프로그램의 실망감은 극이 시작되고도 계속되었다. 사실 영화나 극본이 아닌 진짜 연극으로 본 맥베드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내가 본 <맥베드 the Show>는 직접적으로 비교할 대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배우들의 발성에도 문제가 있었고, 연극 배우 특유의 큰 액션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주연 배우의 액션도 답답했으며, 인물의 내적 갈등이 마음 속으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대사에 있어서 반복구는 지겨울 정도였으며 갈등은 반복구에 의해 심화되고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연출자가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맥베드의 갈등 구조를 왕권이라는 특수 권력 관계에 기인한 인물들 사이의 갈등으로만 포커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부 장면에서 맥베드라는 인물에 관해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무대상의 인물 배치에 있어서 이를 실현시킨 경우는 드물었다. 이를 무대 중앙과 무대 측면이라는 인물의 이동을 통해 인물의 비공식적인 면모를 표현하려는 연출로 봐야 할지도 모르나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너무 많은 장면에서 권력적 측면에서 대립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무대 사이드를 오래 차지 했다.

하지만 비극 <맥베드>에서 벗어나 한 편으로 show로서는 만족감이 높은 공연이었던 것 같다. 그로테스크한 무대 디자인과 군무에 가까운 단역 배우들의 액션은 뮤지컬의 한 장면 같았고 새로운 연출적 장치들도 많이 선보였다. 하지만 맥베드에게 미래를 예언하는 마녀들의 경우는 고전적인 연출을 사용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극단 내부의 적은 배우 숫자로는 마녀들을 모두 표현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으나 단순한 마이크 시스템에 의한 마녀들의 예언은 감흥이 없었다. 누가 뭐래도 맥베드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올곧은 장군을 탐욕스런 찬탈자로 만든 마녀들과의 조우가 아니던가?

끝으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사실은 <맥베드 the Show>가 필요 없는 노출을 조금 과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상식과 해석 능력으로는 의미 없는 노출이 연출가에게는 중요한 의미 지닌 것인지도 모르나 예술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태연한 척 보기에는 난 꽤나 속된 사람이고 집중력을 떨어트리기에 충분한 요인이었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 밖에 없다.
2006/04/29 19:01 2006/04/29 19:01

햄릿-셰익스피어난장

Posted 2005/10/15 10:00, Filed under: Review/Performance
평생 기억에 남을 사건은 의외로 흔하지 않다. 아니 흔하다면 평생 기억에 남을 사건 자체가 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기와 관람한 연희단거리패의 <햄릿>이 그랬다. 오후 늦게 쏟아지기 시작한 비와 을씨년스러운 바람 그리고 야외극이라는 낱말이 만들어 낸 환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꽤 긴 공연이었지만 얇은 셔츠사이로 스산하게 스며드는 바람도, 대중없이 흘러나와 신경을 거스르던 웃음도 공연 자체의 몰입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지기의 경우는 좀 힘들어 보였다. 팀플의 피로와 허리 통증이라는 요소가 그를 조금은 힙들게 만들었다- 쓸데 없이 글로브 극장의 역사라든지, 그 시대 연극 배우들에 대한 짧은 팜플렛을 기억하거나 되새기는 일 없이 극 자체에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셰익스피어 난장에 올려진 <햄릿>에 대한 비평은 충분할 만큼 많이 나왔다. 굳이 여기에 작은 덧붙임을 하자면 24일 공연에서 보여진 근친상간적 요소가 처음에는 매우 당혹스러웠다는 점이다. 오필리아와 레어티즈, 햄릿과 거트루트의 근친 요소는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규범적 종속적인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연출로 다가왔다. 공연이 끝난 후 이번에 도입된 근친적 요소가 다양한 모색을 위한 시도라는 설명이 없었더라면 경쾌한 마음으로 가을밤의 난장을 유쾌하게 마무리 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기실 내가 <햄릿>을 읽는 방법은 좀 삐딱하다. 어려서 본 Kenneth Branagh와 Kate Winslet 주연의 <햄릿>덕분인지 난 햄릿보다는 오필리어의 더 초점을 맞춘다.-아니 자세히 생각해보면 랭보의 탓도 있다. 난 그의 오필리어 연작을 좋아한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햄릿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오필리어가 등장한 연희단 거리패의 <햄릿>은 내 기호에 딱 맞은 공연이었던 셈이다.

무대를 중심으로 좌측에 앉은 우리는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기 이전의 오필리어가 보여주는 세세한 움직임까지 볼 수 있었기에 더욱 시선이 끌렸던 것 같다. 소탈하면서도 확신 있게 말하던 공연 이후의 모습을 보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본 공연에서는 연출가의 부재로 연출자와의 대화가 출연진과의 대화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는 더 좋은 느낌을 선사했을지라도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2005/10/15 10:00 2005/10/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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