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Review/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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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6 Atonement (2)
  2. 2005/12/11 Prime (4)
  3. 2005/10/01 찰리와 초콜릿공장
  4. 2005/02/09 Before Sunset#2 (2)
  5. 2005/01/19 하울의 움직이는 성 (2)
  6. 2005/01/06 Alexander (4)
  7. 2004/12/03 나비효과 (2)
  8. 2004/11/18 If Only (4)
  9. 2004/10/11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7)
  10. 2004/09/15 연인 (4)
  11. 2004/08/31 the Terminal (2)
  12. 2004/08/16 Everyone says I love you. (5)
  13. 2004/06/21 Love me if you dare! (2)
  14. 2004/06/11 영화 트로이와 일리아드3 (9)
  15. 2004/06/10 영화 트로이와 일리아드2 (10)
  16. 2004/06/09 영화 트로이와 일리아드1 (3)
  17. 2004/05/30 Before Sunset#1 (6)
  18. 2004/04/13 Jersey Girl! (11)
  19. 2003/10/02 Underworld- 원철군과 영화를 보다
  20. 2003/09/15 Dogville
  21. 2003/07/17 Gangs of New York
  22. 2003/07/17 Solaris

Atonement

Posted 2008/01/06 08:53, Filed under: Review/Movie

이안 매큐언은 백 년쯤 뒤에는 영국 문학의 거장으로 문학사에 기록될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근래의 그는 초기작에서 보여주었던 광기와 비정상에 대한 집요한 집중에서 벗어나 점차 인간적이고 폭이 넓은 시선을 소설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도리스 레싱에 이어 다음 노벨 문학상을 받을 가장 유력한 영국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기실 다른데 있다. 그의 소설 내포하고 있는 문제와 해결 방식이 지닌 의미에 무엇보다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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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렇게 시작했지만 이 글을 소설을 위한 글은 아니다. 아쉽게도 난 이 소설의 서두밖에 읽지 못했다. 현대 영국 문학의 수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은 학생들을 위한 해설집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데 나로서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속죄』라는 제목으로 나온 번역본을 집어들기에는 이 작가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대감이 너무 컸다. 결국, 이런 저런 변명 덕분에 소설보다 영화를 먼저 본 몇 개 되지 않은 작품이 되어버렸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스타트 포 텐』으로 얼굴을 알리지 시작한 제임스 어보이가 공연한 이 영화는 꽤 흥미롭다. 우선 금기에 가까운 덩케르크의 철수를 화면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지극히 세련된 표현 방식이 그렇다. 영화가 지닌 비극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은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주인공 브로니가 세실리아와 로비의 침실을 바라보면서 구겨진 시트를 유심히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무례할 정도로 상대를 무시하는 그들의 키스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마지막의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이미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 과장이 지닌 슬픔에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 과장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강한 염원이 표현되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 대목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소설의 전체적인 균형보다 감동과 속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편하는 솜씨를 부린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소설이 지닌 세부의 완전성 대신 절정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의 이완이 더 볼만하다. 다시 말해 13살 소녀였던 브로니가 이해할 수 있었던 이해의 한계와 소녀의 질투심, 감정이 거부되었을 때 소녀가 느끼는 감정의 극적인 변화. 아이가 아닌 한 사람의 존재로 인정받고 싶다는 어수룩한 생각이 낳은 태도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결국, 무지가 악마보다 무섭다라는 격언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그녀의 증언이 신빙성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는 계급을 뛰어넘는 도전에 대한 처벌을 완곡하게 처리한 대목은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본다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눈물 나는 속죄에 감동을 하게 될 것이다. 어설프게 무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본다면 서사구조의 복잡함(다시 말해 일목연하지 않다)이라는 문제점과 캐릭터의 묘사와 인과 관계를 중심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마음이든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영화가 꽤 잘된 아름다운 영화라는 사실이다. 인물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 풍광 속을 흐르는 감정과 음악,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낸 배우들. 뭐 이 정도면 두 시간이 시간 낭비는 아니지 않을까? 
2008/01/06 08:53 2008/01/06 08:53

Prime

Posted 2005/12/11 00:08, Filed under: Review/Movie
홀로 보는 영화를 즐기는 나에게 친구는 궁상맞아 보인다는 말을 던지고는 한다. 하지만 그녀의 표현과 다르게 항상 궁상맞은 것은 아니다. 궁상스런 순간은 티켓팅을 하는데 걸리는 30초 정도와 다시 불이 켜지고 홀로 극장을 빠져나오는 잠시뿐이다. 게다가 홀로 보는 영화에는 그만의 장점이 있다. 가령 마지막 한 시퀸스까지 마음에 든 영화에 동행이 기분을 상했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고, 의자에 허리를 깊숙히 묻고 음료수와 팝콘을 건내달라는 방해 없이 오롯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왜 이 영화를 보고 싶은지 상대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가끔은 홀로 보는 것이 안타까운 영화가 드문드문 스쳐간다. 옆자리 앉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을만큼 심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영화를 홀로 보는 것은 마음 상하는 일이다. 지난 금요일에 본 Prime이 그랬다.

코흘리개 꼬맹이 시절부터 우리의 우상이었던 우마 셔먼은 여전히 gorgeous했고 거기에 더해 사랑스러운 진짜 여자의 매력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감각적인 면에서 이 영화는 막 청년이 된 소년이 성숙한 여성에게 느끼는 매력에 관한 다양한 경험들을 여기 저기에 배치해 놓았다. 하지만 스테레오 타입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은 되려 이런 가벼움 덕분에 더욱 탄력을 받는다. 우마 셔먼은 아름다운 여인을 연기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자연스러운 매력을 지닌 여성을 표현하려 노력했고 결국은 기발한 소재에서 비롯된 갈등 양상을 무로 돌릴만큼 사랑스런 느낌을 잘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또 이런 배경을 전제로 한 영화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관객이 이들의 사랑에 관해 부정적인 판단을 할 여지 자체를 없애는 것인데 나처럼 보수적인 사람조차도 그들의 사랑에 이견을 제기하거나 비합리적인 선택이라 매도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스크린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반대쪽의 시선은 잘 모르겠다. 난 아직 하루도 여자로 살아보지 못했다-

사실 이 영화는 한국내 프로모션처럼 로맨틱 코메디 장르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커플들을 위한 겨울 영화도 아니다. 더욱이 트레일러처럼 소재의 기발함이 전부인 영화도 아니다. 올해 개봉된 영화가운데 가장 우아한 사운드 스코어를 자랑하지만 이마저도 이 영화를 설명하는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오직 ‘사랑’ 하나 뿐이다. 하지만 매우 경쾌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사랑’을 조명해 낸다. 게다가 이 영화가 지니는 사실감은 캐릭터의 성격에 기인한다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경혐해서 비롯된다. 배우들의 섬세한 몸짓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멈추는 곳에는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경험해 봤을 다양한 시선들이 녹아 있다.

그러나 정작 내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영화 속에 담긴 섬세한 묘사가 아니라 이들의 사랑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 다 큰 청년이 타인의 사랑 이야기에 부러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이질적이긴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몰입의 정도를 넘어서 곁에서 영화가 아닌 곁에서 지켜보는 실제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였던 듯 싶다. 아니 그 순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식탁 위에 앉아 고리타분한 표정을 짓는 감색 슈트의 남자처럼 보일 것 같아 숨이 막혀 왔다.

물론 이 영화의 이야기 흐름은 앞에서 언급한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매우 매끄러운 편은 아니다. 개연성이 부족한 장면 연결도 있고, 불필요한 시퀸스도 있다. 이야기 지루함을 방지하고 흥행을 위한 갈등 관계지만 100%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불필요한 플롯은 하나도 없으며 그래서 더욱 현실감이 있다. 사랑은 결코 논리정연하지 않다. 사랑은 결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아래 첫발을 내딛는 것도 아니고 차갑고 냉혹하게 뒤돌아서며 끝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Before Sunrise’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장면 하나하나가 머리 속에 살아 남게 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비평가들에게 수난을 당하고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도 이 영화를 보면 언제든 사랑하는 감정을 지니는 것 자체는 옳은 일이란 사실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이,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다. 사랑한다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2005/12/11 00:08 2005/12/11 00:08

찰리와 초콜릿공장

Posted 2005/10/01 09:00, Filed under: Review/Movie
사람들은 가끔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를 다시 읽고 싶어할 때가 있다. 그런 기분에 함몰되는 순간의 지인들은 곧 잘 읽을 만한 책 한 권을 권해달라고 청하곤 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면 어김없이 나왔던 답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읽어보라는 대답이었다. 사실 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한번 밖에 읽지 않았다. 그것도 1990년 오늘 같은 가을 오후에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초콜릿 공장의 비밀>은 달콤한 맛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향에 관한 소설이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공장에서 흘러나오던 초콜릿향에 대한 묘사와 한 이불을 공유하는 네 명의 노인, 반 기니가 가져다 준 행운이 나에게 남아 있는 전부다. 하지만 초콜릿 한개를 오롯이 먹어보고 싶은 욕구와 처음 맛본 그 달콤한 중독의 유혹을 이보다 더 잘 설명했던 묘사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 복권의 존재를 몰랐던 당시에 윌리 윙카의 초대장은 얼마나 커다란 행운이었던가?

하지만 윌리 웡카의 캐릭터는 당시 내 마음의 중심이 아니었다. 그의 시니컬한 성격과 과장된 징벌도 초콜릿의 향에 대한 묘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소설의 맨 마지막장에서 윙카의 시종일관 무뚝뚝하고, 냉혹한 행동과 성격에 일관성이 없어졌던 문장이 돌연 등장했던 것에 의아해 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그때서야 난 중절모를 쓴 나이든 영국 신사의 이미지에서 <무어의 마지막 한숨>의 주인공처럼 조로증에 걸려버린 늙은 청년을 잡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초콜릿으로 만든 강 앞에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막 십대에 접어든 소년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문이기 때문이다.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내가 읽었던, 혹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다른 느낌의 영화였다. 끊임없이 비가 내렸던 지난 여름의 어느날 읽었던 리뷰에 등장했던 중세적 괴담이란 묘사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속을 차지했다. 내가 읽었던 달콤한 유혹이 윌리 윙카라는 캐릭터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팀 버튼의 불우한 상상력 속에서 초콜릿의 특유의 향은 고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반 기니의 행운이, 가난한 소년의 마음과 초콜릿 공장이라는 환상적인 공간이 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초콜릿쟁이인 윌리뿐이다. 소설 전반부의 찰리에 대한 묘사는 착한 아이에 대한 고전적인 묘사만이 아니다. 윌리 윙카의 기행을 마무리 짓는 상대역이자, 잔혹한 중세적 징벌에 대한 괴담을 다소 가볍게 만드는 균형추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찰리다. 하지만 스타 시스템과 산업화된 영화 제작은 더 이상 캐릭터의 역할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영원한 청년인 조니 뎁과 악동 팀 버튼, 그리고 초콜릿 공장이라는 마케팅 이슈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상업성 속에 문장이 만들어 낸 가장 잔혹하면서도 달콤한 위대한 상상력 하나가 쇠잔해 버렸다.

읽혀지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는 사실성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발화와 침묵 사이에도 비슷한 관계가 성립한다. 문장은 이토록 끔찍한 징벌이 과장된 상상력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써 허구가 실제가 될 때 발생하는 충격을 최소화한다. 그러나 팀 버튼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10월에 개봉할 그의 새로운 영화인 ‘corpse bride’를 보려는 내 심리가 우습기는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는 초콜릿의 또 다른 맛인 쌉살함이 묻어난다.
2005/10/01 09:00 2005/10/01 09:00

Before Sunset#2

Posted 2005/02/09 00:56, Filed under: Review/Movie

프롤로그


나이듦을 애석해 하다
아침 나절부터 음식 장만을 돕고 있었다. 화양전을 만드는 동안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비디오 플레이어에 비포 선셋을 밀어 넣었다. 텔레비젼 화면을 주시하며 주변을 둘러 본다. 막내 누이뿐이다. 결국 비포 선셋을 누이와 보게 되는구나란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둔감함과 무지로 무장한 뭇녀석들과 같이 보는 것보다는 그래도 누이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우리는 같은 세대이며 비슷한 감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느 한 사람의 몰이해로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영화를 누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보았더라면 그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채 기분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르고, 타인의 감상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를 다시 인식할지도 모르겠다. 비포 선셋은 그런 영화다.

9년 동안 에단 호크도 늙었고, 누이 말처럼 줄피 델피의 몸매도 죽었으며, 나도, 누이도 모두 늙었다. 이제는 로맨틱한 사랑보다 현실적인 이야기에 공감 한다. 쉽게 말해 사랑에 몸이 달아오른 그 누구도 없다. 자연스럽고, 편한 분위기, 우리는 그들에게 완벽한 공감을 표하며, 그들에게서 지나온 과거의 내력을 읽어낸다. 살면서 혹은 사랑하면서 한번쯤 경험했던 대화와 표정들. 비포 선셋을 보는 동안 생각나는 것들이다.

아니 에단과 줄리를 보면서 내 삶에 쌓인 시간의 두께를 절감한다. 그녀를 만난다면 나 역시 에단과 같이 말하겠지. I am so sorry. 여전히 그대로인 마음을 담담한 듯 말하며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농담과 진담을 모호하게 섞어가며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들이 어떤 사정으로 만나지 못한 것처럼 과거와 같은 열의와 정열로 확신을 말하지 못하는 것 또한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림처럼
비포 센셋을 보다 보면 익숙한 장면에 놀라곤 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구도와 장면, 유심히 기억을 되집어 보게 된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장면이지만 현실에서 몸으로 직접 겪은 장면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림이구나. 파리의 풍경을 담은 수많은 그림들을 인덱스가 형성되며 영화 속 한 장면과 그림을 매치시킨다. 감독이 의도한 효과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머리속에 담긴 그림은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진다. 에단과 줄리의 쉴새 없는 대화만큼이나 배경은 많은 것들을 전달한다. 실사의 화면 속에서 대화를 나누던 주인공들은 이내 그림 속에서 움직인다. 보이는 것은 유화 물감의 덧칠이 입혀진 캔버스이고 들리는 것은 어쩌면 미래의 내가 그녀와 나눌지도 모를 대화다. 시간은 역전되고 정지한다.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은 없지만 그것이 현실이며 내 삶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현실적이어서 마음 아프고, 아름답지 않지만, 또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아름다우며 공감하는 영화. 비포 선셋이 그렇다.

사실 이번에도 감독은 결론을 말해주지 않는다. 제시는 비행기를 탔을 수도 있고, 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난 9년 동안 그들은 서로의 뒷모습을 수 없이 바라봤을지도 모르고, 다른 상대에게서 상대방을 발견했다고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그들의 염원일지도 모르며, 9년 전 하룻밤은 그저 하룻밤에 불과했다는 결정을 내릴지도 모른다.

제시가 말한 농담과 진담 가운데 어디까지를 믿어야 할지. 셀린느의 삶 속에 어디까지가 내숭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진 않다. 이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이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이 어떤 결론을 내리던 우리에게는 우리 삶의 결론이 있으며 우리가 살아온 방식으로 결론을 내리면 된다. 다만 다시 9년 후에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현실적이면서도 행복한 그들로 그려졌으면 좋겠다. 내 삶이 행복하기를 염원하듯이.
2005/02/09 00:56 2005/02/09 00:56

하울의 움직이는 성

Posted 2005/01/19 01:18, Filed under: Review/Movie
지난 연말 왕년의 [미래 소년 코난]의 멤버이자 [빨간 머리 앤]의 애청자였던 우리 형제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를 보러 극장을 향했다. 형제가 들뜬 마음으로 극장을 향한 것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2] 이후 보름만의 일이었다. 사실 우리 형제는 함께 놀러다니는 것을 즐긴다. 함께 영화를 보는 것도, 함께 책을 읽는 것도, 구석진 작은 방에 앉아 수다를 떠는 것도 모두 우리 형제가 즐기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어린 시절, 국경일 오후 무렵이면 방영되던 [미래 소년 코난]은 우리 형제의 애청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나이 차이가 제법나는 큰 누님은 맥가이버가 같은 외화물에 심취해 있었지만 나머지 누나들과 난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이 만화에 묘한 매력을 느꼈던 듯 싶다. 하지만 우리 형제의 주시청 프로그램은 정작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빨간머리 앤]. 늘 숨겼던 사실이지만 난 로보트 만화보다 [빨간 머리 앤]이 더 재미있었다. 어쩌면 [오 길버트!]라는 누님들의 외침 뒤에는 소리가 나지 않는 나의 [길버트!]가 늘상 따라다녔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 역시 앤을 따라 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고, 책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를 읽게 만든 것도 모두 앤 셜리의 덕분이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코난이 하야오가 그린 것은 맞는지. 빨간머리 앤을 그린 작가가 하야오와 어떤 관계였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재패메이션에 대한 숭배의 시기는 덧없이 짧은 것이었고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렬한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수많은 사람들이 재패메이션의 강력한 추종자가 되어 갈 수록 난 책과 문학에 빠져들었다.

사춘기 소년에게 누구나 관심을 갖는 것은, 다시 말해 유별날 것이 없는 기호란 없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샴푸와 스팅을 좋아하던 것도, 워크맨에 폴로네이즈를 꼽고 다니던 것도 알고보면 듀스와 서태지에 열광했던 또래와 달라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재패메이션도 그와 같았다. 모르지는 않지만, 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모른 척하는 편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편안했다. 혹평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 형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하울을 통해 난 붉은 돼지를 보았고, 멋쟁이 길버트를 발견했으며, 소피를 통해서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녀들의 흔적을 보았다. 음악은 듣기 좋았으며, 색감은 풍성했다.

그런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금껏 하야오가 보여주었던 작품들과는 다르다. 선과 색은 유사한데 인물에게 부여된 캐릭터와 이야기의 전개 양식이 다르다. 하야오의 펜을 빌린 다른 이의 작품이라고 해야할까? 지금껏 그가 보여준 이야기의 연장선상이라고 하기 보다는 되려 몇십년 전의 하야오를 보는 기분이다. 하야오가 그린 환타지는 사람 냄새가 나면서도 어딘지 이질적인 분위기가 풍기는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전과 다르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도 인간적인 느낌이 난다고 해야할까?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을지 모르겠지만 이 노대가는 앞으로 미적거리는 걸음을 옮기기 보다는 큰걸음으로 뒷걸음쳤다. 하지만 큰 뒷걸음이 멈춘 곳은 태초의 사랑과 건강함이 묻어나던 시작점이었으며 멋진 벚꽃과 소녀들의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던 꿈이 남겨진 공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지난 수십 년의 시간이 이 노인을 힙겹게 만든 뒤에야 그는 미적미적 나아간 걸음을 후회하며 뒤를 되돌아 봤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나는 뒷 이야기를 궁금해 하며 다음주를 기다리던 그 옛날 소년의 마음으로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이런 나의 기다림은 예측력과 이해력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모범생 컴플렉스의 발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던 간에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뛰어난 작가인 하야오의 작품이 아니라 탁월한 이야기꾼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구성진 말솜씨이다. 고민하는 대가보다는, 고민으로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예술품을 만드는 공장보다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꾼이 더 좋아진 것은 한 살을 더 먹은 나이 탓인지, 어려운 시절 탓인지 다소 구분이 어렵긴 해도 말이다.
2005/01/19 01:18 2005/01/19 01:18

Alexander

Posted 2005/01/06 00:05, Filed under: Review/Movie
플루타크의 알렉산더 전기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단락으로 시작된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 두 영웅에 대한 사료는 그 방대함을 자랑하는데 때로는 그 방대함이 영웅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난 방대한 사료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는 전투 상황과 일지에 연연하기 보다는 일화를 통해 영웅의 성격과 인물 됨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사실 플루타크의 변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에 대한 인식만큼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알렉산더를 젊고 방탕한 야만족의 정복왕으로 묘사한다. 혹자는 잘 교육 받은 우아한 전제군주로 묘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광기에 사로잡힌 독재자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며, 비운의 제왕으로 묘사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다시 말해 나처럼 무엇이 진짜 알렉산더의 모습이냐 하는 문제가 전혀 중요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모든 상이 단지 흥미로울 뿐이다.

올리버 스톤판 알렉산더
올리버 스톤판 알렉산더도 이런 관점으로 보면 꽤나 재미있다. 세 시간이란 시간이 한 다경으로 느껴질 만큼 영화는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대왕의 정신적 후계자로 인정 받는 톨레미의 나래이션으로 시작된 영화는 올리버 스톤이 조명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들어낸다.

제왕의 수많은 후계자들 가운데 왜 톨레미였냐고 묻지 말아달라. 파라오란 명칭으로 불리는 톨레미만으로도 올리버 스톤이 의도하는 바는 명쾌하다. 이제 관객은 초반부터 극명하게 들어 나는 감독의 의도를 따라 톨레미의 나레이션으로 이어지는 대왕의 여정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올리버 스톤치고는 정말 친절한 배려다.

사실 인지하기 어려운 배려이긴 하지만 올리버 스톤은 잇수스와 티루스, 이집트로 이어지는 알렉산더의 여정을 나래이션 처리함으로써 신의 아들 알렉산더가 아니라 인간 알렉산더를 다루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제우스 아몬의 아들이라는 신탁과 일련의 종교적 체험을 건너뜀으로써 그는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영역에 속한 알렉산더를 그려낸다. 이 두 가지 배려가 있기에 영화는 한층 쉬워진다. 신이 되려는 사내가 아니라 인간으로써 그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인간의 업적을 뛰어넘으려는 자부심 강한 사내의 영광과 좌절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가우가멜라, 페르세폴리스, 박트리아


문체는 변하지 않는다
사실 극장으로 걸어가는 나에게는 세가지 걱정이 있었다. 하나는 표가 모두 매진되었을 수도 있다는 불길함, 다른 하나는 가는 빗발이 언제 소나기로 변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맨 마지막 하나는 올리버 스톤이 만든 블록버스터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사실 지금껏 그가 만든 영화는 저예산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작자의 입김에 흔들릴 만큼 거대한 규모도 아니었다.

하지만 박력 있는 전투신을 끝으로 영화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문체로 쓰여진 희극으로 변했다. 사랑과 영광이라는 주제를 알렉산더와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을 통해 풀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한다면 이 시점에서부터 관객의 평가는 양분된다. 지루하다는 의견과 세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으로 의견이 나뉘는 시점이 바로 이때다.

사실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제국이라는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설정한 대립 축이 아닌 사랑과 영광을 대립 축으로 설정한 감독의 이야기 전개는 역시 탁월했다. 대립 축이 페르시아로 설정되었더라면 페르시아 원정 이전의 두 번의 캠페인과 소아시아에서의 전투, 근동에서의 전투, 이집트를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대립 축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군사적 재능이 탁월한 한 왕에 불과하다. 이런 대립 축에서 피 흘리고 좌절하는 영웅을 보여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이런 구도였을 경우 감독은 상상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따지기 좋아하는 평론가의 탈을 뒤집어 쓴 고증 애호가들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심력을 소모했을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와 메디아


록산느, 인디아, 세계 제국


알렉산더의 열정은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차분하게 마음 속에 스며든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쫓는다. 영웅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후세의 우리는 그 누구도 알렉산더의 열망을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실패가 필연적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필연적인 실패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은 인간의 특권이다.

사랑도 영광도 어느 것 하나 충분하게 얻지는 못했지만(물론 알렉산더가 생각하기에 말이다) 알렉산더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라는 씨앗을 우리에게 남겼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것처럼. 신이 아닌 인간이 30여년의 짧은 운명으로 선사한 것 치고는 원대한 희망이다.

사실 스톤의 시나리오는 매우 정확한 인용을 자랑한다. 대화의 대부분은 역사에 기록된 실제 알렉산더의 말이다. 극의 흐름에 따라 의외의 장소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극적 형식을 따르고 있음에도 지금껏 알려진 역사에 충실하다. 다만 신화의 과도한 인용만큼은 마음에 걸린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의 수는 제한이 있는 법인데 그는 알렉산더에서 다소 과도한 상징을 인용했다. 이 점 만큼은 그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화려한 볼거리가 없더라도 난 그의 알렉산더를 즐거운 마음으로 즐겼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숨이 막힐 듯한 박력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아이스킬로스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올리버 스톤판 알렉산더를 보러 간 것이기 때문이다
2005/01/06 00:05 2005/01/06 00:05

나비효과

Posted 2004/12/03 00:21, Filed under: Review/Movie

Intro


Butterfly Effect
Butterfly Effect라는 단어가 우리의 상식에 진입한 것은 90년대 중엽으로 기억된다. 나의 십대 중반에 해당되는 그 무렵에는 이미 엔트로피와 카오스는 과학에 관심이 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복잡계 이론은 과학을 넘어 다른 학문에까지 침투했다. 그리고 십년이 흐른 지금에는 영화의 제목으로 쓰이며 감독의 의도를 풀어내는 키워드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나비효과>의 제목이 다른 것이었더라면 영화는 상황을 설명해줄 몇 가지 부연 설정과 에피소드를 삽입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비효과>란 제목과 하나의 인용문으로 감독은 관객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며 러닝타임 단축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얻어 내고 있다. 게다가 왠지 쿨한 감각상의 느낌을 갖게 만든다. 약은 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약은 수 치고는 효과가 꽤나 괜찮은 것도 사실이다.

Retroactive
하지만 <나비효과>를 보면서 든 생각은 <레트로액티브>의 리뉴얼 버전이라는 생각뿐이다. 두 영화에는 7년이란 시간차가 있는 만큼 플롯과 설정은 조금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다. <나비효과>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삶을 엿보는 버릇의 영감이 되어버린 <레트로액티브>의 이란성 쌍둥이 동생쯤 되는 셈이다. 하지만 키 크고, 잘생기고, 어리숙하기까지한 애스톤 커쳐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레트로액티브>쪽이 더 재밌다.

<레트로액티브>의 핵심은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함부로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말라는 냉엄한 교훈이다. 때로는 상황이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운명은 상황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이라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늘 (혹은 거의) 똑같다. <<어차피 죽을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게 되어있고, 살 사람은 살게 되어있으니까 가던 길 가시오>> 수많은 반복 끝에 주인공 남녀가 깨닫는 교훈은 딱 이것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독특하다. 하나는 사막이라는 배경 설정을 통해 등장 인물의 행동과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는 연극적 효과를 도입했다는 사실이고, 늘씬한 금발의 심리학 전문가와 다분히 변태적인 사내의 미묘한 상황 전개를 통해 너절한 섹스 코드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납치일기>에서 강간의 가능성이 르포르타쥐를 이끌어 가는 한 축인 것처럼 레트로액티브에서도 흠잡을 때 없는 미인과 능구렁이 같은 변태 사내의 성교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화가 지루함을 방지하는 한 축이다)

상황을 넘어 삶에 도전하다
<나비효과>는 상황이 아닌 삶에 도전한다. 무대도 사막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 활짝 열린 계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작은 상황 변화만으로도 인생은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상황이 아닌 삶을 통째로 바꾼 만큼 스케일의 변화는 크지만 치밀함은 부족하다. 그리고 치밀함이 부족한 만큼 중간중간 인과율과 동기가 모호해지기 쉽다.(사실 나비효과는 극단적인 인과율과 동기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비효과>는 이번만큼은 진지해진 애스톤 커쳐와 예쁘지는 않지만 시선을 떼긴 어려운 에이미 스마트를 내세워 이런 빈틈을 메운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진다는 평은 사실 이런 시나리오상의 허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나비가 날아 올라 폭풍이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나비가 난다고 태도가 그리고 태도에서 비롯된 동기가 변한다는 절대적 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짧은 순간의 선택을 통해 삶과 태도가 변한다는 사실을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가 삶과 태도에 느끼는 지속성은 상당히 강하다.

박력 있는 시퀸스 전환에 깜짝 놀라던 하나양은 이내 점퍼로 눈을 가릴 준비를 한다. 궁시렁의 명수 WC군은 오늘따라 조용하고 까마듯한 제대를 기다리고 있는 정섭군은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난 오늘따라 좁게만 느껴지는 좌석을 탓하며 몸을 왼쪽으로 기대에 보았다. 실상은 좌석이 좁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저런 능력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갈까 하는 문제로 마음이 답답한 것이었다. 21살 봄과 23살 여름이 마음 속에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21살 봄을 선택했겠지만 지금의 난 23살 여름에 더 끌린다. 전부 花 탓이다.
2004/12/03 00:21 2004/12/03 00:21

If Only

Posted 2004/11/18 11:48, Filed under: Review/Movie
When I was 17
생각해 보면 17살 당시의 난 지겹도록 공부와 멀었다. 기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성적에는 무척이나 무덤덤했던 것 같다. 진짜 수능만 잘 보면 된다는 한탕주의가 심연에 자리잡고 있었고 스스로를 과신했던 것 같다. 아무튼 당시의 내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공부가 아닌 책과 음악 그리고 영화였다.

지금도 그다지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난 균형 감각이야 말로 삶의 통찰력이라는 말을 흘려 듣고 있었다. 하루에 책 한 권을 읽고 원고지 20장을 쓰며, 일주일에 영화 두 편을 본다는 평범한 원칙을 몸으로 실천했다. 그리고 그런 십대 후반 가장 기억 나는 영화는 <난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란 공포 영화였다. 사실 별 볼일 없는 이 영화가 기억에 남은 이유는 엔딩 크레딧을 기다리다가 심장이 멎은 것처럼 놀란 친구 녀석 때문이다.

아니 또 있다. 예쁘지는 않지만 호소력 있는 제니퍼 러브 휴잇에게 반했다고 해야 할까?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특히 가슴에 대한 노골적인 촌평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가 좋았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친구들 대부분 암묵적으로 그녀를 좋아했다. 필름이나 프리미어 같은 영화 잡지에 농담조로 실리는 가슴이 큰 배우를 캐스팅 할 때 1순위는 휴잇이라는 말장난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애니메이션 OST에서 클래식까지 헤비 메탈에서 얼터너티브 락까지 온갖 장르가 모여있던 교실 사물함에 제니퍼 러브 휴잇의 앨범은 항상 두 장쯤 있었던 같다. 그녀의 앨범을 발견하고는 '이런 것도 사냐'는 깔 봄에 '내 멋이다'라고 응수하는 장면은 꽤나 자주 목격할 수 있었던 풍경이다. 그런데 깔보는 쪽이나 응수하는 쪽이나 제니퍼의 뮤직 비디오가 흘러 나오는 순간에는 아무 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뮤직 비디오를 본 이후에는 상황이 반전되어 응수하는 쪽에게 그녀의 앨범을 빌리기 위해 자존심을 구겨야 했던 그 표정이 선하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시절 기분이 그랬다.

When I am 24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린 시절 좋아했던 배우들이 늙어감을 알게 된다. 주름하나 없던 젊은 얼굴에 나이가 내려 앉고 비키니가 잘 어울리던 그 뒷모습에서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젊고 예쁜 배우를 탐색하기 보다는 같이 늙어가는 그녀들을 만나러 극장에 간다. 놀랍도록 세세한 기억은 몇 년 전 어느 영화에서는 어땠는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구나 하는 짧은 감상을 내뱉는다.

사실 요즘은 이런 짧은 감상을 즐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작품성이나 시나리오의 탁월함에 동의하기 위해서 라기보다는 내 추억과 내 멋을 위해서 영화를 본다.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시퀸스에서 토토가 알프레도가 편집한 필름을 보며 감동 받는 것처럼 지금의 영화 보기가 그렇다. 요즘처럼 번잡하고 바쁜 세상에서 우울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를 보는 것은 고역이 된지 오래다.

If Only
2주 전 주말, 영화를 보기 위해 뭉친 동네 청년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항이 놓여 있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if only가 그것이었는데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손예진 볼 생각이 있냐? 난 솔직히 싫은데.' 이어지는 대답들은 '나 역시 싫다'는 대답이었다. 내가 싫었던 이유는 손예진이 싫어서 라기 보다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음에도 전혀 다른 맵시와 자태는 사람의 성격을 자극하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 첫사랑에 대한 모욕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래서 싫었다. 그리고 동네 청년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If only를 티켓팅했다.

사실 If Only를 보면서 느낀 생각은 영화에 대한 덧붙임이 아니었다. 남자 주인공의 죽음은 일찍부터 예상할 수 있었던 만큼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의식을 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내 과거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었다. 생각해 보면 난 여태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상대를 믿지 못했고 거절의 공포와 미지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거짓 용기를 꾸며 내었다.

아니 내 마음도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에게 확신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난 언제나 도망갈 퇴로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어느 건물에 들어가던 제일 먼저 안전하고 빠른 출입구를 확인하는 버릇처럼, 어느 술집에서나 화장실과 비상 계단을 확인하는 것처럼 난 사랑에서도 그랬다.

그러면서도 난 사랑에 빠져 있는 그 시간 동안 '오늘이 내 평생에 기록될 그 하루구나' 하고 끊임 없이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단 한번도 그 하루에 진심으로 만족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어서 하루에 만족할 생각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가벼운 영화를, 어린 시절 이유없이 좋아했던 그녀를 봤음에도 마음이 무거워 지는 것은 지난 세월이 적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동네 청년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 녀석은 담배를 피우러 갔고 다른 한 녀석은 화장실에 갔다. 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핸드폰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동네 청년의 무리에 살짝 끼어 들었다.
2004/11/18 11:48 2004/11/18 11:48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Posted 2004/10/11 14:50, Filed under: Review/Movie
개인적으로 난 대한극장을 좋아한다. 넓은 스크린이 주는 만족감도 만족감이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많은 추억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좁은 에스컬레이터와 스타벅스, 바람이 시원한 발코니에 얽힌 수많은 시간들은 분명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훼손되지 않은 순결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내 삶의 개인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대한극장에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보는 행동은 과거란 캔버스에 덧칠을 해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던 기억을 구겨버리는 행동이랄까?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마음 속이 개운해짐을 느꼈다.

사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이하 세상의 중심)>는 열다섯에 보았던 <러브레터>만큼의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사춘기의 가장자리에 접어든 나에게 <러브레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파문이 커져 가는 격랑과 같은 것이었는데 <세상의 중심>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아무런 감흥이 없다.

시종 일관 밋밋한 평면 구상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옆에서 하나가 작게 말한다. [인디영화 같았는데 해외 로케이션도 다녀왔네요] 정말 그랬다. <소품>의 섬세함은 좋았지만 <소품>을 <소품>답게 만드는 것은 보편적 공감이다. 우리처럼 쉽게 감동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마음을 열게 만드는 그 무엇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눈시울이 붉어진 나의 지기에게는 남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나 보다. 마음이 허전함으로 가득 채워진 나의 친구에게 남자 주인공의 토로는 [결코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내심]을 표출하는 기능적 편익을 제공했다. 한번쯤은 이 녀석도 저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나도 저렇게 비에 젖고, 다리가 풀린 몰골로 울먹이며 말하고 싶은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야기의 매력은 대리 만족에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야기의 매력은 간결하지만 많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편리성에 있다는 말도 떠오른다. 입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야기에 공감을 표하는 끄덕임 하나만으로도 전달되는 메시지의 최종 수신자의 장기부재가 안타깝긴 하지만 말이다. 사랑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수용하려 하는 어리석음이라던데… 우리는 끊임없이 어리석은 자가 되려 한다. 어제도 그랬고, 심지어는 영화를 보는 그 순간에도 그랬다.

그런데 <세상의 중심>에는 이상한 특징이 하나 있다. 영화의 완성도를 묻는다면 다양한 말이 나올 법한 영화인데 친구(male)가 보러 갈만한 영화라고 묻는다면 너의 십대 시절 로망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는 화답이 즉각적으로 튀어 나온다. 극중에서 그려내고 있는 여주인공 아키의 이미지는 청소년기 누구나 꿈꿔봤을 환상 그 자체다. 큰 키에 조각 같은 몸매, 길고 곧은 다리와 나를 위해 웃어주는 이름 모를 소녀의 이미지. 거기에 용기 없고 두서 없는 나를 위해서 먼저 내밀어주는 손.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는 플롯이지만 죽음에 담담한 것은 영화 전반부의 아름답고 환한 이미지에 압도당해 죽음을 지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도 파리한 안색 위에 젊고 건강했던 시간이 겹치는 것은 우리네의 잔인한 심성 때문인지 의도된 효과인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주인공의 마음 속이 공허했던 이유에 대한 심정적 동의 하나뿐이다.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시간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해서 죽음이 장난처럼 느껴지는 것. 그래서 죽음이 끝마무리가 덜 된 것 같은 느낌. 여전히 존재하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래서 더욱 외롭고 공허한 빈곤의 악순환 단지 그것뿐이다.
2004/10/11 14:50 2004/10/11 14:50

연인

Posted 2004/09/15 00:03, Filed under: Review/Movie
실험 혹은 변절
[문학은 동시대의 역사와 사회상을 반영한다] 정확하게 위치해 있는 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리고 장예모의 [연인]을 보면서 다시 한번 되씹어 보게 된 문장이다. 사실 나에게는 장이모라는 발음보다는 장예모라는 음독이 더 익숙하다. 어린 시절 공리를 세계적인 스타로 데뷔시킨 붉은 수수밭도 봤고, 국두도 보았다. 조금 커서는 집으로 가는 길도 보았고, 영웅도 보았으며, 어제는 연인까지 보았다.

하지만 정작 흥미로운 것은 중국 사회가 변화한 만큼이나 달라진 그의 작품 세계에 있다. 천안문 사태 이전의 매우 중국적인 정서와 문화를 담고 있던 초기작부터, 천안문 사태 이후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미적거리는 작품까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작은 것에 몰두했던 시기와 기예를 다루는 공장에서 산업 시스템의 축이 된 현재의 모습까지 지난 20년 동안 장예모는 정말 다양한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변화한 감독의 주관을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서구의 명장들이 단지 장예모 같은 상황을 겪지 못했기에 고고한 것이라고, 장예모의 변신은 이안을 통해서 이미 예고 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연인을 본 주변의 평가는 다양하다. [우리도 웃길 줄 알아요 하고 장이모가 대놓고 광고하고 있다]는 평가부터 시나리오가 엉망이다. [볼 거라고는 색감과 음악 밖에 없다]는 의견까지 정말 다채로움을 자랑한다. 하지만 기예를 다루는 공장에서 슬슬 벗어니기 시작한 자신의 역량을 헐리우드식 산업시스템에서 시험해 봤다는 평가가 제일 마음에 와 닿는다. 장예모 같은 거장 반열에 드는 사람이 몰라서 코메디를 만들었겠는가? 누구보다 정열적인 비극을 만들어낸 감독이 겨우 이 정도 수준에 만족하겠는가? 어쩌면 거대한 메이킹 시스템을 통해 감독은 한번쯤 탐구해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과연 이런 시스템을 통해서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이런 작품을 만든다는데 5백원 걸 용의가 있다)

장쯔이의 매력
사실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쯔이의 이미지는 촌스럽고 어딘지 헛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집으로 가는 길]의 장쯔이다. 샤요 메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막내 누이같았던 장쯔이의 초기작이 떠오른 것은 비단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와호장룡이 스크린을 점령하던 그 시기에도 난 장쯔이를 대단한 배우라고, 혹은 매력있는 배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십이야를 보면서 장백지의 매력에 빠져있던 터라 장쯔이의 어딘지 중성적이고 앙칼진 모습이 싫었던 탓도 있다. [모름지기 미인이란 호소력 있는 표정이 있어야 하는데 장쯔이는 그것이 없어. 그래서 영화가 허무해] 하고 힐난하던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브로셔의 소개가 아니더라고 장쯔이가 [연인]에서 선보인 춤은 정말 압권이었다. 어린 시절 수많은 고전을 읽으면서 상상해 보았던 그 시대의 안무가 구체적인 형태를 띄었기 때문이다.(사실 지금 사용하는 당송시대의 안무는 왠지 대장정 시대에나 추었을 법한 안무라서 어딘지 신뢰가 안갔다) 그리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저 춤이 나를 위해 공연되고 있다는 상상이 조금 들긴했다. 기계 체조나 발레를 보면서 사내들이 한번쯤 해봤을 생각, 스포츠와 예술이란 이유로 경건한 자세로 관람하긴 하지만 내심에 지닌 몇분쯤의 딴 생각. 약간이지만 달아오른 사내의 옆얼굴이 보였다. 겉보기에는 심드렁한 관찰자의 표정이긴 하지만 속마음은 당신과 같다구. 그러니 놀란 토끼같은 표정짓지 말란 말이야 하고 조용히 독백해본다.

여전히 아름다운 금성무
9월 첫째주 신사동에서 논현동으로 걸어가며 지선, 하나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금성무에게 전에는 안보이던 쌍꺼풀이 생겼노라고. 어딘지 느끼해 보인다던 녀석들의 말. 그리고 피곤하면 나타나는 내 쌍꺼풀때문에 쌍꺼풀이 무슨 죄냐고 항변했던 대화가 생각났다.(평소에는 외꺼풀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사내가 생각해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남자들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꿈꾸는 코와 입술, 턱이 화면을 가득 매웠다. 남자는 얼굴보다 실력으로 말하는 법이라고 배워온 나이지만 솔직히 부러웠다. 개개의 이목 구비는 무척이나 굵고 강인한데 저것이 저렇게 모이면 저렇게 부드럽단 말이지. 거울을 보면 난 시라노 벨게제락이 생각나는데. 코만큼은 그보다 잘생겼으니 사랑받을 자격은 충분하다고 날마다 2분쯤 생각하는 난 뭘까?

시놉시스에 대한 불만과 색감에 대한 찬탄
연인의 스포일러들을 읽고 있노라면 장쯔이의 질긴 생명과 금성무와 유덕화의 싸움이 한편의 코메디를 보는 것 같았다는 내용과 접하게 된다. 솔직하게 어이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장쯔이가 비도 한번에 죽었다면 와호장룡의 리무바이의 죽음만큼이나 허무하다는 소리를 했을 것 같다. 게다가 남겨진 둘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할 개연성도 떨어지고, 심판인 장쯔이가 죽은 마당에 결론이 분명하게 날 것 같지도 않다. 비록 억지스럽지만 장쯔이가 불굴의 투혼을 발휘해 난 금성무가 더 좋아하고 몸으로 표현하는 쪽이 코메디라는 비웃음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영화 전체의 결말로서는 나은 것이 아닐까?

사실 요즘 영화의 고질병은 끝맺음이 흐지부지 하다는 사실이다. 설정과 발단은 괜찮은데 결말가지 끌고가는 힘이 부족하다. 그리고 이런 부족함을 채우는 것은 화려한 볼거리와 음악이다. 연인도 이런 범주에서 예외는 아닌지 영화 후반부의 빈곤함을 장예모 특유의 색감과 음악으로 채운다. 하지만 장예모의 색은 언제 봐도 멋지다는 생각을 한다. 무채색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아니 나에게) 그의 영화는 산과 들을 찾지 않아도, 도심의 극장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색채의 현란함을 전해준다. 시놉시스가 엉망이어도, 장예모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매스 프로덕트임에도 연인을 본 2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이런 까닭이 아닐까?
2004/09/15 00:03 2004/09/15 00:03

the Terminal

Posted 2004/08/31 23:01, Filed under: Review/Movie
친구가 아닌 주변인들로부터 내가 제일 자주 듣는 소리는 아직 어리다는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법인데, 되려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의 상대적 범위가 좁아진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경험의 범위가 좁은 만큼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도 많아진다. 때로는 [건전한 상식]을 가졌다고 믿어왔던 내가 외계인으로 오인 받는 사태가 심심치 않게 벌어지기도 한다.

사실 Terminal의 오프닝과 함께 내 머리를 맴돌기 시작한 것은 [또 다시 외계인이 되어버렸구나]란 생각이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보다는 조금 더 정상적이지만 여전히 Abnormal인 톰 행크스와 개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캐서린 제타 존스의 캐릭터, 억지스럽기 짝이 없는 에피소드들. 스필버그란 이름 아래 이해를 강요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코엔 형제가 만들었다면 조금 더 엽기적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인간미는 남아있는 봐줄만한 영화가 되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알란 파커를 싫어하지만 억지스러운 에피소드를 강조하려면 차라리 화려한 음악과 군무가 담긴 뮤지컬 영화가 나을 거란 생각도 했다. 사실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시간 내내 머리를 줄곧 맴돌았던 생각은 꽤나 불쾌한 영화라는 확신 하나뿐이었다.

전공이 전공인만큼 난 관객 세그멘테이션과 타켓팅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비록 스필버그가 의도한 세그멘테이션과 타켓팅에 내가 해당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 아쉬울 것은 없다. 하지만 [터미널]은 바보스러울 정도의 착함을 통해서 스필버그가 의도한 세그멘테이션과 타켓팅에서 벗어난 나를 Abnormal한 사람으로 몰고 간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짜 인생이란 저런 질박한 순순함이라고, 어리숙하지만 어느 비범한 사람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내품는 톰 행크스야말로 우리 안의 숨겨진(혹은 우리가 꺼내야 하는) 인간상이라고 스필버그는 영화 전편을 통해서 집요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난 이런 방식의 스필버그가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인 [태양의 제국]를 만든 스필버그는 지금껏 관객에게 이해를 강요했던 적이 없다. 단지 자신의 생각을 조용하게 읊조렸을 뿐, 그의 영화에는 늘 자신의 이해말고도 관객이 스스로의 생각을 풀어놓을 한적한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개종을 하던지, 아니면 인간미 없는 냉혈한으로 전락하던지 두 방법 밖에 없다. 두가지 모두 싫은 나로서는 꽤나 불쾌한 기분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땅콩캔 속에 담긴 명인들의 서명이 무슨 이유에서 째즈인지 잘 모르겠다. 재즈는 뉴욕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명인들은 서방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러시아 하우스]를 보면서 유쾌했던 이유는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흥겨운 재즈연주 때문이었다. 신문 속 사진 한장을 재즈의 전부로 알고 헌신하는 한 남자와 그 남자를 위해 뉴욕에 가고 싶어하는 또 다른 남자를 인정하고 빠져들기에는 심리적 저지선이 너무 강하다. 게다가 거기에 감동하는 한 여자까지 이해하려니 머리속은 복잡하고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참. 그런데 이해못할 사실이 하나 더 있다. Life is waiting이란 문구와 터미널이란 제목. 2시간이란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이렇게 헤매는 것을 보면 내가 진짜 외계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2004/08/31 23:01 2004/08/31 23:01

Everyone says I love you.

Posted 2004/08/16 16:30, Filed under: Review/Movie
사람에게는 [해마다] 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해마다 옛 애인에게 안부를 묻는 자상함 반, 집요함 반이 섞인 이상한 버릇을 가진 사람도 있고, 해마다 똑 같은 곳을 여행하는 사람도, 해마다 같은 선물을 같은 사람에게 선사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이런 버릇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해마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영화를 본다.

에밀리 브론테의 웨더링 하이츠,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게팅 메일리의 아르마다, 레이 황의 1587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완독을 목표로 하지만 해마다 2/3지점에서 무너지고 마는 율리시즈와 유리알 유희,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꼭 보게 되는 우디 앨런의 Everyone say I Love you…

우디 앨런 그리고 영화 따라 하기
한참 영화에 매료되던 시기에는, 평범한 소비자가 아닌 비평가가 되고 싶던 시기의 나에게 우디 앨런이란 이름은 괴짜란 말의 동의어였다. 뉴욕 시리즈에서 마이티 아프로티테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에서 보여준 우디 앨런만의 비틀림과 위트는 그것을 소비하는 나까지 지적이고 위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곤 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또래와 다르다는 만족감에 흐뭇했던 것 같다. (물론 실제의 내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먼 훗날이었다)

말러의 4번 교향곡을 좋아하게 된 것도, 틴토레토의 유화를 좋아하게 된 것도, 베니스에서의 사랑을 꿈꾸게 만든 것도 전부 이 영화 탓이다. 겉은 허름하지만 속은 화려하게 꾸며진 안락한 다락방에서 타이프 라이터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 생각한 것도, 이성의 어깨 선과 쇄골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전부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이다.

유쾌한 소극
Everyone says l Love you(이하 에브리원)은 뮤지컬 영화다. 노튼과 줄리아 로버츠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영화는, 가수 뺨치는 골디 혼의 노래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영화는 에브리원이 유일하다. 게다가 최근 십년 동안 제작된 영화 가운데 에브리원만큼 능숙한 솜씨로 발랄하게 빚어낸 뮤지컬 영화는 전무하다.

생각보다 무겁고, 진지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행복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름다운 음악과 재기발랄 때문이라 말하는 친구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하자면 에브리원이 재미있는 이유는 단 한 순간도 중심을 잃지 않는 위트 때문이라 한다. 똑 같은 장면을 보고 있음에도 볼 때마다 다른 위트를 발견하는 것은 위트는 해석자에 따라 깊이가 달라보이는 신기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에브리원은 영화보다 에드워드 노튼이 드류 베리모어에게 한 청혼 시퀸스로 더 유명한 영화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디저트에 반지를 넣어 청혼하는 방법은 이 영화가 나온 96년 이후 영원한 고전(혹은 교범)이 되었으며, 각종 시트콤에서 단골로 우려먹는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단지 꽤나 괜찮은 청혼법으로 에브리원을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이상한 가족, 이상한 사람들, 그래도 모두 사랑을 말한다.
에브리원에 나오는 가족은 어딘지 비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고 결혼까지 한 남자, 자신보다 더 아내를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아내를 포기한 남자, 남편의 친구와 부부가 되고, 전 남편을 친구로 거느린 여자. 그리고 이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하나의 대가족,

부자연스럽고 부담스러워야 정상일 텐데 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설정 만으로도 영화 감이다) 이들은 되려 밉살 맞을 정도로 행복하고 서로를 사랑한다. 어쩌면 사랑이란 단어에 격식과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진짜 사랑을 왜곡시키는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도 지켜야 할 룰이 있으며 격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야말로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언제쯤에야 사랑은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강도나 지속성, 합리성 따위는 무시해도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04/08/16 16:30 2004/08/16 16:30

Love me if you dare!

Posted 2004/06/21 14:45, Filed under: Review/Movie
Intro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내기를 한다. 아주 사소한 내기부터, 도박성이 농후한 내기까지, 가끔은 자신의 삶 전체를 판돈으로 걸은 내기를 하기도 하고, 가장 소중한 마음을 내기의 제물로 희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내기는 짜릿하고,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맛이 있다. 사람들이 내기의 마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 아닐까? [Love me If you dare]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장치는 바로 이런 [내기]이다. 그리고 이런 [내기]를 통해 부풀었다 줄어 들었다를 반복하는 것이 이들의 [사랑]이다.

French Movie
최근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 확연하게 느낀 것은 과거의 영화와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프랑스 영화가 철학적이고 지루하기로 명성이 높았다면 요즘의 프랑스 영화는 경쾌하고 유연하다. 감독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필요도, 배우들의 조금 과장된 행동이 의미하는 암시를 찾기 위해 고생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나서는 길에 한 [10분쯤 나도 저럴까?]하고 생각해주는 것이 전부이다. 귀찮다면 생략해도 무방한…

If you dare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말로 해석하기 어려운 문구가 있다. 머리로는 이해 가능한데 우리말로 표현하기는 매우 성가신 문구가 바로 이런 문구이다. 어쩌면 우리말에서도 이런 문구를 자주 쓰지 않으니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우리말에서 자주 쓰이는 문구라 해도 내가 자주 쓰지 않으니 익숙하지가 않다.

아무튼 영화의 전반부는 [if you dare]라는 한 마디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들이 벌이는 내기는 나의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엽기 수준이지만, 과거 80년대 프랑스 영화를 특징짓던 [과장]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다. 되려 엽기 수준의 내기를 통해 우리는 어렴풋이 이들이 겪게 될 다사다난한 삶을 예견할 수 있다. 내기란 운동에너지 손실이 없는(되려 왕복 운동을 반복할 때마다 그 운동에너지가 커지는) 상황에서의 진자의 왕복 운동과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Love me if you dare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이런 것이다]하고 어렴풋이 깨달을 나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은 어려운 숙제다. 가끔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이 어딘지 어색해 보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이 위대해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인 벌이는 사랑은 내기란 겉옷을 입은 밀고 당기기다. 물론 그 방법이 때로는 치졸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깬다]수준이긴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사랑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비록 [내기] 때문에 엇박자를 밟고 있더라도 말이다.

Confession& Conclusion
고백이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고백은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형성된 균형을 한 순간에 고백 받은 사람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간다. 고백은 비난 받기 보다는 보호 받아야 마땅할 것이지만 현실에서 고백이란 [백기 항복]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속 두 주인공들의 내기가 장난을 넘어서 서로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의 이면에는 고백을 [진짜 고백]으로 믿지 못하는 상황이 숨어있다. [너를 사랑해]란 한마디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아니다.

이 영화에는 [He loves me]같은 반전은 없다. 하지만 결론은 정말 쇼킹하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랑마저도 [내기]의 비틀림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하지만 나쁜 결론은 아니다. 되려 [real life]라는 제약을 넘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결론이다. 어떤 결론이 나올까 하고 한참이나 고민 중인 관객의 사고를 정지시켜 버리는 side effect를 포함하긴 하지만...

Love if you dare는 평론가들에게 환영 받기 어려운 영화다. 딴지 걸기 좋아하는 관객들의 환영을 받기는 더더욱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이야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적절한 영화다. 기법과 장치. 메시지 같은 귀찮은 물음에서 벗어나 보면 꽤나 매력적인 이야기이기에…
2004/06/21 14:45 2004/06/21 14:45

영화 트로이와 일리아드3

Posted 2004/06/11 10:30, Filed under: Review/Movie
7. 아킬레스의 죽음에 대한 2가지 이야기.
아킬레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2가지 신화가 전해진다. 파리스의 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맞아 죽는 결말은 똑같지만 하나는 전사하는 것이고, 하나는 암살이다. 우선 첫번째 관해서 이야기 하자면 헥토르의 죽음 이후 트로이에는 아마조네스의 지원군과 이디오피아 멤논왕의 지원군이 도착하게 되는데 아마조네스 여왕은 전투에 참여한지 하루 만에 아킬레스의 손에 전사한다.(어떤 설화에는 이 아마조네스 여왕과 아킬레스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디오피아의 멤논왕은 아킬레스와 사투를 벌이다가 격살 당하며 승세를 몰아 아킬레스는 트로이의 흉벽에 쇄도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아폴론의 인도를 받은 파리스의 화살에 갑옷으로 보호할 수 없는 발 뒤꿈치를 맞아 전사한다는 것이 요지이다.(아킬레스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한 전투에서 아이아스와 오딧세우스가 활약했다는 이야기도 이어지지만 너무 길어서 생략)

두 번째 이야기는 헥토르와 파트로클레스의 장례 이후 트로이와 그리스 양군 사이에는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는데 이 틈에 아킬레스가 프리아모스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이다. 아킬레스가 프리아모스의 사위가 되고 파리스가 헬레네를 포기하는 선에서 휴전 회담이 진행 중이었는데 파리스는 신전 회랑에서 데이트 중인 비무장 상태의 아킬레스를 화살로 암살한다.

아킬레스의 죽음 이후 그리스에서 도착한 네오프톨레무스의 활약과 렘노스섬에서 귀환한 필록테테스의 독화살. 그리고 오딧세우스의 목마 계책으로 트로이는 함락되며 네오프톨레무스는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프리아모스의 딸을 아버지의 무덤에 받친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첫번째 이야기보다 두번째 결말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수많은 학자들이 신화의 정설로 채택하고 있는 이야기는 첫번째 결말이다. 아마도 아킬레스같은 영웅이 전쟁터가 아닌 신전 회랑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쉽게 동의하기 힘든 모양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마이너리티를 지지한 사람도 적지 않다.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비극 시리즈에서 두번째 설을 지지했다.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죽는 것보다는 데이트 중에 허망한 죽을 맞이하는 것이 더 영웅다운 것이 아닐까? 허망한 죽음이야말로 영웅들의 영광을 더욱 안타깝게 만드는 그런 요소가 아닐까 싶은데...

8. 아이아네스의 탈출
영화 트로이에서 파리스는 아이아네스란 젊은이에게 트로이 왕가를 상징하는 보검을 맡긴다. 신화에서 아이아네스는 앙키세스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며, 트로이 함락 당시 살아남은 유일한 무사로 알려져 있다. 카르타고의 시돈 여왕과의 로맨스나 이탈리아에 이르러 로마의 모태가 된 알바롱가를 세운 것으로 신화에는 기록되어 있다. 극중 아이아네스의 등장과 트로이의 보검이 그의 손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통해 시나리오 에디터는 트로이라는 도시는 망했지만 민족은 로마로 다시 거듭났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딘지 유치한 구석이 있는 설정이다.

Omission & Targeting
토로이를 보면서 느낀 사소한 감상은 시나리오 에디터의 마음 고생이 정말 심했을 거라는 사실이다. 사실 헐리우드의 시나리오 에디터쯤 되는 사람이 트로이 전쟁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분명 원전과 전래되는 수많은 그리스 비극, 다양한 학자들이 내놓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석본이 책상 한 가득 쌓여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은 진리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 상아탑이 아니라 수익성을 추구하는 기업 시스템이다. 영화사라는 기업이 [트로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기업은 [트로이]를 볼 특정 소비 계층을 targeting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나리오 에디터에게 부여된 임무는 적절한 Omission과 Dramatization를 사용하여 targeting된 소비 계층의 기호에 가장 적절한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것이었으리라.

사실 [트로이]는 따지기 좋아하는 소수의 관객층에게 환영 받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트로이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만 물경 세 자리를 넘어가며 트로이 전쟁이라는 소재를 토대로 파생되는 이야기의 가짓수도 두 자리를 넘어간다. 수많은 이설를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하다 보면 수십 권의 책을 써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십에 육박하는 브래드 피트의 근육은 이십대 청년처럼 잘빠졌으며, 늘 결정적인 순간에 채이는 역할만 맞던 만연 조연 에리 바나의 스타일도 괜찮았다. 모범생같았던 올란드 블롬의 겁먹은 표정도 봐줄 만 했고, 나름대로 인물 사이의 갈등 구조와 인과 관계도 분명했다.

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온갖 압박감 속에서 이 정도의 시나리오라도 만들어 낸 에디터에게 소소한 박수 정도는 쳐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 이상을 만들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논외로 쳐야겠지만..
2004/06/11 10:30 2004/06/11 10:30

영화 트로이와 일리아드2

Posted 2004/06/10 09:46, Filed under: Review/Movie
4, 메넬라오스와 헬레네, 그리고 파리스
영화에서 파리스와 결투를 벌이다 엉겁결에 헥토르 손에 죽은 메넬라오스는 실제로는 전쟁의 최대 수혜자 가운데 하나이다. 잃어버린 아내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형인 아가멤논처럼 귀국 후 암살당한 것도 아니고, 오딧세우스처럼 10년이랑 방랑 끝에 고향에 되돌아 온 것도 아니다. 폭풍을 만나 이집트에 도착한 메넬라우스는 이집트와의 무역으로 더욱 풍족해진 전리품을 가지고 스파르타에 돌아와 행복을 만끽한다.

그렇다면 전쟁의 원인으로 알려진 헬레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에서는 파리스와 함께 불타는 트로이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묘사되지만 헬레네는 메넬라우스 손에 돌아온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헬레네를 가진 남자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 파리스의 전사 이후 헬레네는 두 명의 트로이인 남편을 더 거느렸으며 이들은 모두 전투 중에 전사했다. 결국 남편 잡아 먹는 여자로 찍힌 헬레네는 더 이상의 남편을 거느리는 영광을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신화에 기록된 헬레네의 남편은 4명이다. 얼굴값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닌 것이다.(그리스 신화에서는 최고 기록이다.)

한편 영화에서는 헬레네가 트로이의 헬레네가 된 것으로 나오지만 일리아드에서의 헬레네는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고도의 기예를 보여준다. 트로이성에 침투한 오딧세우스와 디오데메스를 도와주며 오딧세우스가 팔라디온의 방패(영화에서는 검으로 표현된다. 트로이를 지키는 보물로 알려져 있다)를 그리스 군으로 훔쳐가는 과정에 지대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결국 트로이 함락 이후 헬레네는 오딧세우스의 증언 아래 다시 스파르타의 헬레네가 된다.

한편 영화 속에서 탈출에 성공하는 파리스와 달리 신화 속의 파리스는 필록테스의 독화살에 맞아 숨을 거둔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죽음의 고통 속에 파리스가 찾은 사람은 헬레네가 아니라 옛 애인인 오이오네라는 사실이다. 파리스의 치료 요구를 거절한 오이오네는 곧 후회하며 파리스를 찾지만 이미 숨을 거둔 다음이다. 오이오네는 파리스의 시신을 화장하는 장작단에 몸을 던짐으로서 그리스 비극에 소재 하나를 더해준다.

한편 특이할만한 사실은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와의 결투 이후(파리스의 비겁함으로 결투가 어이없게 끝났지만) 헬레네와 파리스의 관계가 삐끗 거렸다는 사실이다. 이 결투 이후 노골적인 헬레네의 외줄 타기 행각이 벌어지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5. 영화 속의 아작스와 두 아이아스
영화 속에서 거대한 워 해머를 휘두르는 무사는 아작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성벽에서의 전투 중에 헥토르의 손에 전사한다. 하지만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아이아스(즉 아작스)는 두명이다. 이들은 작은 아이아스와 큰 아이아스로 불렸는데 이들은 모두 전장이 아닌 조금 어이없는 곳에서 어이없이 삶을 마감한다. 먼저 아킬레스와 쌍벽을 이루는 무용를 소유하고 있던 군인 중의 군인 아이아스는 아킬레스의 사후 벌어진 장례 경기에서 오딧세우스에게 아킬레스의 갑주를 얻는 영광을 가로 채이고 만다. 자존심 강한 아이아스는 결국 자살로 삶을 끝맺는다.

한편 작은 아이아스는 아킬레스만큼 빠른 걸음과 몸놀림으로 유명했으며 트로이의 목마에 올라타 일리아드를 함락시키는 영광을 얻게 된다. 하지만 성이 함락된 다음 프라이모스의 딸을 신전에서 겁간하게 되는데 이것이 여신의 분노를 사 벼락을 맞고 수장된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그리스 연합군이 귀로에서 만난 거대한 폭풍은 이 아이아스가 여신의 신상이 있는 곳에서 벌인 이 희대의 강간 사건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6.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레스, 그리고 브리세이스
브리세이스는 일리아드에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의 불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는 여인이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브리세이스가 아가멤논에게 빼앗기게 되는 경위는 조금 다르다. 그리스 군의 해안도시 습격 전투에서 최고의 미인인 크뤼세이스는 아가멤논에게 주어지고, 그보다 조금 못한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스에게 주어지게 된다.

그런데 크뤼세이스는 아버지를 잘 둔 덕에(아폴로의 신관이다. 딸은 잃은 신관이 그리스군에게 저주를 내린 것을 신에게 청탁했다.) 아가멤논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되고, 째째한 아가멤논은 앞장서서 크뤼세이스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 아킬레스에게 대신 브리세이스를 줄 것으로 요구한다. 결국 아가멤놈에 버금갈 째째함과 소심함으로 무장한 아킬레스는 [나 전쟁 안 해]를 연발하며 전선을 이탈한다.

아킬레스의 이탈로 그리스군이 위기를 맞는 가운데 파트로클레스는 아킬레스의 갑주로 무장을 하고 전투에 나가 선단을 불 태울 정도로 접근한 트로이군을 무찌른다. 이 과정에서 제우스의 아들인 사르페돈을 전사시키고 트로이 성벽에 까지 이른다. 하지만 그에게 허락된 영광은 방벽에서의 전투까지였고 영화처럼 헥토르의 손에 전사한다.

하지만 파트로클레스와 아킬레스의 사이는 영화처럼 사촌 형제 사이가 아니었다. 파트로클레스는 아킬레스의 친구이자 시동이었고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랑은 동성애 관계로 보인다.(그리스 시대에 동성애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일리아드 전체를 토대로 볼 때 아킬레스는 양성애자가 확실하다. 아킬레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위나 후에 목마에 올라타 혁혁한 공훈을 세우는 아킬레스의 아들(네오프톨레무스)의 존재로 볼 때 요것은 거의 확실하다) 아무튼 아킬레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전선에 복귀해 트로이군을 학살하는 부분에는 애인을 잃은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상한 광기의 분출로 보인다.

다음 포스트에 계속
2004/06/10 09:46 2004/06/10 09:46

영화 트로이와 일리아드1

Posted 2004/06/09 15:01, Filed under: Review/Movie
트로이를 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원전과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릭 바나가 멋지다는 이야기다. 후자야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니까 그냥 가볍게 넘어가 주고 도대체 트로이가 원전과 얼마나 다르다는 것인지 살펴보자.

트로이의 크레딧에는 분명히 원작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표시하고 있다. 일단 우리가 트로이로 알고 있는 도시의 그리스식 표기법이 일리아드임을 밝혀 둔다. 왜 호메로스가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사이의 전쟁를 노래한 서사시에 난데 없이 일리아드란 제목을 붙였는지 궁금해 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리아드는 10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전쟁가운데 딱 49일 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흔히 상상하는 것들과 다르게 일리아드에는 헬레네가 파리스를 따라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일리아드는 아폴론을 섬기는 신관의 딸을 전리품 삼은 그리스신에 대한 신의 징벌로 원정군에 역병이 도는 장면으로 시작되어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으로 대단원을 마무리 짓는다.

다시 말해 영화 트로이에 나오는 그리스군의 상륙전이나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는 원전으로 불리는 일리아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나 트로이의 목마는 일리아드에서는 그 냄새도 피우지 않는다. 조금 더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우리가 원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호머의 일리아드가 아니라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리아드라고 착각했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토대로 볼 때 영화 트로이는 얼마나 다른 것일까?

1.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의 관계
영화 트로이에서는 아킬레스가 아가멤논에게 봉사하는 무사로 묘사 되지만 아킬레스의 아버지 펠레우스는 프티아의 왕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리사는 프티아의 수도이며 오늘날의 그리스 북부 지방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아가멤논의 근거지였던 미케네와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 게다가 지리상으로는 라리사와 트로이가 더 가깝다. 라리사의 왕자인 아킬레스가 떠돌이 용병처럼 아가멤논에게 불려다녔다는 설정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의 극중 대립각을 강조하기 위한 시나리오 에디터의 각색으로 보인다.

2. 아가멤논과 네스토르
메넬라오스가 아가멤논에게 트로이를 태워버리자는 제안을 한 다음, 아가멤논이 전략을 논의하는 부관으로 나온 사람이 네스토르다. 물론 한글 번역에는 단 한번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극중 대사 속에서는 네스토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리스 연합군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연장자였으며 게렌의 기사(아직까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밝혀지지 않았다) 혹은 고귀한 네스토르로 불렸던 이 무사의 고향은 필로스 섬으로 알려져 있다. 한 나라의 군주인 네스토르가 아가멤논의 궁정에서 참모로 일하고 있다는 설정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트로이의 주요 등장 인물 가운데 가장 신중하고 사려깊은 인물로 알려진 네스토르는 서구 문화권에서는 상당히 인기 좋은 인물이다.

3. 오딧세우스와 아킬레스, 그리고 참전의 계기
영화에서는 오딧세우스가 외딴 폐허에서 검술 연습중인 아킬레스에게 참전을 종용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신화에서는 라리사의 궁전에 있던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레스는 전쟁에 종군하지 않기 위해 여사제들만 있던 외딴 신전으로 도피한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아킬레스가 트로이 전쟁에 종군하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에 따라 바다의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가 참전을 금지했기 때문. 그런데 영화에서는 되려 테티스가 이왕 죽는 인생 멋지게 살다 죽으라고 아킬레스를 종용하는 것으로 나온다.

한편 영화에서 참전을 정치적인 이유라고 말하는 오딧세우스 역시 신화에서는 종군을 피하기 위해 그다운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나온다. 페넬로페와의 신혼 재미에 빠져있던 전쟁에 빠지려고 미친 연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들인 텔레마코스 때문에 진짜 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게 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참전하게 된다. 하지만 일단 종군하기로 결심한 오딧세우스는 당대 최고의 쌈꾼인 아킬레스를 동참시켜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오딧세우스가 20년만에 귀향하는 것은 다 이런 좀스런 성격 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일 것이라고 생각함)

아무튼 아킬레스를 참전시키기 위해 상인으로 변장해 여사제들이 득실거리는 신전을 방문한 오딧세우스는 멋진 검을 상품으로 내놓음으로써 아킬레스의 실체를 밝혀낸다. 실체가 밝혀진 아킬레스는 결국 참전을 약속하게 되고 이로써 그리스 연합군의 진용이 갖추어지게 된다.
다음 포스트에 계속!
2004/06/09 15:01 2004/06/09 15:01

Before Sunset#1

Posted 2004/05/30 09:52, Filed under: Review/Movie
애플의 트레일러 사이트에 들렸다가 비포 선셋이란 제목의 트레일러를 발견했다. 혹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편은 아닐까? 십대 초반의 난 빈에만 가면 누구나 줄리 델피같은 미인과 낭만적인 데이트를 나눌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십대 후반의 누이들은 반대 였다고 한다. 빈에만 가면 누구나 에단 호크같은 남자와 낭만적인 데이트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빈에 가보기는 커녕 한국에서의 낭만적인 데이트도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 이십대 중반이 되어 버렸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기차역에서 한 약속에 대해서는 항상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친구들의 상당수는 둘이 만났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했고(물론 영화에 그런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내 누이들은 둘이 결국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전망을 했다. 아주 가끔 케이블 텔레비젼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방영하고 있을 즈음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분위기에 취했던 것 같다. 빈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멋진 소재와 아담한 길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는 그들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남녀가 첫눈에 반하는 그런 사랑에 대한 욕구를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게 한 영화가 바로 비포 선라이즈가 아니었을까?


결론적으로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편이 맞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의 빈이 아니라 프랑스의 파리가 배경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비포 선라이즈의 두 주인공이 약속한 1년 후의 만남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9년 후의 만남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와 내 친구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역시 여자들이란 매우 뛰어난 직감을 가진 존재라니까…) 십대 소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던 에단 호크는 멋진 아저씨가 되었고 화이트에서 소녀와 여자의 미묘한 경계를 보여주었던 줄리 델피는 드문 드문 주름이 눈에 띄는 진짜 여자가 되어 버렸다.

사실 시놉시스는 따로 읽어 보지 않았다. 보기로 마음 먹은 영화의 리뷰를 읽는다던지 시놉시스를 보는 행동은 자칫 재미난 영화를 재미없게 만들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개봉은 7월 2일. 이 때에는 누군가에게 애걸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늑대같은 사내 녀석들 대신에 우아한 처자와 함께 영화를 보리라. 다른 영화는 몰라도 비포 선셋까지 로맨틱 코메디를 좋아하는 나의 지기들과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 까지 같이 보게 되면 정말 우리는 무능한 이십대가 되어 버릴테니까..
2004/05/30 09:52 2004/05/30 09:52

Jersey Girl!

Posted 2004/04/13 11:04, Filed under: Review/Movie
Stealing Beauty…그 후로 9년
일상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이를 먹었음을 감지하는 순간이 있다. 너영민, 사기꾼과 Jersey Girl를 보기 위해 극장에 앉아 있던 순간이 그랬다. 우리가 알게 된지 어느 사이 일곱해가 지났다. 어떻게 보면 일곱해란 시간은 매우 긴 시간임이 틀림없다. 고2 여름 야자를 튀고 보았던 아마겟돈의 주인공들이 다시 연인으로 나온 영화를 보고 있음에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브 타일러에게 처음 매혹된 시기는 16살 때로 기억된다. Empire Record도 보았고, 그녀를 위한 영화로 알려진 Stealing Beauty도 보았다. That thing you do와 Silence Fall도 보았으며 악의 꽃도 보았다. 얼마 전 지방시 향수 광고의 모델로 캐스팅된 리브 타일러를 보면서 내가 받은 느낌이 그녀가 나와 같은 세대라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놀라게 된다. 내가 나이를 먹은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멈춰 있던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벤 애플렉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굿월헌팅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97년 봄의 일이란다. 17살에는 굿월헌팅에 언급된 oral sex가 우리 사이에서 던져지던 가장 심한 sexual issue였는데 이제는 그런 것으로는 놀라지도 않는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리고 이제는 넓게 벌어진 리브 타일러의 어깨를 보면서 되려 편안함을 느낀다.


Comfortable
Jersey Girl은 편안한 영화다. 갈등 구조가 복잡하지도 않고, 음악이 번잡하지도 않으며 고민 또한 길지 않다. 물론 주인공 커티가 태어나고 올리가 뉴저지의 시골 청소부가 되기까지의 런닝 타임이 조금 길긴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다.(런닝 타임의 1/3이다) 게다가 음악 또한 듣기 편하다. 영화를 압도하는 OST Number는 없지만 시종 일관 적절한 빠르기와 멜로디로 집중을 돕는다. 강력한 클라이맥스는 없지만 클라이맥스가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나 할말이 없어진다. 가족에 관하여, 과연 내가 저 상황에서 내 삶을 포기할 수 있을까? 죽은 아내를 몇 년이나 추억할 수 있을까? 자식이 내 삶에 주어진 기회를 포기할 정도로 중요한 것일까?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상황을 미루어 짐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나에게 닥쳐 온다면 어떻게 할까? 순진하진 않지만 냉혹하지도 않은 우리에게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뛰어넘는 난제다…

Thinkin
한참 뒤에 사기꾼이 한마디를 한다. ‘저지걸 재밌었어. 그런데 미국 영화는 상당히 가족 중심적이란 말이야.’ 우리와 가족 개념이 많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고 궁색한 변명을 해본다. 우리의 가족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me’와 같은 개념이라서 그런다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욕망의 범위는 넓어져 가고, 포기할 수 없다 생각되는 것들이 많아진다. 예전에는 기꺼이 손에서 놓을 수 있다 믿었던 많은 것들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붙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쩌면 나 역시 가진 것이 많은 자에 속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포기할 줄 모르는 나에게 대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러면서도 더 많이 욕망하고 더 많이 가지고 싶어한다.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한다. 물론 이미지를 고려해야 할 장소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뒷모습은 허망한 것이라 말한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일 테지 하고 생각하는 내가 무섭다. 너무 경쟁에 물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한다. 그리고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편이 남는 장사란 평범한 진리가 삶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But...
재밌는 영화, 편안한 영화지만, 사고의 음습함은 주어진 상황을 전혀 새롭게 해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한 이야기보다는 행복한 꿈이 좋다. 프렌즈에서 로스가 청혼하는 느낌이 좋다고 할 때 강한 긍정의 고개 짓을 하는 것처럼. 암울한 나지만 경쟁에 물들대로 물든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이야기가 좋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이제는 나의 것이 되었으면 하고 욕망한다.
2004/04/13 11:04 2004/04/13 11:04

Underworld- 원철군과 영화를 보다

Posted 2003/10/02 13:44, Filed under: Review/Movie
월요일 오후. 드디어 영화보다
원철군과 나의 독특한 취향가운데 하나는 다크블루에 대한 열광이다.(난 울트라 마린도 좋아한다. 인디고 블루가 확산되기 한세기 전 파란색을 지배한 이 염료는 금보다 비쌌다고 한다.) 바다색보다는 보라색에 가깝고, 그러면서도 약간 진한 색채에 고딕풍의 뾰족한 이미지와 신선한 진홍색이 덧붙여진 것을 보는 순간 바로 열광 모드에 돌입했다.

영화를 보면서 원철군인지 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정군이 딱 좋아할 영화라는 이야기가 오고갔다. 벽장에서 손이 튀어나오지도 않고, 예상 외의 타이밍이나 음악으로 공포감을 주는 영화가 아닌 액션물인데다가 톤 역시 딱 시정이 좋아할 타입이란 생각이 잠시 들긴했다. 하지만 SWAT과 언더월드 중에 하나만 봐야할 상황이라면 스왓을 선택할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콜린 파렐이 나오는 게다가 휠씬 시원한 액션이니까. 사실 이유같은 것은 모른다. 막연한 느낌에 이유같은 것을 요구하는 놈은 정말 멍청한 녀석이 틀림없으니 말이다.(두 영화를 모두 볼 예정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에게 무언가 하나를 고르라면 스왓을 골랐을 거 같다. 이것이 그 막연한 느낌의 이유다)

아무튼 나한테 염색한 검정 머리와 진짜 검정머리를 구분해낼 수 있는 안목이 있음을 깨달았다. 키는 조금 작지만 볼륨감있는 몸매에 원철군 눈을 떼지 못했다는 말도 첨언해야겠다. 몸에 짝 달라붙는 가죽 슈트를 통해 보이는 곡선과 납빛 피부에 열광하던 단순한 사내 녀석 둘이 극장에서 보여준 우리의 진짜 모습이었다.(영화 내내 스토리는 뒷전이었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톤에 알맞는 섹스 어필에 홀딱 반해버렸다.)

영화를 보고나서야 주인공의 이름을 알았다. 케이트 버킨세일이었다, 브로큰다운 팰리스이나 다른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어딘지 허전한 아름다움이 이런 영화에서는 빛을 발할 수도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같았다. 아무튼 한동안 그 슈트 속에 숨겨진 곡선이 젊디 젊은 두 사내를 지배할 것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노파심이 아니니라.
2003/10/02 13:44 2003/10/02 13:44

Dogville

Posted 2003/09/15 17:05, Filed under: Review/Movie
도그빌을 보기위해서는 꽤나 오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영화 자체를 보는 것은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도그빌을 보는 과정에서 따라올 마음의 움직임을 통제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7월의 마지막주 화요일. 그 날의 약속을 기억이나 할까? 약속과 말, 구속에서 자유로운 사람를 한량이라 부른다던데 아직 나로서는 먼 경지다. 겨우 동네 건달 수준의 나로서는….

(문)정훈군과 헤어진 뒤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을 즐겼다. 본래는 노팅힐을 다시 한번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내의 DVD대여점을 들렸는데 전직 파락호 출신인 듯한 주인의 불량스러움에 흥미가 사라져 버렸다. 결국 나는 우산을 벗삼아 장단을 맞추며 집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순간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다. 도그빌의 포스터와 어느 한쪽이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약속은 그것이 문서에 의해 증명할 수 없는 신사 협정의 경우에는 효력이 없다는 구절이었다.

도그빌은 그것을 대여한 순간부터 나에게 고민을 안겨다주었다. 왜 테이프가 두개인 것이지. 차라리 dvd로 빌리는 것이 휠씬 싸지 않았을까? 근래의 허접한 집중력으로는 테이프 두개를 한번에 보지 못할지도 몰라. 극장에서 봤어야 하는데. 안개 속 풍경처럼 지겹다면 ff를 사용할지 모르겠는걸 그럼 스스로가 궁상스럽지 않을까? 한심한 지적 능력이 부끄럽지 않을까?

라스트 폰 트리에의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그리고 도그마 아젠다의 선언 이후 이를 준수한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이번만큼은 분명한 실망감이 든다. 선 블론드의 아름다운 니콜 키드만에 취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충족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아름다운 여배우에게 받쳐진 재물도 아니면서 어째서 이 대가는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폰 트리에의 영화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번 시도에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를 즐기지 않던 사람이라면 알듯 모르듯 다가서는 새로운 장치와 주제에 흥미가 느껴질만도 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폰 트리에를 좋하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현대극의 삭막함보다는 극적 결말에 열광하는 반모더니즘주의자에게 이 영화는 낯선 껍질을 뒤집어 쓴 몬스터처럼 느껴지리라.

연극에는 연극의 장점이 있고 영화에는 영화의 장점이 있다. 순혈주의자에게 양자 사이의 경계를 잃고 방황하는 몬스터는 결코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다. 연극이라면 아니 희곡이었더라면 재밌고 의미심장하게 즐겼으리라. 하지만 그가 강요하는 파격 속에서 그의 테크니션에 열광하고 싶지는 않다.

감독은 이야기꾼이다. 이야기꾼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과 매체의 정체성을 이용해 가장 효율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한다. 그리고 그가 전달하려는 이야기가 다른 방법으로 전달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면 분연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예술이란 이름으로 관객의 특권을 배앗을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는 이야기를 가장 적합하고 좋은 방법으로 듣고 볼 권리가 있다. 비록 선 블론드의 니콜 키드만이 전례없이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말이다.
2003/09/15 17:05 2003/09/15 17:05

Gangs of New York

Posted 2003/07/17 19:30, Filed under: Review/Movie
아무래도 난 기자가 체질인가 보다. 펜을 떼자마자 처음 생각나는 문장이 내가 왜 이런 글을 쓰려했는가를 밝히는 일종의 편집자주였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쓰려던 처음 생각에서 벗어나 격식을 갖춘 첫머리를 상상하는 것또한 기자로서 버릴 수 없는 직업병이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신문이건만 지난 2년 동안의 삶이 내게 미친 영향력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갱스 오브 뉴욕으로 돌어가 보자.

기억조차 희미해져버린 영화지만 택시 드라이버나 카지노에서 보여주었던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와 비교해 보자면 허전함을 감출 수 없다. 폭력의 시작과 뉴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겠다던 감독의 의도는 다분히 작위적이다.

감독이 가진 인식의 한계는 인간과 작은 조직이상의 것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천재는 드물고 자신을 천재로 착각하는 수재들만 세상에 넘친다는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말이 아닐는지.

예술은 성숙한 자의식과 통찰력을 매개체 속에 투사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그는 성숙한 자의식이나 통찰력가운데 어느 것도 필름 속에 투사시키지 못했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의지는 넘쳐나지만 무엇을 이해시키고자 하는지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설명뿐이다. 평범한 교육을 받은 훈련된 지성을 지니지 못한 예술가의 초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영화에서 마틴 스콜세지가 이해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역사에 무지한 평균적인 미국인들뿐이다. 남북전쟁 중에 뉴욕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사람들에게 영화의 첫머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연도표기는 기억 속에 함몰되어 버린 지식을 되찾는 수고를 위한 작은 배려일 뿐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주목받는 군인들의 행렬은 무엇인가? 거리의 폭력에서 국가에 대한 폭력으로 영역를 확장한 의 폭력을 보여주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결국 무의미한 고찰일 뿐이다.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거나 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고찰은 이미 사유로서의 본질을 잊어버린 잡념일 뿐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 적절하지 못한 스크립트 에디터에 의해 짜여진 각본이 잠시 노감독을 속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은 자신의 끝을 알고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한다는 격언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남북 전쟁 무렵의 뉴욕을 그림으로써 미국이 지닌 폭력성을 보여주겠다는 시도는 너무 미국인적인 발상일 뿐이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지식인들에게 미국의 폭력성이 가장 극명하게 들어난 사건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고립주의 노선과 멕시코 전쟁이다. 비록 폭력이 인간이 지닌 원초적 본능이기는 해도 폭력은 공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탐욕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공포에서 시작되는 폭력보다는 탐욕에서 시작되는 폭력이 훨씬 오랜 역사와 유규한 전통을 지녔다는 사실을 다른 영화에서 투사시켰던 노감독의 생각이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뉴욕의 깡패들의 핵심적인 요소는 폭력의 이중성이다. 가장 잔혹한 폭력마저도 국가에 의한 폭력보다 더 잔혹할 순 없다. 게다가 잔혹한 폭력마저도 그보다 강한 폭력앞에서는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하찮은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폭력은 가장 나쁜 의미의 악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인내심을 상실한 사람들. 폭력에 굴복한 사람들, 폭력을 추종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폭력의 쳇바퀴에서 자신이 자존감을 상실한 채 하루를 연명할뿐이다.

사람들은 피와 죽음이 넘쳐나는 한세기 반 전의 뉴욕에 진저리를 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잔혹한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보다 선의를 가진 바보에 의해 희생된 인류가 더 많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폭력이란 스펙트럼만으로 사람과 사회를 분석하다 보면 수많은 오류와 마주치게 된다.

가장 잔혹한 폭력마저도 단지 잔혹함의 노예가 된 이후에는 폭력 특유의 위험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계해야할 폭력이야 말로 잔혹함을 제거한 무미건조한 하얀 폭력이라는 것은 노감독을 과연 알기나 할까? 하얀 폭력에 의해 부셔지고 상처입은 사람들의 숫자가 잔혹한 폭력에 희생된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나 있을까? 계속된 물음으로 지치는 하루다.

잔혹함으로 물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둔 평범한 군인들에 의해 잔혹하게 죽는 장면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사람은 자기 의식 속에 숨겨진 매뉴얼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가장 새로워 보이는 영상에서 시선조차 끌지못하는 작은 시퀀스 하나까지 갱스 오브 뉴욕의 모든 신은 이미 과거 우리가 익히 봐왔던 해석의 카피 버전일뿐이다.
2003/07/17 19:30 2003/07/17 19:30

Solaris

Posted 2003/07/17 15:35, Filed under: Review/Movie
기억이란 어떤 것이며 추억이란 무엇일까?

솔라리스의 원작자는 하나의 SF소설을 만들어 내었다. 인간의 기억을 토대로 하나의 추억을 재생시키는 행성에 대한 아이디어는 매우 독창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작자는 이런 좋은 아이디어를 토대로 하나의 소설을 쓰긴 했지만 그 속에 본연적인 질문을 담아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왜냐면 소설을 읽는 동안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아릿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소재라 하더라도 그것을 변주하는 솜씨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솔라리스는 바로 하나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토대로 한 다양한 변주곡과 같다.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더없이 슬픈 영화가 되기도 하고, 더 없이 공포스러운 영화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혼란스러운 영화가 되기도 한다.

이쯤에서 왜 이 영화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그만두어야 겠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느낀 생각은 상당히 고통스럽다는 것이었다. 기억을 망각의 강에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훗날 깊은 비탄에 잠겨 그 강에 빠진 기억과 추억들은 건져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런 고통에 대해 쉽게 수긍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다시를 나를 찾아온다면 깊은 행복감과 함께 그보다 더 큰 저주는 없으리라. 왜냐하면 추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만 추억이란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시간의 지평선에 다시 한번 떠오르게 되면 그것은 새로운 의미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2003/07/17 15:35 2003/07/1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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