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2 : 3 : 4 : 5 : ... 6 : Next »

수상한 라트비아인

Posted 2011/10/31 15:25, Filed under: Review/Book
 아직은 웃음도 마음도 지금보다 더 앳되던 청년 시절에는 하얀 종이를 보는 순간 문장이 쏟아 나오곤 했다. 그 시기에는 산책하는 동안 흘러가는 생각을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주던 서평이 완성되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내 삶의 다른 일들처럼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변명을 하자면 꺼리는 많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나를 찾는 전화벨 소리 사이로 진지한 생각이 빠져 나가서 그런 것이라 자조도 해보고, 옛날 달라진 빠르고 즉흥적인 세상 때문이라 투정도 부려본다. 하지만, 얄팍한 변명 사이로 선명하게 보이는 진짜 이유를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이유란 간단하다. 이제는 글을 쓰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고백하고 나니 이제야 서툰 문장으로 나마 서평을 쓸 용기가 생긴다. 이제 진짜 다시 시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소설이다. 추리 소설 경력을 이어 나가는 동안 ‘심농의 매그레 반장’이란 언급과 조우할 기회는 있었지만 내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영국식 추리 소설의 전통이랄 수 있는 어수룩한 경찰에 대한 불신 혹은 조롱에 나 역시 깊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셜록 홈즈나 미스 마플, 포와르가 경찰 반장이라면 얼마나 어색할 것인가? 항상 허둥거리고 잘못된 단서만 추적하는 경찰이 없다면 유머는 어디에서 찾으란 말인가?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범죄 소설에 필요한 휴머니티는 단연 멍청한 경찰이다. 게다가 뛰어난 지성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대신 귀찮은 일도 도 맡아야하고, 비웃음의 대상으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는 이런 영국식 추리 소설의 전통과 배치 된다. 주인공인 매그레는 용감한 거인이면서, 지적이며, 무엇보다 감수성이 풍부하다. 게다가 그는 아편도 피워야 하고, 클럽에도 가야하는 바쁜 파트타임 탐정들과 다르게 사건의 일선을 떠나지 않는다. 메그레는 수사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인물이자, 다양한 정보 수단을 통제하는 인물이며, 사건의 단서들을 충실하게 독자에게 보고하는 인물이다. 매그레 시리즈에는  파트 타임 탐정들이 자신들의 천재성으로 줍게 되는 완전 범죄를 꿈꾸는 범인들이 놓친 단서 대신에 매그레와 함께 수사를 진행해 가는 동안 획득한 작은 단서들이 그려내는 큰 그림이 있다. 영국식 추리 소설에 비하면 트릭이 떨어지긴 해도 말이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매그레 반장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첫 작품이지만 꽤 충격적인 소설이고 아름다운 문체를 지닌 작품이다. 플롯 자체는 매우 간결하다. 열 페이지도 넘기기전에 독자는 사건의 얼개를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매그레 반장과 함께 뒤쫓는 사건은 일반 추리 소설과 궤를 달리한다. 실제로 파리의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보통이고, 탐정과 조력자의 안전이 보장되는 다른 소설과 다르게 반장이 아끼는 부하는 무참하게 살해 당하며 매그레 본인은 거리에서 총격을 받는다. 심농의 간결한 문체는 비스케이만의 차가운 바닷물과 빗물. 안개와 더러운 하인숙, 독한 술냄새를 자유자재로 그려내며 독자를 몽환의 세계를 이끈다.

 어쩌면 일반적인 좋은 추리 소설의 기준에서『수상한 라트비아인』은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추리 소설의 본분인 추리라는 얼개가 뛰어난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물들이 지니는 개성과 심리 묘사, 분위기 만큼은 탁월하다. 때로는 사건 그 자체보다 등장 인물이 지닌 삶의 비극적인 요소가 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슬픈 결말을 향해 처연하게 걸어가는 인물들의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기에는 강인하면서도 예민한 매그레 반장은 좋은 친구다. 매그레와 함께 걷는 길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있기에 위안이 된다고 할까?
2011/10/31 15:25 2011/10/31 15:25

알링턴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Posted 2010/06/09 01:19, Filed under: Review/Book

소설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의문을 표하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난 책이란 매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작가와의 대화를 즐긴다는 요지의 대답을 하곤 한다. 얼치기 독심술사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 순간 순간마다 이어 지지만 작가가 창조해낸 미지의 세계로 걸어들어가 작가의 생각을 훔쳐보는 일은 즐겁다. 거기에 독자라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서는 창작의 고뇌 혹은 재창조의 어려움에 대한 배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독자란 작가가 창조해낸 무기물인 이야기에 상상력을 결부시켜 진짜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때로는 비정할 정도로 냉혹해져도, 사소한 일에 흥분해도, 엉뚱한 이해로 작가를 오도해도 좋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소한 일에 흥분하기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는 역제 떄문에 소설이 지닌 매력이 반감된 경우에 속한다. 원제 the Arlington Park가 지닌 소설적 배경의 단순 명쾌함과 유사성은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라는 사족 덕분에 반감되고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아이러니가 담긴 제목 덕분에 소설 집중을 어렵게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실존이 되지만 '여자들의 완벽한 하루'는 '전설의 레젠드' 따위에 불과한 넝마에 불과할 뿐이다. 열흘 동안 이어지는 비처럼 우울한 현실에는 그만한 진지함이 필요하다. 도시의 어느 거리로도 치환될 수 있는 평범함과 그 평범한 속에 담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참으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답답한 그 현실을 '어느 완벽한 하루' 따위로 말장난으로 오도하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냉혹해지기

깊은 고민 없이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소설들의 특징은 참신함은 있지만, 신념이나 철학의 부재가 눈에 띈다는 점이다. 레이첼 커크스의 이 소설도 이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2/3지점까지 등장하는 각 인물들의 삶은 독자에게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하여, 여성으로서의 삶으로 규정되는 현실의 답답함에 대하여 분개하고 진지한 고민을 요구로 한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은 그저 그런 공간에 아무런 희망도 의지도 없이 놓여 있다. 레이첼 커크스에게 이들이 동정의 대상인지, 아니면 진지한 성찰의 대상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녀의 캐릭터들에 대한 작가 스스로 애정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겠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갇혀 천천히 삶의 무게에 질식해 버릴 때까지 하렴 없이 내일에 몸을 맡길 그녀들에게 목간 인형처럼 뻣뻣한 결말 대신에 약간의 다정한 배려를 베풀어 주었다면 이 작품은 조금 더 희망적인 작품이 되었을 테고 소설로서의 완성도 또한 높아졌을 것이다.

때로는 비극보다 희극이 삶을 더 잘 변주해 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웃음기조차 지워버린 채 또 다시 지옥보다 더 괴로운 현실에 울어야 할 독자들에게 그 누구보다도

P.S. Mrs. Dalloway를 추모하며, 버지니아 울프 흉내는 아무나 내는 것이 아니다.

2010/06/09 01:19 2010/06/09 01:19

아우구스투스

Posted 2009/05/29 09:36, Filed under: Review/Book

몇 해 전 앤서니 애버릿의 키케로를 읽을 때 난 공화국의 현실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공화국의 이상에는 동의했던 한 남자를 소설처럼 극적으로 그려낸 것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지적하는 사실들이, 작가가 사실로부터 그려내는 거대한 형상에 이성은 침묵했고 그가 그려낸 키케로의 비장함에 숙연함을 느끼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과연 그가 그려낸 것에 경탄한 내가 과연 옳았던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문가가 쓴 연구서들이 줄기차게 번역되어 나오면서 아마추어 역사가가 쓴 로마사를 바라보는 시선에 감탄 대신 냉혹함이 서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통찰력이 때로는 뻔뻔한 표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생긴 비웃음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샤임의 로마혁명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앤서니 에버릿이 그린 아우구스투스에 다소간의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인물이 지니는 잔인함과 비겁함, 불굴의 의지력을 섬세하게 그려낸 점이나, 노련한 정치가로 성장하기 전의 젊은 도살자의 모습은 꽤 재미있더라도 말이다. 그가 그려내는 것들은 공화국이란 치장을 뒤집어쓴 황제정의 어두운 일면이나, 상식이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로마사의 상식을 변주한 것에 불과하기 떄문이다.

게다가 그는 그레이브스의 소설적 영향력을 완벽하게 종속되어 있다. 리비아와 티베리우스로 대표되는 구공화정 주도 세력의 힘을 인정하는 것과 리비아를 악녀로 그리는 것은 별개다. 그녀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너무나 단편적이어서 역사적 사실로 어떤 해석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천년 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지탱하던 주요 파벌의 숨겨진 알력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파벌 사이의 경쟁은 있었겠지만 애버릿이 그린 바대로의 공화정 말기와 다를 바 없는 일인자가 되기 위한 소리 없는 내전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자리바꿈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추정할 뿐 추론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마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 어떤 책보다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기 이전의 옥타비아누스가 겪었던 험난한 젊은 모험가로서의 십 년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기에

2009/05/29 09:36 2009/05/29 09:36

기나긴 순간

Posted 2009/05/03 14:25, Filed under: Review/Book

사용자 삽입 이미지
더 이상 번역될 벨린저의 소설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축복이다. 그의 교차 서술은 재미있지만 동시에 번역의 묘가 살아 있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반복해서 읽다보면 쉽게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기나긴 순간』은 그의 소설 가운데 유일하게 봉인을 열 필요성을 느낀 소설이지만 동시에 가장 시시한 결말을 가진 소설이었다. 이미 소설의 초반부에서 검토한 가장 황당한 결말 가운데 하나로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졌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황망한 결말이라 일고의 여지도 없이 제거해 버린 하나의 가능성으로 소설이 끝났을 때 독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벨린저의 『이와 손톱』 수준의 완성도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분노에 책장을 찢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쌓이지나 않을까?

2009/05/03 14:25 2009/05/03 14:25

책 읽어주는 남자

Posted 2009/04/13 09:04, Filed under: Review/Book

난 새책을 사랑한다.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새책을 읽는 것은 내 은밀한 소유욕을 채워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타인의 손때가 묻은 헌책에도 새책 못지않은 즐거움이 남아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은 책 속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누군가의 흥분과 긴장감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극도의 흥분 상태와 긴장감은 손가락 끝 마디를 습하게 만드는 법이고, 책장에는 이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는 동안 내가 발견한 재미도 바로 이런 흔적에서 비롯되었다. 얼굴조차 모르는 타인의 흥분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을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비정상적인 범주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이란 매개체를 통해서, 책장 끝에 남은 진한 손가락 자국을 통해서 낯선이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어째서 그녀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소년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나가 스타킹을 신는 장면에 매료되었을까? 또 나와는 다르게 알몸으로 등에 다가선 한나보다도 책을 읽어주기를 청하는 그들의 의식에 더 매료되었을까? 수영장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한나의 뒷모습을 부정한 소년의 절규에 왜 그들은 눈물을 흘렸을까? 한나의 방에 남아 있는 사진 한 장이 왜 그렇게 그녀들을 슬프게 만들었을까?

독후감이나, 독서회의 점잖은 대화와 달리 책에는 문장으로 숨길 수 없는 진짜배기 감정이 남아 있을 때가 있다. 재미없는 부분을 재빨리 넘기는 손가락의 투표는 발의 투표만큼이나 정직하고, 소설의 백미를 알려주는 지표 역시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엄격한 평가의 기준을 들이대자면 『책 읽어주는 남자』는 우리가 수없이 접한 소년과 중년 여자의 사랑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청춘>을 통해 이 장르에 대한 혐오감을 희석시켰고, 책을 읽어준다는 행위가 지니는 독특한 매력을 제외하면 이 책은 권터 그라스를 비롯한 47그룹의 아류라는 인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시간을 뛰어넘는 고전이 되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게 사랑에 대하여, 부끄러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다는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2009/04/13 09:04 2009/04/13 09:04

임페리움

Posted 2009/03/29 13:07, Filed under: Review/Book

서구의 북컬렉터들이 바라는 이상이 있다면 -물론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는 인큐내뷸러나 아메리카나 같은 것을 제외하고- 최상의 것은 저자 자신이 소유했던 수택본이나 원고를 손에 넣는 것이고 다음은 초판에 담긴 서명본을 얻는 것이다. 다행히 이런 기이한 취미는 우리네 문화와는 너무 이질적이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내 손에도 우연하게 저자 서명본 초판이 놓였던 적이 있다.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들린 워터스톤즈의 낭독회에서 본 로버트 해리스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빼면 마른 체격의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주름진 얼굴을 가진 가진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으나 그가 내가 흥미롭게 본 <이니그마>와 <파더랜드>의 원작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그가 낭독하는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키케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새로운 시대극이라는 광고 문구보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훌쩍 넘긴 어느 페이지에서 발견한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이었다. 마치 현대의 리포터가 현장을 취재한 듯 펼쳐지는 공화정 로마를 상징하는 부조리와 치열한 경쟁의 장을 다룬 한 막 앞에서 작가의 특별한 능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화정 로마를 다룬 소설의 백미는 항상 콜린 맥컬러우의 『로마의 일인자』 시리즈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로버트 해리스의 『키케로 3부작』은 다른 의미의 백미가 될 것이 확실하다. 맥컬러우의 『로마의 일인자』가 캐릭터와 섬세한 묘사가 만들어 내는 인간의 본성의 치열한 장을 설명하고 있다면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은 정치 스릴러에 가깝다. 맥컬러우의 로마가 인간이기에 욕망하는 수많은 탐욕과 야망이 만들어 내는 향연이라면 로버트 해리스의 로마는 정치라는 경쟁의 장에 던져진 투쟁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경기장에서 키케로만큼이나 다양한 적을 가졌고, 험한 고초를 겪은 인물은 없으리라.

『임페리움』은 키케로의 삶의 단계를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베레스에 대한 기소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정치인 키레로의 본격적인 투쟁이 펼쳐질 무대를 마련한 집정관 당선과 함께 마무리 짓는다. 그 사이 몇년 동안 독자는 아무런 정치적 입지를 갖지 못한 이 지방 출신의 이 로마인이 어떻게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고, 포퓰라리스의 이익을 대변자였다가 얼마나 극적으로 옵티마테스로 변신을 했는지를 추적해 나간다. 키케로의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었다고 이 책은 규명하지 않지만 최소한『임페리움』 안에서 저자는 그 역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간 한 사람의 로마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세대가 내전을 통해 소멸한 다음 로마의 주인이 된 지방출신의 새로운 로마인들이 만들어 낸 허울뿐인 공화국의 주인공들과 그가 얼마만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를 이야기 이곳 저곳에 뿌려두고 있다.

물론 이야기는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카탈리나 탄핵을 통해 보여줄 키케로의 활약과 공화국의 프린켑스로써 삼두에 맞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그의 정치적 역경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그의 신념과 용기가 어떻게 드러날지는 아직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제 겨우 기나긴 이야기의 서두만 풀어놓고 있음에도 이 소설의 재미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P.S.


2009/03/29 13:07 2009/03/29 13:07

스틱스강의 하우스보트

Posted 2009/03/12 22:29, Filed under: Review/Book

나처럼 허세를 부리며 약간의 인문학적 소양을 가졌다고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으로서는 『스틱스강의 하우스보트』 같은 제목 자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스틱스강에 떠 있는 하우스보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함이 밀려왔고, 저승을 헤매는 영혼들이 나누는 대화가 어떤 것일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쩌면 다시는 우디 앨런의 코메디를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음에도 <Scoops>를 보게 된 것은 아름다운 스칼렛 요한슨 때문이 아니라 스틱스강을 건너는 와중에 이승으로 잠시 도망친 한 영혼의 행위가 이야기의 시발점이 된다는 설정에 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백하건대 시간 여행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저승으로의 여행이다. 그렇기에 단테의 『신곡』에 열광했고, 사악한 오딧세우스가 심연에서도 여전히 고뇌하고, 불평하는 영웅들을 만났던 장면의 전율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스틱스강의 하우스보트』는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책과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라면 한 번쯤 생각해 봤고, 읽어봤을 이야기를 작가는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그렇기에 재미는 있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지는 않는다. 또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게 하지만 이내 공허한 침묵으로 독자를 밀어 넣는다. 저승의 영혼들이 벌이는 논쟁은 즐겁지만 산뜻하지는 않다. 기발한 소재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해는 높이 살만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이 짧은 소설 속에서 어떤 아름다움도 찾을 수 없다.

-피곤한 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서서 보기 좋은 책. 잠시의 유쾌함을 위해 의식을 의탁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겠지만 읽고 난 뒤의 허망함에 대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책장을 넘겨야만 하는 소설.

2009/03/12 22:29 2009/03/12 22:29

자전거를 탄 세 남자

Posted 2009/01/31 23:02, Filed under: Review/Book

불과 보름 전까지도 『자전거를 탄 세 남자』에 대한 내 평은 한 계절을 풍미할 수 있는 베스트셀러는 될 수 있으나 고전으로 살아남을 만큼의 문학적 가치는 없다는 것이었다. 『 보트 위의 세 남자』가 불멸의 고전이 될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가지고 있는 반면 『자전거를 탄 세 남자』의 과장된 풍자는 되려 소설의 완성미를 떨어뜨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고립무원의 설국에서 보낸 설 연휴 동안 소설을 읽어가는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 자전거를 타고 떠난 세 남자의 여행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는 세 남자의 숨겨진 이유에 더욱 끌렸기 때문이다. 『보트 위의 세 남자』가 삶에 찌들지 않은 젊은 남자들의 유쾌한 소극이라면 『자전거를 탄 세 남자』는 적당히 삶에 찌들고, 포기를 배운 중년 남자들의 탈출극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진짜 재미를 느끼려면 그들의 좌충우돌 여행보다는 그들이 내뱉어 내는 대화와 에피소드 뒤에 숨겨진 불안감에 동감을 표하는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탬즈강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가 볼 수 있었던 나른하면서도 유쾌한 세 남자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변했는지 발견하는 것은 이 두 권의 소설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깨달음이다. 세 남자만큼이나 멋진 캐릭터였던 몽모랑시는 더이상 짖지 않고, 젊음이 주는 특권을 누리던 게으른 사내들은 누군가의 남편이, 혹은 나이 먹은 노총각이 되었다.

이들의 삶에서 느긋함에 대한 열정은 사라졌고, 그 대신 삶에 대한 투덜거림이, 불안감을 숨기고자 과장하는 버릇이 들어섰다. 가볍게 아페리티프를 마신 듯한 흥쾌함을 앗아간 대신 시간이 채워넣은 것은 빈정거림과 자기파괴적 성향의 유머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나도 이제 슬슬 이들의 처지에 동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탬즈강을 여행하는 유쾌한 세 남자를 상상하며 이들의 여행에 동참했던 난 사라지고 글래스에 폭탄을 제조하며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는 현재의 모습이 남았다. 보드카를 연속으로 몇 잔 들이켠 듯 혀가 꼬이고 얼굴에 핏줄이 솟아오른 남자들에게 남은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처럼.

2009/01/31 23:02 2009/01/31 23:02

Inter arma silent leges라는 라틴어 문장은 만나는 매 순간 기이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평온한 표정 뒤에 숨겨진 광기와 폭력을 이끌어 내는 주문이랄까? 극적인 무대장치를 통해 대중의 이성을 현혹할 수 있었던 선동정치가 혹은 사회공학자 겸 정치깡패들이 세계를 이끌던 시대의 순종적인 군중이 된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있어 불행은 저 문장을 통해 전쟁의 피해나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선량한 면모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법이 침묵이 강요당하는 순간에는 이미 양심 따위를 지킬 여유가 없다는 것, 전쟁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살아남는 투쟁 외에는 어떤 선택지도 남아있지 않다는 깨달음은 얼마나 나를 망쳐놓았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양고대사박물관(Warfare in the classical world)

고대를 다룬 수많은 역사서의 전투 기술은 다분히 문학적이다. 작가들이 묘사하는 것만으로 상황을 이해하기란 여의치 않다. 이 책은 이런 문제점에 대한 대안이다. 모든 전투를 개괄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어느 전문가 못지않게 까다로운 어조로 잘못된 고증에 대한 비판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화려한 삽화다. 나처럼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머릿속으로 그려내지 못할 문헌상으로만 만날 수 있던 존재들과의 해후는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P.S. 장르소설을 긁적거리는 아이들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기도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First World War: the war to end all wars)

Great War 혹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으로 불린 1차세계대전이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전쟁을 위한 서곡이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록 일관된 전략 아래 수행되는 대전략의 부재에도 국지적인 각 전선의 규모의 합은 그 전시대까지 인류가 전쟁에 쏟아부은 모든 자원을 능가하는 규모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이 책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맞추어져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아예 벗어나지도 않지만 기술된 관점의 상당수는 당시 사람들이 지녔던 견해를 수용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무엇보다 다른 1차세계대전사에서 다루지 않았던 동부전선에 대한 고찰과 현대의 군사적 개념을 토대로 당시의 전략을 비판하지 않은 점은 후한 점수를 줄만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영연방군에 호의적인 서술에 호오를 드러낼 수도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것 역시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였음을 밝혀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차세계대전(The Second World War)

존 키건은 리처드 홈즈와 더불어 영국이 자랑하는 전쟁사가 중의 한 명이다. 그가 내놓은 저술의 범위는 14세기부터 21세기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간대이지만 특히 그가 장기로 삼는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다. 그만큼 제2차 세계대전의 다양한 전장을 다룬 사가는 아직까지는 없다.

수많은 개인적 수기는 넘쳐나지만 개별 전선을 전문적으로 다룬 역사서는 턱없이 부족한 1차세계대전과 달리 제2차세계대전은 개별 전선을 다룬 책이나 제너럴십을 다룬 책은 넘쳐나지만 전쟁의 전방위를 조망한 책은 찾기 어려운 것이 실제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존 키건의 2차세계대전은 비록 태평양 전쟁을 가볍게 다루고, 유럽전쟁에 치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쳐도 유용성만큼은 후한 점수를 주기 충분하다. 영미의 전쟁위원회가 겪은 진통, USSR을 향한 히틀러의 돌격과 풍전등화와 같은 스탈린의 운명을 반전시킨 48시간, 무엇보다 태평양 전쟁의 당사자인 일본인이나 미국인이 아닌 영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태평양 전쟁의 양상과 해전이 아닌 해상력, 공군력과 결합한 해상력에 대한 이해 부족이 광대한 제국을 유지하던 마지막 숨결에 어떻게 치명적 일격을 가했는지를 고백한 글을 읽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지만 전쟁만큼 인간의 본성을,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의 물러날 수 없는 한 걸음을, 나약한 인간으로 이루어진 국가지휘부의 무모함과 부도덕성, 무책임함을 배우기 좋은 교재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순히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남은 시사점을 남긴다.

2009/01/05 00:01 2009/01/05 00:01

티치아노 미스터리

Posted 2009/01/04 09:16, Filed under: Review/Book

이언 피어스의 소설을 끊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핑거포스트1663』에서 보여주었던 재기를 다시 한 번 보여줄 것이란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핑거포스트1663』가 예외적인 소설이라는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새롭게 번역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실망감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이 소설들이 그의 초기작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해외 독자는 원서의 출간일보다 역서의 출간일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습성을 버릴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명 미술사 미스터리로 불리는 이 시리즈는 낱권으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라쇼몽>에 비견될 만한 재치를 보여주었던 『핑거포스트1663』에 다가서기에는 아직 너무 먼 거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시리즈의 첫 이야기인 『라파엘로의 유혹』에 난 그토록 강한 비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는 생생한 정도는 아닐지라도 읽고 있노라면 수만 킬로미터를 뛰어넘어 사건이 벌어진 공간을 엿보는 듯한 약간의 현장감이 있다. 시리즈의 첫 권을 읽은 독자에게는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는 점 또한 되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 다가와 연기를 펼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스케일이 큰 미니시리즈를 보는 듯한 기분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로 널리 알려진 티치아노는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화가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나체의 마야>나 <뒤로 돌아 거울을 보는 아프로디테>, <올랭피아> 같은 여성의 와상 누드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며, 그가 손끝으로 거칠게 표현한 짙은 바다가 인상적인 <비너스의 탄생>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앵그르의 누드 초상화와 사세리오의 아름다운 여인들 역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티치아노 미스터리』는 바로 이런 티치아노 연구를 위해 설립된 위원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살인사건의 이면에 깔린 진짜 이야기는 미술계와 인간의 추잡한 욕망에 관한 소고다.

2006년 여행에서 내가 본 물에 잠긴 베네치아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다. 찬란한 햇살이나, 바닷바람을 맞으며 플로리안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물에 잠긴 바다의 도시를 걸으며 느낀 아름다움을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되새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차마 이 소설에 악평을 남길 수가 없다.

2009/01/04 09:16 2009/01/04 09:16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

Posted 2008/12/08 22:49, Filed under: Review/Book

_서두를 열려고 얼마나 많은 문장을 쓰고 지웠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처럼 아름다운 소설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것은 쉽지 않다. 마음속을 뒤흔든 이 격랑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내 피가 너무 뜨겁고, 이 격정을 있는 그대로 문장으로 옮기기에는 내 능력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_르누와르가 그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여성들에게 느꼈던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을 읽으며 소년의 껍질을 벗고 어른이 되었던 스물둘의 그 겨울이 생각났다. 깊게 감긴 두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귀를 댈 수밖에 없었던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주가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의 전율과 감각이 문장을 읽는 동안 몸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부끄러움과 수줍음에 놀라 당시에는 미쳐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이 몇 해가 지난 다음에야 나를 찾아왔다. 이제는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누군가의 따스한 온기와 머리칼 냄새와 함께.

뱃놀이하는사람들의점심

_지금보다 한참 어렸던 어느 해 가을 지기들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의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 모두 알리사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이 안타깝다는 것. 줄리에타가 제롬에게 건넨 마지막 문장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만큼은 모두 동의를 표했다. 이제 그 지기들에게 고하노니 지드의 알리사가 우리에게 안겨주었던 가슴 먹먹한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인물이 한 소설에 등장했으니 어서 책장을 펴기를. 알퐁진이라는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두 번 세 번 문장을 씹어 삼키기를, 굽은 손의 르느와르가 당신 가슴을 그리고 싶었다고 내뱉는 장면에서 벅찬 감동을 느끼기를 빌어본다.

_귀스타브 까유보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화려한 재능을 꽃핀 대가들의 그림자에 가려 지금까지 제대로 조망 받지 못했던 그를 음지에서 끌어내 그의 업적과 고뇌, 삶을 보여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퐁 드 뢰로프>나 <비오는 날의 파리>를 그의 걸작으로 꼽지만 난 <바닦을 깎는 남자들>과 <노젓는 남자들>들을 더 사랑한다.

_어린 시절 처음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을 도록을 통해 보았을 때 몇 시간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을까, 그들의 시선이 바라보는 곳 찾기를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이 지닌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이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싶다. 만약 워싱턴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이 그림을 보고자 필립스 컬렉션에서 하루를 보낼 것이 분명하다.

_하나의 그림이 새로운 시대를 규정했다면 이 소설은 하나의 그림 속 인물과 그림의 완성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시대를 보여준다. 보불전쟁과 파리코뮌의 상처를 넘어선 1880년의 파리와 그 속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플라뇌르를 즐길 수 있다.

2008/12/08 22:49 2008/12/08 22:49

악마의 공놀이 노래, 이누가미 일족

Posted 2008/10/25 21:06, Filed under: Review/Book

누이들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책을 줄기차게 사들이는 내게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냉혹하게 평가하자면 오래되어 낡은 추리소설인데다가 내가 일본소설을 읽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번 난 추리소설이 아니라 전후소설을 읽는 기분이란 변명을 늘어놓곤 한다. 세이시의 플롯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전후 일본인에 대한 묘사와 이제는 사라진 일본추리소설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음산함이 매력이라는 첨언과 함께 말이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다른 추리소설에 비해 비교적 플롯이 명백하다. 다른 추리소설에서 하이쿠나 단어의 해석이 중요한 키워드인 것이 비해-물론 그렇다고 해도 논리적 일관성 앞에서는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살인이 벌어지는 공간의 비밀을 푸는 것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물론 살인이 벌어지는 공간의 문제와 거짓 진술의 문제는 이미 『옥문도』에서도 다루어진 부분이기도 하고 모든 추리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이긴 하지만 한층 원숙해진 인물 및 배경 묘사가 소설에 차별성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이누가미 일족』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추리소설의 종합판에 가깝다. 지금까지 다른 소설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기법들이 망라되어 있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다소 미군정시대의 일본에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성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소설이 나온 시기가 70년대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한다. 다만, 이런 현대성으로 말미암아 『옥문도』에서 보여주었던 것 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사실성은 다소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뭐 60년대와 군정시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혼란이 되려 소설에 특이성을 부여해주긴 했지만 말이다.

이누가미 일족
『이누가미 일족』에서 세이시는 언어유희나 살인이 벌어지는 제한된 공간의 비밀에서 벗어나 그의 소설에서는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었던 제3의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이 제3의 가능성 덕분에 추리소설은 명쾌함에서 더욱 멀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제3의 가능성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영미 추리소설에서는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는 범주에 속하고, 일본적인 특수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추리소설이 지닌 매력은 정서적으로 고립된 닫힌 공간이 지니는 폐쇄성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풀리지 않는 원한관계의 특수성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이 전후 일본이란 공간과 정신적 코마 상태에 빠진 일본인과 결합되면서 독자를 어둠의 심연으로 이끈다.

해소되지 않은 원한은 한 가족과 한 마을을 파괴하고 기괴한 죽음을 여기저기 흩뿌려놓는다. 하지만, 세이시는 숨겨진 정체를 지닌 가면의 인물들과 목적을 위해 손쉽게 살인이라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선택한 군상들 사이에 여러 빛깔의 사랑을 숨겨 놓는다. 게다가 복수의 집념이 남긴 것은 덧없는 죽음의 향연이라는 교훈을 빼놓지 않는다. 그렇기에 두텁게 낀 안개가 사라지고 고립된 공간이 온전하게 외부와 연결되었을 때 독자는 다시 한번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넘치는 평범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08/10/25 21:06 2008/10/25 21:06

퍼스트 폴리오

Posted 2008/10/23 07:27, Filed under: Review/Book

농담으로도 가당찮은 이야기지만 만약 누군가 나에게 두 권의 책을 훔쳐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한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셰익스피어의 폴리오와 켐스콧판 초서의 캔터베리이야기를 고를 것이 분명하다. 시장성과 환금성, 가치저장과 희소성 측면에서 이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 두 권보다 진기하고 소중한 책들도 많지만 온전하게 소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서 투자가치를 지닌 책은 이 두 권이 유일하다.

그렇기에 영문학에 발 좀 적셨다는 사람들 모두는 벼룩시장에서 단돈 50펜스에 이 두 권을 거저 줍기를 꿈꾸고, 에코 같은 양반은 그의 마지막 소설에서 조부의 서재를 정리하다가 폴리오를 발견한다는 다소 뜬금 없는 희망을 나열한 것이 아닐까?

Interred with bones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책은 이런 셰익스피어의 폴리오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제목 하나만으로 나 같은 인간의 구매욕구에 불을 지르기에는 충분하지만 폴리오는 이 소설에서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the Folio와  folio를 구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폴리오가 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형편없다.

또 하나 구름잡는이야기를 더하자면 푸코의 추를 기점으로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성당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 결사가 팩트 소설의 주요 소재였다면 근래 영미권의 팩트 소설의 주요 소재는 셰익스피어로 바뀌지 않았나 싶다. 물론 스페인어권이나 독일어권에서 줄기차게 나오는 결사형 팩트 소설과 의도적인 차별화를 노린 것이 사실이나 그리 얄밉지는 않은 것이 독자로서의 내 심정이다. 문학사에서 이보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또 누가 있을까? 절대 풀리지 않을 진실이란 이야기꾼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작업 환경인가?

서론이 길었지만 이 소설 꽤 괜찮다. 문학적 가치나 아름다움을 지닌 소설은 아니지만 대학교양 이상으로 셰익스피어를 공부했다면 저자가 지닌 박식함에 놀랄 것이 분명하고,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현장감에, 글로브 극장과 와이즈너 도서관에 불을 지르는 대범한 상상력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지난 몇 년 사이 출간된 셰익스피어 관련 소설들의 완전판이라고 부르기에 추호도 손색이 없다. 유행처럼 번지는 미발견 원고에 대한 해석도 참신하고, 누가 진짜 셰익스피어인가에 대한 진실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도 유쾌하다. 추리소설로서의 플롯은 아쉽지만 셰익스피어를 주제로 이보다 근사하게 소설 한 편을 엮어내기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카르데니오>도 좋지만 <Love's labour's won>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서운함이 좀 남긴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마케팅과 제목 선정은 정말 최악이다. 분권은 용서할 수 있어도 『Interred with bones 』란 원제를 무시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출판사의 횡포다. 그 덕에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받았고, 무엇보다 소설 자체가 공항소설처럼 누추해졌다. 제목에 담긴 아이러니가 인물과 사건에 연결되면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묵언의 메세지는 반짝거리는 표지와 잔뜩 기운 조잡한 말장난 사이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2008/10/23 07:27 2008/10/23 07:27

연기로 그린 초상

Posted 2008/10/22 07:25, Filed under: Review/Book

낡은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그것이 갓 인쇄된 것일지라도 오래되어 눅은 종이냄새를 맡게 된다. 사실 환각처럼 머리를 맴도는 이 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소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빌 벨린저의 소설에는 레이몬드 챈들러가 창조해낸 필립 말로우 같은 캐릭터가 없다. 무의미한 가정이긴 하지만 빌 벨린저의 소설에 필립 말로우 같은 시대의 아이콘이 존재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해보는 일은 독자로서는 꽤 매력적인 체험이다. 말로우 같은 캐릭터가 있었더라면 조금 더 쉽게 소설에 몰입되지 않았을까? 섬세한 배경묘사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낯선 시대 낯선 거리를 걷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돌이켜 보면 빌 벨린저에게 필립 말로우는 어울리지 않는다. 벨린저의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평범의 범주에 속한 이름 없는 사내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에게 필립 말로우 같은 전형성과 입체성이 동시에 부여된다면 벨린저의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안개 낀 모호함은 사라지고 우리는 흔한 누아르 한 편을 더 얻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연기로 만든 초상』은 한 여자의 변신을 그린 연대기이자 한 남자의 추적을 그린 서스펜스 물이다. 사실 병렬 구성을 지닌 이 소설에서는 어느 쪽에 마음을 쏟느냐는 전적으로 독자의 마음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시카고의 이민자 가정에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비록 허무한 것일지라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다른 삶을 살게 된 한 여자의 여정과 어리석음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로 나누어질 수 없는 미묘한 경계의 소설들이 있다. 빼어남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에 대한 절망적인 탐식을 충족시켜주는 소설들이 바로 이런 소설들이다. 빌 벨린저의 소설은 이 영역에 속한다. 고전으로 살아남거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리라 예상하긴 어렵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쫓아 소설을 섭렵하는 바보들에게는 그가 묘사한 삶과 배경만으로도 눈여겨볼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2008/10/22 07:25 2008/10/22 07:25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Posted 2008/10/20 10:13, Filed under: Review/Book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를 익히 아는 친구들에게 난 100퍼센트라는 개념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루키의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만큼 공감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으며, 되려 길고 구차하며 초라한 오욕의 기록에 새로운 한 획을 더할 뿐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이 소설에는 꼭 '100퍼센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만나는 기분'이란 표현을 써줘야 한다. 그 외의 어떤 표현도 이 소설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고 초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만약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뒷머리에 전달되는 아찔한 멍함 따위의 표현을 이 소설에 쓴다면 그것을 이 책은 욕되게 하는 것일 뿐더러 내 삶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오랫동안 사람의 뇌리에 남을 화려한 결혼식 다음 날 아침 처참하게 살해된 한 남자의 운명을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극중 화자인 나의 해석을 통해 재구성한 소설이다. 그렇지만, 얇은 책장과 단순한 줄거리임에도 이 소설의 느낌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걸출한 문학적 재능을 선사 받은 사람들만이 투사해낼 수 있는 삶의 정수를 독자로서 느끼는 것과 표현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련의 주인공이 잠에서 깨어 살해되기 전까지 몇 시간 동안 그가 걷고 만난 사람들을 추적하며 마르케즈는 수많은 여러 우연이 만들어 낸 살인사건을 조명한다. 동시에 독자는 카브리해의 작은 항구 마을과 그 주민들의 삶을 내 이웃의 삶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눈앞에 영사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주변인물들의 나래이션을 듣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한 남자의 최후와 그 뒷이야기들을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잔인하기 그지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삶의 참모습을 깨닫게 된다.

마르케즈가 『납치일기』에 보여주었던 르뽀르타쥐에도 충분히 감탄했던 나로서는『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 더 남길 말이 없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능가하는 숨겨진 보물이라는 부연 아닌 부연이 내가 이 책에 더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 아닐까 싶다.

2008/10/20 10:13 2008/10/20 10:13

장미의 미궁

Posted 2008/10/19 22:20, Filed under: Review/Book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여름의 실수, 혹은 만행. 그런데 의외로 이 소설의 웹페이지는 매우 충실하다. 이 소설에 대하여 문장을 남기는 것 자체가 낭비이긴 해도...
2008/10/19 22:20 2008/10/19 22:20

그날 밤의 거짓말

Posted 2008/09/13 17:04, Filed under: Review/Book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줄어드는 책장에 아쉬움이 앞선다. 그리하여 종막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를 따라잡길 잠시 멈추고 차를 우려낸다든지, 산책을 한다든지 따위로 유예를 연장하고 만다. 더욱이 이런 소설은 풋사랑의 내음이 밴 연애편지를 읽듯 한 줄 한 줄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시처럼 아름답고, 작은 계류처럼 섬세하게 흐르는 문장을 음미하려면 말이다. 사실 부팔리노의 『그날 밤의 거짓말』을 평범한 추리소설처럼 플롯과 반전을 중심으로 읽는 것은 바보들이나 할 짓이다. 경험 많은 독자라면 작가의 의도를 쉬이 짐작할 것이 분명하고 반전에 깜짝 놀라기보다는 게임에 참가한 죄수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속에 뒤섞인 진실과 거짓이 만들어 내는 정체성의 혼란과 욕망. 두려움에 공감하며 젖어오는 마음을 추스르러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데카메론'이란 표현의 마수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대개의 사람들은 구성의 유사성과 본문에 언급된 '하룻밤의 데카메론'이란 표현 때문에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중심으로 이 책을 설명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구성보다도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이야기들이 지니는 '데카메론적 풍미'다. 십여 년 전 『데카메론』을 읽던 소년이 접한 다채로운 삶을 소설 속 이야기들은 한층 위트 있게 겹쳐 놓는다. 묵직한 장정을 자랑하는 책 두 권을 가득 채운 이야기를 단 네 편의 이야기로 함축해내는 재주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날 밤의 거짓말』의 매력은 사형수들에 대한 연민에 있다. 사형을 하룻밤 앞둔 죄수들의 고백에는 속임수라는 당과가 발라져 있지만 진실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되려 거짓의 이면에 놓인 것은 죽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삶을 정리하며 내뱉은 회고다. 젊은 '학생'은 『지붕 위의 기병』 같은 사랑을 고백하며 삶을 갈구하고, 남작은 태 속에서 시작된 자기 복제의 저주를. 병사는 파괴적이고 부평초 같은 삶을, 시인은 시인이 꿈꿀 법한 자극적인 사랑을 노래하며 사형대로 걸어간다. 죽음이라는 사랑과 희망도 절망도 모두 무로 돌려버리는 최후의 종언과 입맞춤하려고 말이다.

죽음과 직면할 때 사람들은 가장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낸다고 한다. 부팔리노의 『그날 밤의 거짓말』은 이런 명제를 다시 한 번 증명한다. 삶을 꿈꾸지만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네 명의 사형수들이 겪는 하룻밤의 게임을 통해서 말이다.

2008/09/13 17:04 2008/09/13 17:04

박스 (the Box)

Posted 2008/09/07 23:03, Filed under: Review/Book

레베르떼가 쓴 『항해지도』의 주인공 코이는 떠들썩한 부두로 상징되는 낭만적인 항해시대와 컨테이너선으로 대표되는 현대적 항해시대의 접경에 있는 인물이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모험심 많은 선원들의 시대가 저물고, 전자 항법 장치에 의존해 항구와 항구 사이를 기계처럼 오가는 항해만 남은 시대. 코이는 결국 항해학교를 졸업하며 장만한 크로노미터를 아쉬움 속에 처분하고 만다. 항해 경험이라고는 고작 호수에서 오리 보트나 타봤을 근사한 블랙 수트 차림의 남자들이 순전히 멋으로 크로노미터를 왼팔에 올려놓는 이 시대에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이런 서두는 컨테이너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가를 주제로 쓴 책에는 그리 어울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블랙웰즈에서 처음 이 책을 발견하기 전까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컨테이너선에 대한 심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이민자로 대표되는 부두노동자들의 뉴욕 이야기도 한 몫 단단히 했지만 말이다.

마크 로빈슨이 그려낸 모습은 권양기와 근육의 힘을 이용해 이루어지는 느린 운송이 컨테이너를 활용한 해륙연계운송을 통해 세계 경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보여준다. 저자는 규격화된 알루미늄 혹은 강철 박스들이 육상 트레이너를 위시한 운송시스템과 연결되면서 상품이 얼마나 빠르고 규칙적으로 세계를 여행하게 되었는지를 시랜드의 모체가 된 맥린사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하나하나의 기술 혹은 장비는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것들을 통합해낸 맥린의 비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은 조금은 달랐을지 모른다고 조심스레 주장하고 있다.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컨테이너 없는 세상을 그리리란 쉽지 않다. 하지만, 12미터짜리 상자가 어떤 위대한 발명보다도 큰 영향을 우리에게 미쳤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은 드물다. 12미터 상자 덕분에 우리나라는 국제무역의 세계에 편입되어 경제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일주일간의 트레이너 파업만으로도 국제수지의 성적표를 새로 쓸 수 있으며 이는 채권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언제인가 이제는 고작 하루 한 번 밖에 기차가 운행되지 않는 낡은 역사에 앉아 공터에 가득 쌓인 컨테이너들을 보며 이들이 다녔을 여행을 상상해 본이 있다. 철판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낡은 고철 상자들이 담았던 상품과 희망들을 생각하며 기차를 기다리고 있자니 까닭 없이 고작 3~4TEU의 화물을 위해 거친 바다와 싸우다 망자가 된 선원들과 과거의 명성을 잃어버린 부두가 만들어내는 음산한 적막감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마크 로빈슨이 묘사한 컨테이너 혁명이 만들어낸 효율적인 세계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이익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코이같은 선원들이, 말론 브랜도가 연기한 부두노동자들의 고된 삶이 여전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 채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하기란 더욱 어렵다.

2008/09/07 23:03 2008/09/07 23:03

피의 책

Posted 2008/08/17 10:40, Filed under: Review/Book

가끔 나는 세상에는 수많은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공포에 대한 면역체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경험을 쌓아가면서 공포에 대응하는 방식 역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는 제법 유명한 기차사고를 경험한 어머니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이 덧없이 짧다는 사실과 죽음에 이른 육체가 지니는 허망함이 내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내게 있어 이런 경험과 배움은 공포에 대응하는 나만의 방식을 결정짓는 요건이었다. 내가 열다섯 무렵 목매달아 자살한 이의 주검을 목격한 이후 그런 죽음을 경멸하게 된 것처럼, 의지를 상실한 육체가 지니는 추함에 진저리를 치게 된 것처럼, 부서진 손가락 끝 마디에서 흘러나오는 내 피를 바라보면서 피 흘림이라는 말에 무감각해진 것처럼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오늘날은 살아가는 우리에게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확립된 공포란 개념은 한낱 사치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느끼는 공포에 대한 정의를 잊어버린 채 미디어가 주입한 공포를 소비하고, 여기에 전율한다. 사실 공포란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다. 때로 우리는 집단 공포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매스 프로덕트가 가져다주는 천편일률적인 공포에 제작자의 의도대로 반응하기란 여의치 않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낸 공포에 그들의 의도대로 전율하지만 이 전율은 어딘가 엇박자가 난 밴드의 연주처럼 때로는 너무 밋밋하고 때로는 너무 과하다. 개인의 삶과 경험이 만들어낸 총화로서의 공포를 이해하는 방식을 몇몇 개인의 상상력으로 충족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몇몇 개인의 상상력은 잔혹함을 강조하거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불합리한 폭력에 빙점을 찍는 것으로 공포를 과장한다. 대신 낯섦이란 인류가 원시사회의 일원이었을 때부터 지녀온 공포의 원천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과연 매스 프로덕트가 만들어내고 해석한 천편일률적인 공포가 아니라 개개인이 지닌 공포에 관한 해석에 기반을 둔 공포를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물론 여기에도 몇 가지 예외는 있다. 대개 이런 예외들은 저급한 호러 문화와는 구분되는 보기 드문 이정표로 기능 한다. 그다지 잔인하지 않은 <프라이트너>가 무엇보다 잔혹하고, 무서운 영화로 꼽히는 것처럼 몇 가지 예외작들은 공포에 반응하는 우리의 양식을 탐구하고 한계를 개척한다.

클라이브 바커의 『피의 책』은 이십 년이란 세월이 지녔음에도 이런 예외작이 되기에 충분하다. 『피의 책』에서 바커는 공포의 한계를 새롭게 정의한다. 통상의 상상력을 벗어난 낯설음이란 공포의 원천을 이보다 더 몽환적이고 기이하게 표현하기란 여의치 않다. 그의 공포는 통상의 잔혹함을 넘어선 공포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경지에 인접해 있다. 피와 찢긴 육체로 얼룩진 시각에 의존하는 묘사 따위는 촉각과 후각을 망라한 그의 공감각적 묘사의 탁월함 앞에서 기세를 잃는다.

게다가 『피의 책』은 대부분의 매스 프로덕트 생산자들이 간과한 공포와 매혹의 관계에 주목한다. 사실 공포란 동전의 한 면에 불과하다. 동전의 다른 면에 새겨진 것은 바로 매혹이란 얼굴이다. 공포와 매혹이 제대로 결합하였을 때에만 공포의 소비자들은 공포에 전율하면서도 여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공포가 아름다울 수 있는 때는 오직 무서움과 잔혹함이 헤어날 수 없는 수렁과 같은 매혹과 잘 결합하여 있을 때 뿐이다. 그리고 피의 책은 이런 공포와 매혹의 결합을 그 어떤 시도보다 더 능숙하고 꼼꼼하게 책장 구석구석에서 실현하고 있다.

2008/08/17 10:40 2008/08/17 10:40

모던타임스

Posted 2008/08/11 08:32, Filed under: Review/Book

과거를 바라보는 내 시각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때로는 구조주의와 결정론에 따라, 때로는 한 인간의 자유의지가 역사에 미친 영향력을 중심으로 과거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영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려내는 절망이란 드라마의 장엄함에 매료되기도 했다. 이름 높은 타인의 시선에 쉽게 끌렸고, 실체적 진실보다 미사여구로 포장된 사변적 논의의 세계에 몰입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더 이상 이른바 정치철학이라 부를 만한 사상이 만들어 낸 정의에 입각한 해석에 끌리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치철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의와 역사란 인과의 거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정의는 사뭇 다르다. 정치철학이 부르짖는 정의의 대부분은 공허한 문구 안에 담긴 프로파간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말과 문자로 이루어진 바벨탑에 불과한 이른바 '진지한 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모던타임스』는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요란한 프로파간다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진실을 여과 없이 펼쳐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와 거짓 믿음이란 의심스런 안개 저편에 보이는 진실은 소름끼치도록 잔혹하며 어리석은 인간군상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모던타임스』를 아우를 수 있는 서평을 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출판사의 홍보문구나 역자의 후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않으려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아야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격동의 20세기'란 말처럼 지난 세기가 만들어 낸 생각들과 사건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현재진행형이다. 결국, 나에게 남은 선택이란 기껏해야 이렇게 변죽을 울리는 정도에 불과하다.

좌파 저널리스트에서 보수주의 역사가로 변신한 폴 존슨은 그가 지닌 냉소적 태도 때문에 일급 역사가임에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가는 아니다. 그가 지적하는 진실이 때로는 불편하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폴 존슨은 말랑말랑하고 따듯한 시선으로 솜사탕 같은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는다. 대신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폭력과 광기, 개인의 권력욕, 특정 집단의 이기주의와 인간의 허약한 지성과 정신이 만들어 낸 파괴와 살육의 처참한 역사다. 더욱이 그는 빈틈없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실체적 진실에 대한 끝없는 추적과 실존하는 힘에 대한 인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사고체계 안에 언어가 만들어내는 환상과 지식인들의 공론이 설 자리는 없다. 그렇기에 『모던타임스』에 담긴 사건들은 우리가 부정하고자 노력하는 20세기의 결함이며 사람들이 핏대를 세우고 논쟁하는 정의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돌이켜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물론 폴 존슨도 완벽하게 탈정치사상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개인주의와 자유의지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좌파의 견해에 따르면 보수반동이라 부를만한 사항에 대해서 가족주의가 전체주의에 대한 해법이며, 보수반동을 통해 획득한 성과가 공론에 그친 이상주의 보다 더욱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안정을 선사했음을 설파한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핵심은 지식인들과 직업정치가들, 사회공학자들이 만들어낸 유토피아를 가장한 디스토피아에 희생된 사람들에 위한 우울한 조곡이며, 상대주의적 세계가 만들어 낸 불합리와 불의에 쉽게 타협하고 무너지는 인간 본성의 나약함에 대한 경종이다.

2008/08/11 08:32 2008/08/11 08:32

치명적 실수

Posted 2008/08/10 08:21, Filed under: Review/Book

무엇이 좋은 추리소설의 기준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십인십색일 것이 틀림없다. 혹자는 추리의 공정성을, 다른 이는 속임수의 독창성을 어떤 이들은 추리의 난해함을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꼽는다. 여기에 문학적 완성도를 덧붙이는 이들도 있고, 캐릭터의 매력을 첨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각양각색의 기준들보다 중요한 것은 오랜 경험이 말해주는 감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객관적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치명적 실수』는 추리의 공정성, 추리의 난해함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긴 어렵다. 추리 과정에서 제공받는 단서가 추리에 충분하다고 보기에는 보편성이 떨어지고, 범행에 사용된 총기가 리볼버가 아닌 피스톨일 경우에만 작가가 사용한 트릭이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소설은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게는 조금 불쾌한 면도 없지 않다. 추리소설에서 사용되는 전형적인 미끼 캐릭터가 진짜 범인인 경우에 속하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으로 볼 때 아무리 완벽한 동기를 가진 캐릭터라도 너무 노골적으로 암시를 뿌린다면 반전을 위한 미끼일 가능성이 큰데 이 소설에서는 반전이 없다는 사실이 되려 반전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은 충분히 읽어볼 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반유대주의를 내세웠던 칼 뤼거가 빈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회공학자이자 직업정치인 가운데 하나인 히틀러에게 영향을 미쳤던 그 시대를, 겉으로는 평온하고 아름답지만 이미 정신은 병들대로 병든 벨 에포크의 빈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로 대표되는 새로운 빈의 지성과 전기치료에만 매달려 있는 그루거의 대비, 슈베르트와 베토벤이 남긴 문화적 유산과 말러, 클림트로 대표되는 전통을 터부시하는 새로운 성향의 예술가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영지주의와 무신론자들의 범람이 묘사되고, 절제 이면에는 문란한 성생활과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남성과 억압된 여성의 관계, 유곽으로 대표되는 퇴폐적 성향의 빈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의 해석』을 읽으면서 열광했던 이유는 근대와 현대의 여명의 혼란기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명적 실수』역시 다르지 않다.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문화가 지닌 저력을 여실히 보여줬던 시대의 이면에서는 퇴폐와 어리석음, 용서할 수 없는 반문명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리와 심리 분석이라는 형태를 빌려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2008/08/10 08:21 2008/08/10 08:21

웨스팅 게임

Posted 2008/08/03 08:34, Filed under: Review/Book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열 살배기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소설이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반쯤 본 내 나이 또래의 청년에게 공감을 주기란 어렵다. 내 나이 또래의 청년이 원하는 추리소설이란 소름 돋는 살인과 악마적인 사고의 전환을 통해 인간의 악랄한 본성을 엿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등장인물을 보면서 스스로의 선함에 뿌듯함을 느껴보는 과정 역시 필수다. 하지만, 어린 시절 받은 추리소설에 대한 조기교육으로 말미암아 속임수와 복선이 복잡함을 즐기는 나로서는 이 선량하고, 어수룩한 소설에서 너무나 어렵고, 복잡한 것을 상상하는 바람에 되려 헛다리를 짚고 말았다.

사실 이 소설은 추리가 필요 없는 소설이다. 중반쯤에 작가가 음모의 주재자의 입을 빌려 해답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로서는 이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트릭을 믿을 수 없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머릿속은 내가 쓰고 지운 소름끼치는 동기와 음모들의 쓰레기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동심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 되었으며, 더럽고 추악한 가능성을 그 무엇보다 먼저 떠올리는 사람으로 자랐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내적 교훈을 제외하면 어른이 읽기에는 지극히 선량하고 사랑스러운 추리소설임이 분명하다.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사이를 범주하는 어린 조카들에게 선물할 만한 가벼움과 재치를 지닌 책.

2008/08/03 08:34 2008/08/03 08:34

일리움

Posted 2008/07/15 07:44, Filed under: Review/Book

내가 누린 행운 가운데 하나는 연령별, 수준별, 학년별로 추천된 책 무더기를 아이에게 떠안기는 오늘날의 무모한 젊은 부모들과 달리 읽을 자유를 인정해주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동안 누구도 내게 무엇을 읽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읽는 대신 공부도 좀 하라는 잔소리가 나를 뒤따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책장에서 빼어 든 70년대 수필집의 맛깔스러움, 누이들이 빌려온 추리소설의 짜릿함, 먼 시대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들. 심장을 조이는 비통함과 애절함이 담긴 대화들. 뭐 그런 것들을 벗 삼아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삶의 가장 커다란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사이언스-픽션에 서평으로 이런 서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굳이 언급해야만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바로 이런 행운이 없었다면 이 소설을 이해하는 정도는, 이 소설이 얼마나 대단한 소설인지 깨닫는 일은 그 궤를 달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모나, 선생이 권해주는 편집본, 축약본에 길들여 자랐다면 널리 알려진 캐릭터를 비트는 변용의 즐거움과 작가가 어떤 시선에 영향을 받았고, 또 어떤 식으로 주제를 변형시켰는지 알아가는 즐거움을 찾지 못했을 것이기 분명하다.

『일리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정강이받이를 차고 물푸레나무창으로 상대의 창자를 꺼내는 아카에아 시대의 해상귀족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묘사되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캐릭터에 대한 명확한 인식 또한 필수다. 거기에 더하여 셰익스피어 주요작과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볼 필요성이 존재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지닌 편견과 다르게 사이언스 픽션을 즐기는 첩경은 고전으로 알려진 인류의 보고를 보다 넓고 깊게 이해하는 일이다. 사이언스 픽션 자체가 다른 어떤 장르보다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고전의 메타포와 캐릭터를 인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리움』은 크게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모라벡으로 불리는 목성의 기계유기체와 미래의 지구에서 살고 있는 현존 인류, 그리고 트로이 전쟁 시대의 일리움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리움에서 전쟁을 관찰하는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흙이 되어버린 고전학자들을 복원한 스콜릭으로 불리는 학자들이고 이들은 신들의 강요 아래 트로이 전쟁을 지켜본다. 하지만, 이들은 신들의 변덕에 희생되는 가련한 노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래의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들은 아카에아 시대에서 절대자로서 군림한다. 한편, 목성의 모라벡들은 화성이 붕괴될지도 모를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양자이동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탐사대를 파견한다. 이 탐사대 안에는 소네트와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모라벡 만무트와 프루스트 애호가인 이오의 오르푸가 타고 있다. 한편, 같은 시기 지구에서는 문자와 문명을 통째로 잃어버린 현존 인류 중 일부가 사라진 후기-인류의 비밀을 찾아 모험을 시작한다.

일견 복잡한 이야기지만 각각의 이야기 축은 다른 이야기 축에서 언급되지만 설명되지 않는 간격을 메우며 이야기의 흐름을 더욱 밀접하게 만들고, 사건의 핵심에 다가서는 통로를 독자 앞에 드러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난 점은 사건 전개와 더불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라 불릴 수 있는 신화가, 과거와 미래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면서 새로운 역사가 진행되는 점에 있다. 『일리움』은 『일리아드』면서 더 이상 『일리아드』가 아니다. 호켄베리로 불리는 과거를 잃어버린 중년의 스콜릭에 의하여 트로이 전쟁의 흐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틀리고, 목성의 탐사대는 화성에서 신들의 거처인 올림포스산과 아카에아 시대와 연결된 통로를 발견한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서보다 더 강인하며,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극중 성격은 셰익스피어의 『트러일러스와 크레시다』에 묘사된 캐릭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리움』, 『올림푸스』로 연결되는 이 연작 시리즈의 전반부인 이 소설에서 아카에아-트로이 연합군은 호켄베리의 계략에 의해 마침내 신들을 향한 전쟁을 시작한다. 이 얼마나 멋진 전개인가? 신들에게 지급받은 변신도구를 이용해 파리스로 변신해 닥터 파우스트가 누린 행운에 동참한 호켄베리는 또 얼마나 독특한 캐릭터인가? 한 편에서는 신이지만 가련한 배덕자이자 망명자에 불과한 이들은 또 얼마나 가련한 존재들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헐리우드 영화로 접한다. 문학의 한 갈래로서 이 장르가 지닌 강점을 문장을 통해 접한다기보다는 타인의 해석에 의해 영상으로 옮겨진 파편만을 보고 판단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 장르가 지닌 풍부한 문학적 함의와 철학적 고뇌, 정치적 선전에 장님이 되어버린다. 아이들을 위한 허황한 이야기, 영화를 만들기 위한 장작더미로 인식되는 이 장르에 대한 평가는 그렇기에 극단적일 수밖에 없다. 외곬으로 이 장르에만 열광하는 일들과 애써 이 장르를 무시하는 사람들. 그렇기에 이 장르의 소설을 읽으려면 제목을 가리기 위한 책커버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2008/07/15 07:44 2008/07/15 07:44

비밀의 역사 핑크 카네이션

Posted 2008/06/12 09:05, Filed under: Review/Book

오랫동안 난 로맨스 소설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해 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단순한 치기에 불과하지만 그 시절 겁 없이 손 댄 수 십 권의 책무더기가 준 교훈을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허투루 잊지 않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플롯과 묘사, 판에 박힌 듯 똑같은 등장인 물 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곤 권태 밖에 없다는 것이 그 당시 내가 이 장르를 빠져나오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확고해져 하나의 의지가 되었다. 혹자가 제인 오스틴 역시 조지언 시대의 로맨스 소설 작가가 아니겠느냐고 변명을 늘어놓을 때면 로맨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키스라든지, 애무를 인용하며 짓궂게 사람들을 놀려대던 편벽하고 못된 습관 역시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관능이 무엇인지 이미 오래전에 알아버린 스물여덟의 청년이 되어서 다시 읽은 로맨스 소설은 조금 새로운 느낌이다. 올바르게 키스하는 방법마저 가물거릴 만큼 긴 시간 지속된 비자발적 독신증후군의 병폐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어보기도 하나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금단의 열매를 맛본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로맨스 소설 속의 묘사 역시 어린 소년이던 때와 전혀 다른 감각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오래전 로맨스 소설을 독파하던 친구가 나한테 던진 말처럼 참으로 '뻐근한 느낌과 함께 사지가 노곤해지는' 경험을 간만에 얻어 쓸 수 있었다. 입가에는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린 채 의자에 앉아 얼굴을 붉게 불든 스물여덟 청년의 모습은 참으로 대책이 없지만 말이다.

사실 로맨스 소설에 대해 뒤바뀐 내 감상을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이유는 이 소설이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스파이라는 포장을 뒤집어쓰고 있긴 해도 본질적으로는 로맨스 소설이기 때문이다. 첩자들이 벌이는 활극은 이 소설에서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복잡하고, 정교하며 세련된 이언 플래밍식의 스파이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대신 사랑에 빠진 샐쭉한 청년 스파이가 하나 있다. 이중 스파이가 등장하지 않는 점이 흥미롭긴 하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청년 스파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시골 처녀를 아페리티프 삼아 음미하는 부분이다.

『핑크 카네이션, 비밀의 역사』『검은 튤립 마스크』『에메럴드 링의 기만』『크림슨 로즈의 유혹』으로 이어지는 이 시리즈에서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을 설명하는 서장에 불과하다. 핑크 카네이션이란 스파이링이 형성된 시작에 초점을 맞추면서 앞으로 전개될 애정 전선의 서막을 살짝 들춘 정도가 이 소설에서 다룬 전부다. 하지만, 일견 유치해 보이는 제목만으로 이 소설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 같은 엄격한 눈빛과 결연하게 치켜든 턱으로 무관심을 가장해도 실상 그가 보는 것은 깊게 파진 앞섬 사이로 보이는 앙가슴이나 살품, 얇은 셔츠 사이로 보이는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여인들>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만한 곧은 등, 혹은 한 팔에 감길 것 같은 세류요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나 여성미를 우아하게 그려내는 둔부라는 사실을 이 소설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06/12 09:05 2008/06/12 09:05

검은 선 (La Ligne noire)

Posted 2008/05/17 01:15, Filed under: Review/Book

오래전 친구들과 떠난 여행길에서 가장 잔인한 묘사에 대한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누가 어떤 의견을 내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온전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했던 말만큼은 분명히 기억한다. 등뼈가 드러난 날씬한 등허리에 떨어지는 핏방울. 헤모글로빈에서 산소가 환원되기 바로 직전 검은색에 가까운 진한 보랏빛의 핏방울이 백합처럼 하얀 살결에 떨어지는 묘사가 가장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는 가장 잔인한 묘사라는 것이 요지였다. 버스 뒤에서 텁텁한 팩소주를 돌리며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찌른 부분은 빅토리아 시대의 고리타분함만이 아니라 섹슈얼리티와 결합한 이단의 제단에 봉헌된 피의 전승과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폭력과 성의 끈끈한 유대라는 주절거림이 첨언 되었다는 것도 기억이 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 기억을 거꾸로 되감아 가다 보니 다른 누군가가 현대 범죄 소설의 문제가 바로 범인들의 불능이라고 언급했던 점도 떠오른다. 사내란 동물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살인의 긴장 속에서 강간의 기회를 함께 읽는 법이라고, 작가들은 범인의 불능이 그의 가학적 취향이나 살인의 동기를 해명하는 중요한 모티브라고 판단하겠지만, 독자로서는 불능이나 사정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성적 불안감과 함께 폭력에 대한 동화를 고조시키는 주범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종국에 그는 '차라리 잭 더 리퍼가 더 깔끔해. 그의 이야기에서는 최소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거든. 조니 뎁이 아편에 손을 대는 이유처럼 말이야. 잭은 잔혹하기는 하지만 그와 자신을 동화시키려면 간접 장치가 필요해. 왜나면 우리는 가장 오래된 직업의 소유자가 아니기에 살해당할 염려가 없잖아? 그런데 근래의 소설들은 그 거리를 지워버려. 프로이트와 융 이래 왜 모든 범죄 소설 작가들은 왜 심리학적인 병인을 따라 이야기를 끌고나가며 그 틀에 독자를 힘들게 만드는지 모르겠어. 내색하지는 않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일말의 동일성에서 비롯된 그 죄책감이 뒤섞인 쾌감. 정말 불쾌하지 않아?'라고 토로했던 듯싶다.

사실 범죄 소설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여는 이유는 오랜만에 이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양들의 침묵』을 읽으며 내가 가졌던 느낌. 한니발 렉터와 스털링 사이의 창살을 두고 피어나는 성적 긴장감(이제야 고백하자면 나와 지기 하나는 이 성적 긴장감이 해소되길 기다리며 수능 보름 전에 출간된 『한니발』을 탐독했던 미친 짓을 태연스럽게 실행에 옮겼다), 잔혹한 동시에 아름다운 범죄. 긴장과 이완을 오가는 통에 시작된 동화현상. 살인에 대한 매혹. 육체에 대한 묘사 없이도 느껴지는 섹슈얼리티. 부적절한 즐거움. 표현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가져다주는 쾌감. 그 느낌을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 바로『검은 선』이다.

물론 『검은 선』 자체는 격찬받을 정도로 매끄럽고 훌륭한 소설은 분명 아니다. 빼어난 부분이 많지만, 전체적인 골격은 조금 덜 다듬어지고 성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매끄럽게 이어지던 매혹적인 핏빛 이야기는 어설프게 서두에서 흘린 사건의 복선과 끝이 훤히 보이는 결말 사이에서 빛이 바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과거의 잔혹한 범죄 소설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살인의 유사성이나, 상징성, 인물에 대한 묘사와 잔혹함의 본질에 접근하면서 겪게 되는 변화가 때로는 초연하고 담담하게, 때로는 사냥개에게 쫓기는 들짐승이 되어 숨이 턱에 걸려 헉헉거리는 마냥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팩소주의 그 텁텁함과 잔혹한 소설이 가져다주는 guilty pleasure를 직시할 수 있었던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어수룩한 묘사 속에서 광기의 맛깔스러움을 찾아내 수 있는 이에게.(프랑스에서 『늑대의 제국』과 거의 연달아 출간된 것을 고려하면 한국어판 출간은 정말 늦지 않았나 싶다)

P.S.


2008/05/17 01:15 2008/05/17 01:15

고스트라이터 (the Ghost)

Posted 2008/05/14 08:14, Filed under: Review/Book

토니 블레어의 커리커쳐는 환하다 못해 고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웃음을 특징 삼아 그려진다. 존 메이저의 고루한 표정과 대비되는 이 웃음은 한때 블레어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기도 했다. 게다가 블레어의 젊고 매력적이며 배우처럼 잘 생긴 외모는 새로운 영국과 제3의 길로 상징되는 그의 정치적 행보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블레어는 90년대 노동당의 노선을 중도좌파로 옮기면서 보수당의 지배를 끝낸 극적인 승리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PMship의 후반부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그가 이룩한 업적에도 오늘날 그는 피로한 인상으로 퇴진을 종용받은 채 서서히 권력 기반을 잃어갔던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토니 블레어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여는 까닭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영국의 전임 수상 애덤스 랭이 바로 토니 블레어를 모델로 그려진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퇴임 이후 어느 투자은행의 사외이사로 영입되었다든지, 미국이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을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부시 행정부의 충실한 추종자 역할을 자임한 것은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유사성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토니 블레어와 닮은꼴의 인물인 애덤스 랭을 통해 로버트 해리스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디언에 실린 로버트 해리스와의 인터뷰는 작가의 의도를 읽는 가장 좋은 참고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기실 그가 주목한 부분은 대필작가와 의뢰인 사이의 관계였다. 의뢰인조차 제대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어떤 사실을 이끌어내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옮기는 사람. 진실을 끌어내는 것을 임무로 삼지만 결코 진짜배기 진실에 다가설 수 없는 한계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직업. 사람들이 읽고자 하는 거짓을 진실에 가깝게 보이도록 포장하는 전문가. 비록 토니 블레어가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에서 미국조차 알지 못하는 진실을 옹호했던 부시의 가장 훌륭한 대필작가라는 조소가 덧붙긴 했지만 기실 그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진실의 문제였다. (이 소설은 블레어의 퇴임에 맞추어 발빠르게 출간되었다. 따라서 독자는 블레어에 대한 폴스태프식 캐리커쳐와 스릴러의 플롯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 대필작가인 주인공은 전범재판소에 기소될 위기에 처할 전임 수상의 자서전을 대필해주기로 하면서 음모에 휩쓸리게 된다. 하지만, 그가 진실이라 믿었던 것은, 그가 추적한 진실은 실상 그가 보고 싶었던 진실이 그려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고, 읽고 싶어하는 진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결코 확연하게 다르지는 않은 거짓에 가까운 진실이 이 소설에서 다루는 문제의 핵심이다. 진실의 문제를 제외하면 친미적인 성향의 랭의 정책, CIA판 옥스퍼드 링은 사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기법상의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토니 블레어에 대한 문학적 초상이자 문학적 초상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모욕의 향연이다. 소설 속의 전임 수상 애덤스 랭을 전범으로 만들어 버리는 소설에서만 가능한 복수는 그가 신문지상을 통해 수없이 비난했던 블레어의 전쟁 지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조소다. 게다가 누구나 셰리 블레어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편보다 더 똑똑한 여자'인 루스 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필작가와 벌어지는 전임 수상의 아내와의 정사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악한 정치적 조크인 것은 분명하다.

얼마 전 로버트 해리스는 한 기고문에서 토니 블레어를 '짙은 안개가 낀 구불구불한 길에서 지도 없이도 버스를 몰 수 있는 운전사'로 묘사했다. 오늘날 영국이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현실은 기실 고든 브라운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길로 버스를 몰아넣은 블레어의 잘못인 동시에 후임을 생각하지 않고 블레어에 대한 염증으로 그를 축출한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점이다. 아무도 블레어의 복귀를 바라지는 않지만, 블레어만큼 능숙한 운전사는 없었다는 사실을 로버트 해리스는 부정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비운에 암살당하는 여편네에게 끌려다니는 오쟁이진 남편이자 덜떨어진 연극배우 같은 정치가로 묘사하고 있긴 해도 말이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진실의 문제는 대필작가와 의뢰인, 독자로 이루어지는 꼭짓점 사이의 진실만이 아니다. 소설의 배경으로 묘사된 21세기의 현실은 소설이 그려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을 독자 앞에 내던진다. 블룸즈버리에서 걸어오던 주인공이 토트넘 코트 부근에 테러 때문에 유스턴을 돌아 메릴리본을 거쳐 패팅턴에 이르렀다가 그의 집인 노팅힐로 접어들었다는 간략한 단락은 실제로 피가 튀는 폭력보다 더 진지한 불편함을 독자에게 호소한다. 이슬람 도축업자들과 모스크가 보이는 지역에 사는 주인공에게 테러는 단순한 폭력일 뿐만 아니라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등장한 빅브라더스의 현실판이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 금속탐지기를 거쳐야 하는 세상은 폭력의 위협 앞에 질식해 버린 감옥 속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구두를 벗고 허리띠를 풀어야 하는 세상에서 이런 블랙 유머야말로 이 소설이 지닌 진짜 강점이다.

2008/05/14 08:14 2008/05/14 08:14

보트 위의 세 남자

Posted 2008/04/24 08:37, Filed under: Review/Book

이 소설의 존재를 안 것은 스무 살 무렵의 일이지만 실제로 그 소설을 인용한 것을 본 것은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 할 것도 없고』를 읽는 동안이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 주인공은 우연히 '보트 위의 세 남자와 한 마리 강아지'를 조우하게 되는데 코니 윌리스는 이 소설에서『보트 위의 세 남자』가 지닌 명랑하면서도 경쾌한 분위기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마도 그때부터 이 소설을 읽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게 된듯 싶다. 해적판으로 100쇄나 찍어냈다는 전대미문의 소설. 영국문학의 정수로써 평가받지는 못하지만(비평가들은 대체로 이 작품에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가장 가벼운 소설을 읽지 못한다면 내 看書癡歷에 가장 미진한 부분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세 남자와 한 마리 강아지가 떠나는 탬즈강의 보트 여행을 따라가는 일은 즐겁기 짝이 없다. 준비만으로 충분히 부산스런 런던의 하숙집, 갑문, 강둑을 지나치는 세 남자가 벌이는 게으름의 대결. 처량하게 내리는 빗속에서 벌어지는 대탈주. 사실 경쾌한 유머만으로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유머는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는 소재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캐릭터에서 비롯된 유머와 시의적절한 위트는 독자의 시선을 붙잡기에는 충분하지만, 독자에게 만족감을 전달하긴 어렵다.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람들의 기호와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은 그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채로운 요소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보트 위의 세 남자』는 이런 주장에 부합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유머와 위트가 돋보이기 때문에 일견 스탠딩 코메디의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와 탬즈강 보트 여행 동안 지나치는 지역들에 대한 생생한 서술, 인간성에 대한 장난기 넘치면서도 따스한 통찰은 소설의 저변에서 이야기에 풍미를 더한다. 웃음을 이어가되 지나치지 않고, 여정을 진척시키되 지리하지 않다. 한꺼번에 몰아서 읽기에는 쉽게 배탈이 날 것 같은 책이지만 한 장(章) 한 장씩 읽다 보면 입가에 멀리는 만족스러운 달콤한 웃음을 쉬이 보게 된다.

눈에 띄는 유사성이 없음에도『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나 독일동화집에 실린 슈라라펜란트 혹은 코케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던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봄이 좋을 소설.

2008/04/24 08:37 2008/04/24 08:37

대혁명 시기의 프랑스는 공화정 로마와 명말 청초의 중국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대다. 이 시기 대한 책이나 유물들은, 심지어 소설이라도 나를 유쾌하게 만들곤 한다. 그것이 어떤 입장에서 쓰였는지는 나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시대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 혹은 발견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재작년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빅토리아 앨버트에서 부르봉가의 도핀과 도피네의 그림이 그려진 도기 역시 이런 발견의 연장선상에 있다. 루이 15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왕이 되지 못한 채 죽은 비운의 인물, 그의 세 아들은 왕이 되었지만 그대에서 부르봉가의 지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혹 그가 루이 15세만큼 오래 살았다면 프랑스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more..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불행하게도 누구나 이런 가정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안다. 유능한 역사가라면 실재하지 않는 대안에 목을 매는 우를 범하지 않으며, 통속적인 역사 소설가들마저 로로코의 여왕에 비하자면 담백하기 그지없는 이 인물에 끌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아는 역사란 트리아농의 '오스트리아 여자'로 불리는 앙투아네트가 역사에 남겨놓은 이런저런 흔적들뿐이다. 수두자국 투성이 남자들이 왕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동안 단호하게 깨어나 철의 여인이 되었던 한 여성의 삶이 거칠게 농락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외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이란 없다.

프레이저와 다르게 츠바이크의 문장은 대담하고 보다 직설적이다. 전기 소설이 그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보여주었다는 평답게 츠바이크의 분석은 섬세함과 정연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츠바이크는 앙투아네트를 로로코의 여왕이라는 허영심 많고 세상물정 모르는 프랑스의 왕비로 바라보기보다는 -그에게 목걸이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긴 하지만 뒤마의 소설에서 다루어진 정도로 극적인 사건은 아니다- 두 왕가가 7년 전쟁을 통해 확인한 외교적 결론을 확인하기 위한 동맹의 증명으로 낯선 나라에 던져진 철없는 소녀가 여자가 되고, 어머니가 되며,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중심으로 조망하고 있다.

한 소녀의 내면적 성장과 고통. 힘겹게 얻은 평화. 생명을 건 투쟁이라는 소재 측면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여왕』과 비슷하나 묘사와 분석의 강렬함은 이를 웃돈다. 사실 이 책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어린 시절 본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영화 속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후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얗게 센 머리에 검은 숄을 두른 채 재판정에 나와 남편과 자신의 아들이 지닌 정당한 권위와 권력을 당당하게 논변하던 급격하게 노인이 되어버린 한 여자의 이미지가 다비드가 그린 너무나도 모욕적인 스케치에 오버랩 되면서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혁명에 대한 내 관점을 압도해 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닌 권리를 지키고자, 또 남편을 지키기 위해, 아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벌인 장엄한 사투가 비루하고 졸렬한 스캔들에 모욕당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츠바이크의 『마리 앙뜨와네트:베르사유의 장미』는 이 물음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제시한다. 모욕당한 어미의 편지와 죽음을 앞둔 여인의 마지막 사랑 고백 앞에서 츠바이크는 전례 없는 어조로 그녀를 변호하고, 그녀를 위해 그만의 장엄한 묘석을 새긴다. 그녀의 남편과 죽음조차 확인하지 못한 아들의 왕좌를 대신 차지한 시동생들이 기요틴에 목이 잘리고 스케치와 그림만으로 회자되는 그녀의 차가운 주검을 콘크리트 묘지 아래 버려두는 동안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말이다.

2008/04/22 20:58 2008/04/22 20:58

스카라무슈

Posted 2008/04/15 10:19, Filed under: Review/Book

돌이켜보면 유치한 노릇이지만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아사다 지로의『칼에 지다』를 읽기 전까지 사토 겐이치가 유쾌하고 발랄한 문장으로 풀어낸 『이인의 검객』을 더 좋아했었다. 달타냥과 시라노 드 벨주락이라는 누구나 알만 한 두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활극소설에 끌렸던 것은 읽는 재미란 것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던 당시의 설익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조금 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삼총사』의 첫 장에 등장하는 달타냥의 아버지가 남긴 '강철 같은 주먹을 유산으로 남겼다.'란 문장에 반했던 소년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프랑스 혁명과 이후의 복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드몽 당테스의 복수극에 미친 듯이 몰입했던 나도 떠오른다. 이런 과거들 때문에『검의 대가』를 읽는 동안 펜싱 마스터들의 검보를 구해서 보고, coup de la mouette라는 『전날의 섬』에 등장하는 살인법에 열광했던 것이 아닐까? 『스카라무슈』를 여는 첫머리로는 다소 뜬금없지만 이런 과거가 없다면 이 소설의 재미가 조금은 반감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을 숨기긴 어렵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카라무슈』는 다채로운 활극소설이다. 작가는 사랑과 증오, 복수와 비밀이란 날줄로 등장인물 사이를 연결하면서 한 시대를 섬세한 태피스트리처럼 그려내고 있다.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the robe, the buskin, the sword라는 삼부로 나뉘는데 각각의 부제는 앙드레 루이라는 주인공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법복을 뜻하는 robe와 배우가 신는 무대용 반장화를 뜻함과 동시에 비극을 의미하는 buskin. 각각의 부제는 변호사로 시작해 스카라무슈를 연기하는 배우로 변신했다가 펜싱 마스터가 되는 주인공의 이력을 꽤 균형있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럼에도 전형적이다. 영어로 쓰였음에도 이 소설은 프랑스 희극적 전통에 충실하다. 오해로 벌어지는 갈등의 증폭, 사랑에 눈이 먼 자신을 숨기기 위한 헛된 복수의 맹세, 출생의 비밀과 복수의 아이러니. 개인적 문제가 사랑의 비극의 실마리가 되고, 이내 가정 비극이 되며, 종국에는 사회 비극이 되어버리는 상황은 『렉스 오디이푸스』이래 어느 이야기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stcck character가 되어버린 스카라무슈라는 코메디아 델아르떼에 등장하는 책략에 능하며 표리부동한 인물(때로는 어리석지만 유쾌한, 과장된 허풍쟁이)을 통해 작가는 주인공 앙드레 루이의 내적 갈등과 외적 갈등. 표현의 괴리와 자조적인 독백을 자연스레 표출시킨 점만큼은 수준급이다.

사실 이 소설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재미다. 누구나 한 번쯤 어떤 제목조차 모른 채 채색필름으로 봤을지 모를 이 소설의 줄거리를 망각하는 재주만 있다면 책장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 통쾌하며, 냉소적이며, 주저함을 모르는 스카라무슈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현대 소설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에 진력이 난 독자에게 좋은 해갈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08/04/15 10:19 2008/04/15 10:19

초콜릿을 만드는 여인들

Posted 2008/04/13 08:13, Filed under: Review/Book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음식을 소재로 다룬 소설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음식의 풍미와 향을 문장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단 한 번도 초콜릿을 먹고 싶다는 느낌을 갖지 않았다. 카카오 열매를 찾아 떠난 수녀들의 이야기라는 전개는 신선한 편이었지만 이마저도 오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진 몽상이 되어버렸다. 사실 이 소설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진행. 불필요한 장면. 필요하지만 억지스러운 장면. 복잡한 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단선적인 캐릭터로 점철된 소설이다. 목적지에서 발견한 수녀와 아기 무덤에 관한 반전은 꽤 좋았지만 전체적인 의견을 번복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앳되다 못해 유치한 어조의 번역과 어설픈 작가의 감성은 소설을 어수룩한 판타지로 만들고 있다. '여자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란 의문의 답을 찾으려면 다른 소설을 읽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2008/04/13 08:13 2008/04/13 08:13

« Previous : 1 : 2 : 3 : 4 : 5 : ... 6 : Next »

Recent Posts

  1. 수상한 라트비아인
  2. Be on leave!
  3. 다시!

Recent Comments

  1. 항상 내게 꾸밈없이 솔직한 사람이... julia 2011
  2. 시간을 넘어 타임머신 같은 글이지... KRADLE 2011
  3.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비밀방문자 2011

Recent Trackbacks

  1. kz의 생각 keizie's me2DAY 2009
  2. 눈뜬 자들의 도시 The note of Legendre 2008

Calendar

«   2012/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Bookmarks

Site Stats

TOTAL 613213 HIT
TODAY 8 HIT
YESTERDAY 106 H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