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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08/17 투기 & 짜릿함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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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4/06/19 컨설팅펌에 대한 단상 (7)
  11. 2004/06/06 경제 위기론에 관하여
  12. 2003/12/06 닷컴

Crude Oil

Posted 2008/05/22 08:23,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유가는 날마다 신기록을 경신 중이고, 이제는 조심스럽게 제3차 오일쇼크의 가능성마저 점쳐지고 있다. 메릴 린치와 바클레이즈, 골드만 삭스의 애널리스트들은 유가가 $200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고 이는 시장에서 선물 가격의 상승을 주도했다. 지난달 읽은 한 기사에는 러시아의 석유생산능력이 처음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고, 소비에트 시절 이후 제대로 된 시설 투자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러시아의 석유산업이 필요로 한 투자의 규모의 방대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화요일 FT에는 WTI가 $126에 접근한 기념으로 Peak olilist와 Non-peak olilist들의 의견을 정리한 분석 기사가 게재되었다.

사실 두 진영이 주장하는 바는 mb/d로 측정되는 석유생산능력이다. 과거 논의의 핵심을 이루던 가채년수는 양 진영에서 논의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 셸의 지정학자인 휴버트가 1950년대 처음으로 Peak oil이론을 주장한 이래 석유의 생산능력은 꾸준하게 늘어났고, 채굴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유전의 탐사는 늘어나는 석유생산에도 가채년수를 꾸준히 유지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논의에서 중요한 사항은 지난 20년 동안 새롭게 탐사 된 대형 유전이 드물다는 사실과 오늘날 석유 생산의 절대량이 오래전에 탐사된 대형유전에 의존하는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며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유전의 개발이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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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문제의 핵심은 1980년대의 예측이 틀렸다는 데 있다. 80년대의 그 누구도 중국이 세계경제로 편입되어 세계의 공장이 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으며, 인도의 부상 역시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마오의 중국과 인디라의 인도가 소비에트 출신의 경제학자들을 영입해 만들어 낸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오늘날 워런 버핏을 능가하는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다.) 80년대 내내 유가는 이따금 요동을 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고,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도 비록 절대 가격으로는 상승했지만 오일 쇼크 당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유지했다.

이는 신규 투자를 망설이게 하었고, 정치적 혼란과 왕정의 독재, 소련과 철의 장막의 붕괴는 과거 정부가 주도하던 개발과 신규 투자를 백지화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가는 개발되지 않은 유전을 두고 후세에게 물려주어야 할 선물이라고 표현하곤 했지만 몇 년 전까지 그 말이 단지 수사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신규 투자나 탐사가 지출은 늘리면서도 공급 과다라는 인상을 시장에 주어 석유 가격 하락시켜 왕실의 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별도의 대규모 설비 투자나 신규 탐사 없이도 생산량은 꾸준하게 늘어났고 이머징 마켓의 수요증가는 생산증가로 이어지면서 힘들이지 않고도 쉽게 에너지 산업을 통해 넉넉한 재정을 유지하게 해주는 요술램프 역할을 톡특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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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기사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은 점차 말라가는 지도 모르며(사우디의 석유 생산은 북한의 핵만큼이나 외부에서 진실을 알기 어렵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서둘러 새로운 유전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게다가 미래의 가장 유망한 석유매장지역인 오리노코 벨트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 때문에 개발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Peak oilist들이 부정적인 전망을 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Non-Peak oilist들은 수평채굴기술이나 심해채굴기술의 발전을 고려하면 석유 생산량의 고점은 아직 멀다고 한다. 하지만, 고점이 멀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점이 먼 만큼 이머징 마켓에서의 수요도 덩달아 늘어난다면 고점이 멀었다는 사실은 현재의 석유 가격 추세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아도 중립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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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느 쪽이 옳으냐는 석유를 생산하지 못하는 나라로서 4번째로 가장 많이 석유를 수입하는 우리로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투자 문제와  탐사의 비효율성에 대하여 유리가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정부 처지에서는 석유생산이 고점에 이르렀던, 이르지 못했든 간에 2.3Mb/d에 이르는 수요에 걸맞은 공급처를 찾아야 하는 절대 명제를 해결해야하고 고유가 시대에 걸맞은 경제구조와 생활습관을 체화시켜야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유전은 디트로이트 아래 묻혀 있다고 한다. 자동차산업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발전으로도 석유소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시장의 힘과 인간의 창의력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더라도 난 인간을 믿고 싶다. 상업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의 유전을 갖지 못한 우리로서는 어느 날 갑자기 2.3Mb/d에 이르는 대형유전이 한반도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믿기보다는 인간이 지닌 교묘함과 위기를 이겨내는 맹렬함을 믿는 것이 보다 현실적일 테니 말이다.
2008/05/22 08:23 2008/05/22 08:23

Turmoil in the uncertain world

Posted 2008/01/15 15:12,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The matter of structured investment business
그린스펀의 FRB 의장직 임기 말에 터져 나왔던 논쟁 가운데 가장 뜨거웠던 논란은 부동산 버블이 2006년 하반기에 붕괴할 것이라는 크루그먼의 독설과 endless booming을 믿는 듯한 그린스펀의 다소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장기간에 걸친 저금리 정책이 결국 부동산 버블을 키웠고, 인플레이션을 부추겼으며, 경기의 연착륙을 위해서는 FRB의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묵살된 채 새로운 의장이 취임했다.

사실 논란 이후 1년 동안 벌어진 상황 전개로만 보면 크루그먼의 예언은 틀렸다. 부동산 시장의 버블은 붕괴가 아니라 서서히 침체에 접어 들었으며 FRB의 정책 기조도 인플레이션 억제로 변할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이름마저 생소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학을 다니면서 2007년 이전에 이 종류의 상품을 교과서에서 본 것은 고작 네 번에 지나지 않았다. 파이 그래프에서 차지하는 위상으로 보자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상품만한 상품. 평생 교과서 밖에서는 실제로 접할 기회조차 없을 것으로 믿어졌던 상품이 2007년 하반기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서브-프라임 시장의 붕괴가 아니라 structured investment business 그 자체에 있다. 이미 90년대 LTCM이 붕괴할 때 structured investment business의 취약점은 뚜렷하게 노출되었다. 한 투자가의 포트폴리오에 포함된 structured asset이 다른 투자가의 포트폴리오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다양한 파생상품이 흘러 넘치는 금융 시스템으로써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다시 말해 거래의 안정성은 쌍방 모두 거래를 청산할 의사와 실행력을 보유하고 있을 때에만 보장받을 수 있다. 상품 구조의 복잡성은 하나의 상품이 다수의 다른 상품과 결합됨으로써 보통의 위험을 감소시키는 반면 포트폴리오 붕괴시 시장 비청산의 위험을 극도로 높인다)

결국, LTCM 사태 때는 뉴욕의 FRB의 주도하에 월스트리트의 메이저 플레이어들이 긴급구제금융을 실시함으로써 포트폴리오의 동반 붕괴를 막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그런 과단성 있는 결정을 할 인물이 없었다. 쉬쉬하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 붕괴의 여파를 축소하는 동안 이와 연관을 맺은 다양한 structured asset product의 손실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사실 이 시점에서 포트폴리오 자체가 붕괴하었는지 이번 주의 구제금융으로 포트폴리오의 붕괴를 막았는지는 실적 발표가 나와봐야 확실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약 이번 구제금융이 포트폴리오 붕괴를 막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계속된 연타로 시작된 대출혈을 막으려고 투입된 자금이라면 structured investment business의 붕괴로 말미암은 금융 혼란은 비극의 서막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SGA와 Northern Rock,  UBS등의 유럽계 은행마저 월가의 4/4분기 실적발표 이후 엄청난 손실이 예측되고 있는 참이다)

역사는 교훈적인 동시에 반복적이다. 스티걸-글래스법이 존재하던 시기. 상업은행은 저축대부조합 파동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반면 상업은행이 붕괴하는 동안 투자은행의 제2의 전성시대가 도래했고 결국 스티걸-글래스법의 사문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날 부동산 상품에structured된 투자 포트폴리오로 쏠쏠한 재미를 봤던 투자은행은 호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세상은 돌고 돈다.

The fantasy of emerging market
랜덤워크 마피아로서는 참 명목 없는 소견이지만 1700선 후반의 주가는 근시일에 1600선이 무너질 것 같다. 1700선 초반에서 환매 시점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하겠지만 증권사는 저가매수의 호기라든지, 장기투자의 관점을 운운하며 환매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할 것이다. 이머징 마켓은 미국이나 유럽 시장과 디커플링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소개와 함께 말이다. 아마도 인도 시장을 가장 좋은 예로 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기관 투자가를 중심으로 외국인 매도를 떠받칠 것이다.

하지만, 심리적 저지선인 1700은 급격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바젤2 협약의 기준을 맞추고자 배당이 높으며 안정성이 높은 알짜배기 자산을 제외한 나머지 투자를 청산하거나, 포트폴리오의 붕괴를 막기 위해, 혹은 1/4분기의 실적 개선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글로벌 IB들은 2007년 동안 이머징 마켓에서 거두어들인 수익을 실현할 필요에 쫓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FTSE의 붕괴(DJI나 S&P500이 아니다)로 시장이 패닉에 빠질 경우 디커플링 경향의 강화라는 사탕발림은 정말 재미없는 농담이 되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가장 나은 방법은 외국인 매도세를 끝까지 막아낼 지속적인 자금투입이겠지만 이 방법으로는 현상 유지는 가능해도 수익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개인의 처지에서 보자면 깨끗이 손을 털고 나오는 것만이 10%의 손실이 반쪽 펀드로 이어지는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뭐 하지만 내 주변에야 간당간당한 월급 통장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이 대다수이니 그리 걱정할 바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The serious problem: Raising price of the commodity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금융자산 붕괴로 말미암은 내수 시장의 위축 가능성도 중요하겠지만 소리 없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는 농작물 가격이야말로 정부차원에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콩과 밀, 옥수수. 커피 모두 25년이래 최고 가격을 기록했다.(이젠 감히 '로부스타같은 쓰레기 원두'라는 표현을 쓸 수 없는 수준이다) 이는 밀가루와 사료. 과자류(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두부까지)등의 직접적인 가격 상승을 유발할 것이 분명하고, 이는 다시 육류의 전반적인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것이 확실하다. 전자 제품의 실질적인 가격하락과 공공 부문의 빗장이 오랫동안 감추어두고 있던 물가 정책의 실패는 이번 상승으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는 서민 경제의 직격탄을 날릴 것이 분명하다.

펀드에 여유 자금을 굴리는 사람들의 문제는 시장에 맡겨 놓아도 된다. 하지만, 자장면과 칼국수, 학교 식당을 애용하는 나 같은 가난한 학생이 느끼는 체감 물가는 끔찍한 고통이 될 것이 분명하다. 더욱 나쁜 사실은 이런 경향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이라는 데 있다. 식량 자원을 삼키는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버린 중국. 미국 농업 시장의 판로가 식량 공급에서 바이오에너지 공급 등으로 다변화된 여파.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기상 이변은 올해에도, 내년에도 계속될 장기적인 추세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거참 걱정이다. 두부와 짜장면을 돌려 달라!

2008/01/15 15:12 2008/01/15 15:12

바나나 전쟁

Posted 2005/03/29 07:21,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크루그먼씨의 국제경제학을 읽다가 <바나나 전쟁>과 조우했다. WTO 체제의 출범 이후 미국과 유럽의 대표적인 무역 분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과 마주칠 때마다 난 학교에 입학조차 못했던 먼 옛날로 되돌아가곤 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와 난 시장을 걷고 있었고, 그날 따라 난 바나나 노상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네쪽들이 한 묶음에 3천원이라는 중량당 가격으로는 쇠고기보다 비쌀 그 과일이 무척이나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결국 난 아버지를 졸라 획득한 전리품이 담긴 종이봉투를 의기양양하게 집어 들었다.

하지만 수십 미터도 가지 못해 사단이 벌어졌다. 껍질을 벗기던 바나나가 땅에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바나나의 가치를 모르지 않던 난 시장 바닥에 떨어진 바나나를 얼른 주어 들려 했다. 어린 아이가 먹을 것을 탐하는 마음에서 가 아니라 비싼 과일이 아까워서 였다. 아버지는 조용히 땅에 떨어져 더럽혀진 과일을 먹어야 할 정도로 우리가 형편없지 않으며 바나나의 가치가 아무리 높다 한들 자부심보다 높은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지만 난 말뜻을 알아 들었고 정말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나쳤다.

사실 바나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도 바나나가 듬뿍 나오는 과일 안주를 만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이 가게주인의 손이 크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물론 그런 무의식적인 호의는 오래지 않아 바나나는 더 이상 절대 비싼 과일이 아니라는 현실적 판단에 덧칠을 당하고 말지만, 그럼에도 레드망고에 갈 때면 바나나 토핑을 얹어야 포만감이 드는 바나나에 대한 심리적 허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내가 느끼는 바나나에 대한 허기는 나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철의 장막 안에 속해 있었던 구동독인들에게 바나나란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들에게 바나나는 당간부들에게나 허락된 중남미의 사치품이었고 통일 이후 시장에 공급된 바나나는 어느 순간 정치적 재화로 그 위상을 높였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미국과 유럽간의 바나나 전쟁이 있기 전에 독일과 영국 프랑스 사이에서는 바나나 전쟁의 전초전이 벌어졌다.

카리브해의 식민지 사회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식민지산 바나나를 보호하기 위해 저렴한 중남미산 바나나에 고율의 관세를 물렸고(정확하게는 수입할당제), 독일에서는 정치적 재화로 변한 바나나의 시장 가격을 최대한 저렴하게 유지함으로써 구 동독인들의 마음을 달래야 할 정치적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영국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전초전은 관세동맹(유럽의 바나나 의정서)을 앞세운 프랑스와 영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미국과의 바나나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패배로 결론이 났다. 결국 오늘날의 구 동독인들은 우르과이 라운드의 타결 이후 우리가 저렴한 바나나를 먹게 된 것처럼 가장 싼 값에 마음껏 자유의 선물을 향유하게 되었다.

사실 바나나 전쟁은 무역론이나 국제경제론의 작은 글상자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그리 크게 주목 받은 사건은 아니다. 하지만 한때 쇠고기보다 비쌌던 바나나의 가격과 오렌지와 메론, 파인애플과 키위에 대한 동경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누가 뭐래도 난 생크림 케익 위에 올려져 있던 이국적인 과일이 선사하던 풍요로움을 상상하며 생일을 맞던 세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기억만큼이나 자유주의 무역과 경쟁 체제가 가져다 준 선물을 늘어가는 생일 케이크의 촛대만큼이나 분명하게 느끼며 성장했다.

오늘날은 내가 시장 바닥에 떨어트린 바나나로 고민했던 그 시기에 비하자면 분명 많은 의미에서 자유화되었다. 하지만 자유화의 선물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고마워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무역의 자유화가 낳은 많은 이점들은 정치적 이유로, 혹은 사회적인 이유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 무역의 자유와 경쟁 체계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던 쾌락을 기억하고 그것을 하나의 신념으로 받아들인 나 같은 사람은 오히려 별종이 되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사람들은 자유화가 가져 다 준 쾌락을 넘어서 또 다른 가치들에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소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과 쾌락의 이면을 뒷받침하는 것은 여전히 경쟁 시스템과 무역의 자유화이다. 우리가 기억하던, 기억하지 못하던.
2005/03/29 07:21 2005/03/29 07:21

Financial...

Posted 2005/01/21 08:06,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오늘날 금융업은 가장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산업 가운데 하나다. 아니 빠른 움직임만큼이나 흥미로운 관찰 거리를 풍부하게 제공해주는 대상이기도 하다. 환전상의 탁자에서 시작된 금융업은(혹은 징세업자-푸블리카누스-의 입찰에서 시작되었다는 관점도 있긴 하지만) 오늘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산업이 되어버렸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 산업 사회는 자본의 사회이고 자본이 낳은 적자는 금융 산업뿐이라고 해도 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본의 적자인 금융 산업은 어떤 자식들을 낳았을까? 불과 10년전까지만 하더라도 금융 산업은 많은 자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보험업, 상업 은행, 투자 은행, 투자 운용, 증권사 등. 하지만 어느 시기부터인가 금융 산업은 왕좌를 빼앗길 거라는 예언을 받은 크로노스처럼 자식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지난 십년 동안 인수와 합병은 광범한 범위에서 이루어졌고 90년대 초반에 존재했던 기업을 찾기 위해서는 현생 인류의 게통도보다 배는 복잡한 도표가 필요하다. 아니 왠만한 전문가가 아닌 이상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복잡해진 기업의 이름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여의치 않다.

아니 여의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어렵다. 불과 십년 전에 출간 된 목록에 존재했던 financial corp.의 반은 오늘날 흔적조차 없다. 기업 수준이 아니라 영업 부문까지 시야를 넓혀보면 복잡함은 배가 된다. 기업은 버젓이 살아 있지만 영업 부문을 팔아 넘기거나 인수함으로써 내용이 달라진 기업들이 도처에서 출몰하기 때문이다.

체급 올리기 혹은 몸집 키우기
하지만 이런 복잡한 움직임에도 일정한 법칙은 있다. 일견 복잡계처럼 보이는 금융 산업에도 고전 물리학의 F=ma나 F=μmg 필적할 만한 법칙이 있다. 쉽게 말해 기업들의 이런 움직임은 복싱에서 체급 불리기와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체급이 더 나갈수록 펀치의 세기가 강해지며 맷집도 좋아진다. Financial corp.들이 M&A를 통해 규모를 늘리는 것도 알고 보면 공격력과 맷집을 강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고육지책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Financial Corp.들에게 이런 고육지책을 강요했을까?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이기고,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을 제압한다]란 말이 있다. 비즈니스 영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법칙가운데 하나인데 금융 산업에서만큼은 이 법칙의 절반 밖에 통하지 않는다. 빠른 것은 좋지만 가벼운 것은 적에게 제압당하기 딱 좋다. 설령 제압당하지 않더라도 경기 변동이란 거센 폭풍우 속에서 가벼운 것은 쓸려가기 십상이다.

사실 꽤나 오랫동안 다시 말해 스티걸-글래스 법이 미국의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를 규정한 반세기동안 금융 산업은 평화를 만끽했다. 다소간의 경기에 따른 변화는 있었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당시의 진폭은 웃어 넘길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주택 채권과 관련된 상업 은행의 대몰락 이후 달라졌다.

상업 은행은 그 동안 짭짤한 수입을 올렸던 주택 채권 시장의 위험성을 다시 평가했고, 주택 채권 시장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상업은행의 주력 부문인 소비금융만으로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업 은행과 투자 은행의 분리에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 슬금슬금 무너지던 양자간의 경계는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사라져 갔다. 신경제의 버블과 함께 투자 은행은 두둑한 수익을 거두었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시장에 접근한 상업 은행들도 적잖은 수익을 챙겼다.

하지만 버블이 붕괴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몸집이 아닌 빠르기로 승부를 걸었던 투자 은행들은 손실을 견딜 맷집이 부족했고 투자 은행에 맷집(다시 말해 여신)을 지원했던 상업 은행들도 투자 은행들의 도산과 함께 쓰라린 손실을 보았다. 투자 은행은 기업금융 혹은 투자 금융이 높은 수익을 보장하긴 하지만 그만큼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했고, 경기 변동에 따른 진폭을 견디기 위해서는 소비 금융이란 안전판을 보유할 필요성을 느꼈다.

상업 은행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수익성에 대한 주주들의 압력이 증가하면서 공격적인 경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여신 지원 같은 간접 투자 방식이 아니라 위험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직접 투자 방식을 고려하게 되었다. 무차별적인 몸집 불리기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다각화와 대형화가 은행의 핵심 전략
우리 나라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상업 은행과 투자 은행의 분리 대신에 소비 금융과 기업 금융을 전문으로 하는 형식이 아닌 내용의 차이가 존재하는 은행들이 있었고 이들은 최근 10년 동안의 외환 위기와 경기 후퇴를 경험하면서 현실에 눈을 떴다. 막대한 부실 채권으로 은행들이 무너지는 상황을 보면서, 또 기업 금융보다는 소비 금융을 전문으로 했던 은행들의 높은 수익성과 건재를 보면서 은행들은 가계 금융이란 맷집을 키우기로 전략을 변경했다.

국민 은행과 장기신용은행의 M&A이후 은행들은 인수와 합병을 통한 몸집 불리기에 열을 올렸다. M&A를 통해 고객에게 전방위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모토와 다르게 은행권의 속내는 경기 진폭을 막아줄 맷집과 수익성을 동시에 노리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다시 말해 다각화와 대형화만이 살 길이라는 데 시중 은행들의 이해가 모아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비롯된다. 이런 상황 인식은 충분한데 실행 방법에는 걸림돌이 많다. 다각화와 대형화가 대세인 것은 알지만 M&A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정책과 관행, 타성적인 조직이 문제다.

정책과 관행, 타성적 조직의 삼중고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은행간의 M&A를 가로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공적 자금이다. 독자 생존이 가능할 만큼 체질이 강한 은행, 다른 은행을 인수할 만한 능력을 갖춘 은행은 지난 몇 년간의 활발한 통합에도 불구하고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이 인수할 만한 대상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정부가 대주주로 남아 있는 부실 은행들을 인수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공적 자금의 투입은 시장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선택에 가깝고, 정부 입장에서는 시장보다는 정치 논리나 여론의 향배에 관심을 기울 수 밖에 없다. 사실 이것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공적 자금 투입 은행의 처리 문제에서 명백하게 들어 난다. 이른바 부실 은행의 처리 문제에 있어서 일관된 원칙이 존재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대처했을 뿐이다.

이런 예측불가능성은 국내 은행에 의한 M&A 가능성을 낮춘다. 정치적 사안으로 다루어지는 은행 문제에서 시장 지향적인 협상력을 가지고 M&A를 성사시킬 수 있는 국내 은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공적 자금 투입 은행의 처리 문제가 정치적 사안으로 다루어지는 이상 정부의 협상력도 국내 은행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협상력을 이용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업은 국외 자본 뿐이다.

두 번째 문제는 관행이다. 모든 산업이 정부의 정책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날 일반론에 가깝다. 하지만 금융 산업의 경우 이런 일반론은 다른 산업에 비해 특수화된 일반론에 가깝다. 정책에 영향을 받을 뿐더러 다른 산업에 비해서도 더욱 크게 받는다. 정부는 법령이외에도 각종 금융감독기관을 통해 금융 산업에 폭 넓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근래 들어 정부는 관치금융이란 오명을 벗으려 노력 중이기는 하지만 관행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은행장 인선에서 아직도 정부의 입김은 무시 못할 정도로 강하며, 은행의 주주권은 걸핏하면 무시 받기 일수다.

금융과 일반 산업, 소유와 지배의 분리라는 원칙은 명백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정책 안에 내재되어 있다. 해마다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는다는 정부 정책의 메인 프레임이 변했던 적은 한번도 없다. [근본적인 대책]이 반창고 수준 이상으로 올라갔던 적도 없다. 굳어진 메인 프레임은 관행을 고착화 시키고 변화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사실 현재의 메인 프레임으로는 지금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도 없다.(금융지주회사법은 메임 프레임의 구조 변경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내재된 원칙은 그대로다) 하지만 여전히 정책은 현재의 메임 프레임을 유지하고, 보완하려는 대책에 지나지 않는다. 변화하는 금융 산업의 흐름에 어울릴 만한 원칙의 변경은 여전히 요원한 일로 보인다.

마지막 문제는 은행 내부의 타성적인 조직 문화다. 전통적으로 은행 조직은 보수적이고 신중한 문화를 유지했다. 게다가 각 은행에 따라 고유한 조직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외부인에 대한 벽이 두터웠다. 이런 은행 내부에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조직을 개편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위계 서열과 지점망을 중심으로 성장한 조직 문화와 영업 전략은 사업 부문 단위로 광역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

사실 오늘의 은행이 M&A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어려운 이면에는 내부의 조직 문제와 외부의 조직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 내부의 지점망과 사업 부문의 조직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이 첫번째 이고, 두 번째는 서로 이질적인 조직 문화에서 성장한 구성원들 모두가 수긍할만한 원칙을 세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은행권의 보수적인 인사시스템은 순혈주의 인사 원칙을 오랫동안 유지했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의 은행 시스템은 기업 금융의 위험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예치고객을 늘리면 수익이 늘어나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인력은 다각화와 대형화를 위한 M&A를 성사시킬 전략과 조직 문화의 전문가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은행 문화는 이런 인력들을 내부 시스템에서 키워낼 역동성이 항상 부족했다.

명백하면서도 실존하는 위협
벽두에 있는 SCB의 제일은행 인수 이후 외국계 Financial Corp.와 시중 은행간의 경쟁은 인구에 명백하고도 실존하는 위협으로 떠올랐다. 은행들은 신년사에서 공격 경영과 몸집 불리기를 경쟁적으로 외치고 있다. 하지만 표어와 다르게 올해 안에 시중 은행간의 인수합병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시중 은행에게는 표어를 현실화 시킬 인력과 자원이 없다. 지금의 시중 은행은 숨 고르기가 아직 덜 끝난 상황이다. 적어도 올 하반기에 이르러야 겨우 숨 고르기를 끝내고 확장으로 눈을 돌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숨 고르기가 끝나도 상황은 국내 시중 은행들에게 유리하게 흐를 것 같지는 않다. 명백하면서도 실존하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책과 관행, 조직의 삼중고를 극복해야 하는데 이들을 극복하고 외국계 은행과 맞붙을 무렵이면 이미 경쟁은 극도로 심화될 것이다. 평범한 소비자 입장에서는 외국계 은행의 진출로 고금리와 낮은 수수료라는 호재를 누릴 수 있겠지만 은행의 수익성은 악화될 것이고, 지금껏 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기업의 고급 정보도 외국계 Financial Corp.에 손쉽게 유출될 것이다.

게다가 이 싸움의 끝에 공존은 없다. 공존을 위해서는 금융 시장의 과점화가 용인되어야 하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 무한 경쟁을 허용하면 국내 은행은 존폐를 보장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선진 자본 시장과의 밀접한 동조화는 경기 변동성의 낙폭을 증가시킬 것임이 분명하다. 이래 저래 상황은 어렵다. 하지만 해법은 찾는 것은 상황보다 더 어렵다.

P.S.

2005/01/21 08:06 2005/01/21 08:06

Gresham's & Goldsmith's

Posted 2004/11/04 00:49,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국사 문제집을 풀다가 려말 권문세족들이 교초 때문에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는 지문을 읽었다. 원조가 주원장에 의해 외몽고 지방으로 쫓겨나면서 유동성의 상당 부분을 교초에 의존하던 권문세족의 자본 유동성이 악화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재작년에 써놓았던 [그레셤의 법칙]이 떠올랐다. 어째서 잇속에 밝은 권문세족들이 그레셤의 법칙을 몰랐을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그레셤의 법칙


동양의 지폐나 서양의 지폐나 기본적으로는 청구권을 보장하는 증서에서 비롯되었다. 금태환이던 은태환이던 지폐는 실물 화폐로의 교환을 인정하는 증서다. 실제로 지폐의 역사는 상당 부분 상업 어음의 역사와 겹친다. 그런데 동양의 지폐와 서양의 지폐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다.

일직부터 중앙 전제왕권의 통제 아래 있던 전매권이 청구권에 대한 반대 급부로 제공되던 동양에서는(소금과 철이 가장 대표적인 품목이었다. 국가가 필요로 한 병장기와 군량을 제공하고 이에 대한 급부로 염전이나 광석에 대한 권리를 제공했다) 왕조의 부침에 따라 지폐와 귀금속이 그레셤의 법칙을 따라 바쁘게 움직였고, 전장을 통한 상업 어름 거래와 중앙 정부에 의한 지폐 발행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근대적 은행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뒤졌다.

(사실 세계 무역에서 중국은 오랫동안 사치품의 최대 수출국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중국의 귀금속 유입은 아편 전쟁 이전까지는 풍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물 대신 은화가 조세 부과의 표준 화폐로 유통되었을 정도로 중국 경제권의 귀금속 유입량은 풍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저장성은 탁월하지만 수익률은 낮은 귀금속보다는 지폐가 모험적인 상인들에게는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반면 서양은 환전상의 탁자에서 시작된 환전 은행이 골드스미스의 노트를 거쳐 대체은행으로 발전했고, 종국에는 근대적은 은행을 낳았다. 개별 국가의 금속 화폐 발행은 전시대를 통틀어 꾸준하게 이루어졌지만 청구권을 지닌 지폐의 발행은 금융 귀족으로 불리는 소수의 가문이나, 상인 길드를 통해 이루어졌다. 상업 어음과 지폐의 발행이 일원화 되었던 셈이다.

은행의 기원. 골드스미스의 노트


하지만 동아시아의 국제 무역과 그레셤의 법칙은, 아니 국제 무역과 은행의 발전 과정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진화했다. 다시 교초로 돌아가자.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시작될 무렵 고려에 들어온 교초는 오래지 않아 고려의 고액 지폐로 자리 잡았다. 원나라와의 외교 사절의 접대비와 군사비 명목으로 유통되던 교초는 중국에서는 날이갈수록 실질 가치가 하락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고려에서는 통화로서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화폐의 명목 가치가 실질 가치를 앞선 그레셤의 법칙의 예외가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이 있다. 귄문세족에게는 경제적 실질 가치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명목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영미식 커리큘럼으로 경영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내가 고려 시대의 교초의 가치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지폐에는 묘한 성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공무역과 관련된 실제 가치와 명목 가치의 괴리다. 서구인이 무역의 합리성이라 부르는 등가성의 원칙이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잡기 전에 동아시아의 무역 원칙으로 자리잡은 것은 실질 가치보다 명목 가치였다. 조공 무역을 통해 받쳐지는 진상품과 하사되는 하사품들은 실질 가치보다 더 큰 명목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왕조의 통치력이 안정되어 있을 경우 하사품으로 받은 지폐는 곧바로 시장에서 지불 화폐로 사용되었다. 왕조의 통치력이 불안해 하사받은 지폐의 가치가 시장에서 낮게 평가 받을 경우에는 본국으로 가져와 경제적 가치 대신 정치적 명목 가치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데 상대 가치를 중심으로는 본 측면에서는 그레셤의 법칙이 충실하게 지켜졌지만 화폐 자체로 본 그레셤의 법칙에는 예외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무역 관행은 어느 나라에도 괴멸적인 피해를 주지 않은 채 오랫동안 동아시아 경제권을 묶는 가교 역할을 했다. 오늘날의 영미식 스탠다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지만 적어도 몇세기 전의 서구가 주장하던 등가성의 원칙은 등가성을 유지하기 위한 폭력과 유혈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다. 실질 가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공정 무역에서 이익을 얻는 방법은 어느 한쪽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 명목 가치와 실질 가치를 구분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동아시아의 무역 관행과 비교하자면 제로섬 게임이 분명하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 무역의 표준 양식이 된 서구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모든 법칙에는 본질이 있고 상황에 따른 예외가 있는 법이다. 또한 예외 속에서도 본질은 살아 숨쉰다. 그레셤의 법칙과 골드스미스의 원리는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나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행동의 동기를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설명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행동이 구체화되는 방식은 문화와 관습,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화된 행동을 그 시대 사람들이 추구하던 가치를 모르는 현대인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다. 그것이 사실의 문제가 아닌 가치의 문제일 경우에는 말이다.

아무튼 권문세족은 교초의 태환 정지로 유동성을 잃고 역사에서 퇴장했고, 현대는 조공무역을 봉건 관습으로 취급해 버리는 서구의 등가성 원리(물론 여기에 비교우워론과 자유무역의 이점이라는 현대적 이론이 첨삭되긴 했다.)에 지배 당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머리 속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이제는 낯설어진 옛날을 산책하는 것은 꽤나 운치있는 일이다. 레이 황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역사에는 그것이 등장할 만한 필연적인 흐름이 있으니 말이다.
2004/11/04 00:49 2004/11/04 00:49

확장 재정정책의 우울한 그림자

Posted 2004/09/08 13:52,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정부는 다음 회계연도에서 적극적인 재정 확장 정책을 기조로 하는 일련의 예산을 발표했다. 아직까지는 국가 채무 상태가 양호하고 연관 효과가 높은 건설업을 위주로 재정 확장 정책이 수행되기 때문에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리라는 의견과 원유 및 각종 원자재 가격 상승한 상황에서의 확장 정책은 물가에 압박을 가할 뿐, 소비 심리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사실 이런 의견 대립에서 각자가 논거로 삼는 이유들은 모두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확장 재정 정책의 찬반자들 모두 이론적 모델로서는 흠잡을 때 없이 완벽하고 타당한 설명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리를 중요하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반대자들의 의견이 더욱 솔깃하다. 이대로 가면 스태그플레이션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때 늦은 확장 정책
만약 작년에 정부가 확장 정책을 사용하기로 발표했더라면 아마 난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정책을 최선의 정책으로 삼는 정부보다는 어느쪽으로든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정부가 좋은 정부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올 1/4분기까지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확장 정책은 너무 위험하다.

사실 작년 말과 올해 초 한국 경제가 가진 문제점은 구심점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정부와 기업, 민간의 신뢰 관계는 위험수준으로 떨어지는 상황이었고, 정책은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적인 정책이던, 진보적인 정책이던 일관된 정책을 발표한다는 사실은 신뢰성과 방향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마 작년에 재정 확장 정책이 예고 되었더라면 사람들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지만 경기 낙관론에 동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작년과 조금 다르다. 현재의 신뢰 관계는 위험 수준보다 한참 아래다. 올 초 발표된 정부의 경기 낙관론이 근거 없는 낙천주의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상황이고 현재의 재정 확장 정책은 DJ시대의 확장책과 다르게 경기 전망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가에 대한 자기 실현적 예언
사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부분이다. 정부가 확장 정책을 펴도 사람들은 실질적인 경기가 상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업자가 줄어든다거나 소비의 활성화는 어렵지만 과도한 통화 공급의 증가로 물가는 상승하리라고 내다본다, 원자재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이 최종산출물의 가격 상승을 주도하리라는 두려움. 이것은 스태그플레이션을 가장 확실하게 가져오는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되고 만다.

정책보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 속임수란 말이 있다. 실제 정책을 집행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심리적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면 정책을 실제로 집행하지 않아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성이 중요하다.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정부의 정책을 신뢰할 수 없다면, 더욱이 못 믿는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의 상황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 믿는다면 심리적 환상을 의도와는 정반대 반향으로 향하고 만다. 현재 우리의 상태가 이렇고 어떤 정책을 내놓던 간에 정책의 외부 효과가 클 것이란 전망을 뒷받침 하는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소득세 1%인하 이면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조세부담률이 해마다 늘어나면서 가계의 조세저항도 점점 커지고 있다. 지자체의 세외 수입의 연체률은 연체률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이고, 지방세나 국세의 체납률로 덩달아 올라가고 있다. 조세라는 지출 재원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의 재정 확장 정책은 필연적으로 국채의 발행으로 매울 수 밖에 없다. 소국개방형 경제 체계를 지향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과도한 국채 발행은 다양한 경제적 효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이중에서 현재 우리 경제에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정부는 확장정책에 이어 조세 감면 정책까지 추진하고 있다. 소득세의 1%인하 방안. 사실상 고소득층의 소비 증진을 겨냥한 정책이다.(고소득층에는 높은 한계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정률의 감세안이 선택될 경우 절세폭이 더욱 크다) 특소세의 인하 또는 면세 정책도 동일한 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가처분소득을 늘린다고 해도 소비의 활성화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일반적으로 고소득층일수록 경제 정책에 민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감한 만큼 자주 번복되는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안감도 크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감세 정책에 덜컥 소비를 늘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게다가 직접적으로 소비를 늘리지 않아도 물가 상승에 의해 소비지출액이 늘어난다면 감세 정책은 내수 진작 정책으로는 낙제감이다. 게다가 이 경우 절세폭이 작은 중산층 가계는 상대적으로 더 불평등하게 된다.

디노미네이션
개인적으로 난 디노미네이션에 대한 논의 자체는 반대하지는 않지만 시기 상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디노미네이션은 심리적인 영역에서만큼은 물가가 하락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준다. 종래의 화폐 단위보다 작은 단위의 화폐로도 구매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노미네이션은 실제 물가를 올린다. 고액의 화폐 단위에서 세분화 되어있던 제품 가격이 디노미네이션 과정에서 상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액권 발행은 어떨까? 고액권 발행은 일반적으로 화폐의 유통 속도를 증가시키는 작용을 한다. 소비의 편의성을 높이고 이것은 상품 소비를 늘린다. 물가 상승이라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디노미네이션만큼 높은 메뉴 비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액권 발행은 충분한 논의를 거쳤기에 도입의 거부감이 크지 않지만 디노미네이션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다.

사실 디노미네이션의 또 다른 표현은 화폐 개혁이다. 화폐 개혁은 장롱 예금을 활성화 시키는 수단으로 혹은 재정 적자나 부채를 평가 절하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다. 하지만 효과가 확실한 만큼 부작용과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좀처럼 시행되지 않았던 제도다.

그런데 문제의 현재 우리의 상황이다. 현재의 경제 시스템이 화폐 개혁이 필요할 정도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 없이 단지 달러나, 유로에 비해 화폐 단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경제의 불안정성이 너무 크다. 평화로운 시기, 안정된 경제 상황에서 채택해도 많은 비용과 혼란을 감수해야 하는 정책을 요즘처럼 경제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큰 시기에 성급하게 도입하려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신뢰성이다
정책의 성공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성이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좀처럼 지켜지지 않은 원칙인데 현재의 정부는 신뢰성에서 만큼은 낙제다. 일관성 없는 정책. 상황에 따라 바뀌는 정도를 넘어 오늘의 정책이 다음 분기에 유지될지조차 불분명하다.

해외의 유명 이코노미스트들은 한국의 경기 침제가 일본의 90년대처럼 극심한 불황으로 점철되지 않겠지만 현재의 침체 상태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 예측한다. 무언가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이 나타나 경제를 견인하지 않는 한 장기 침체를 피하기란 어렵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기도 어렵지만 설령 적절한 패러다임이 나타나도 요즘 같은 엇박자 상황에서는 효율적인 시스템 재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경제나 정치나 인간 관계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이해가 얼마나 맞아 떨어지느냐가 아니라 상대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신뢰성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 채 무리한 정책 남발로 자충수를 두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혹은 내일까지…
2004/09/08 13:52 2004/09/08 13:52

투기 & 짜릿함

Posted 2004/08/17 23:24,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 총리였던 클레망소는 노쇠한 몸에도 불구하고 총탄이 날아다니는 최전방 전선을 시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보고 현장 감각을 중요시하는 정치인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방을 시찰하는 클레망소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즐거웠다는 사실과 군사협력 문제로 프랑스를 찾은 젊은 처칠에게 그가 속삭였다는 「이 얼마나 짜릿한가!(Quel comment deliceux!」를 위의 일화에 끼워 넣고 보면 의외의 모습이 드러난다. 정치인으로써 많은 격랑 겪은 그조차도 남몰래 전쟁이 주는 짜릿함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짜릿함이란 감정은 무엇일까? 증시가 예상외로 많이 오른 날 증권 객장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짜릿함의 정체에 관하여 어느 정도 감을 잡을 것이다. 자신이 투자한 종목이 상한가를 쳤을 때 혈관 속을 타고 도는 기묘한 흥분을 느껴본 적이 있어본 사람이라면 아예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의외의 결과를 얻어낼 때 느끼는 감정, 이것이 바로 짜릿함의 정체다. 그렇다면 투기와 짜릿함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사람들 대부분은 왜 투기를 하느냐는 질문에 이른바 대박이 가져다 줄 경제적 여유를 답으로 내곤 한다. 물론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도박사들처럼 대다수 투기꾼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주 소수만이 투기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행운이 자신에게 찾아올 가능성보다는 지나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투기꾼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투기를 한다. 대박을 쫓는다는 애매한 대답으로 짜릿함을 쫓는 자신의 감정을 속인 채 말이다.

튤립 버블과 사우스 시 버블, 미시시피 버블은 투기의 교과서라 불릴 정도로 많은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버블은 끊임없이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몇 백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버블과 투기 짜릿함은 어떤 함수로 묶여 있을까?

먼저 네덜란드 튤립투기를 살펴보자.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이 누리던 독점적 향료무역권을 빼앗은 네덜란드인들은 최고의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먼바다에서 돌아오는 배들에는 짜릿한 전투와 모험의 흥분 대신 상인들의 냉정한 손익계산이 실려 있었다. 항구에 입항하는 선원들의 이야기에 흥분하던 군중은 새로운 무언가를 원했다. 경제적 안정과 짜릿함에 대한 갈망이 절묘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튤립에 대한 투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초 영국에서 등장한 사우스시 버블 또한 짜릿함과 무관하지 않다. 네덜란드와의 해상패권 다툼에서 승리한 영국은 대서양을 자기들의 바다로 만들었고 의회정치의 발달로 국민 개개인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기존의 계급사회가 빠르게 무너지고 그 빈틈을 메운 시민계층들은 새로운 흥분을 원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흥분에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이 사우스시 사가 발행한 주식이었다. 당시 한 수필가가 남긴 「우리는 미친 시대에 살았다. 나 역시 이것이 얼마나 허황된 꿈이었던가를 알고 있지만 짜릿함의 유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라는 회고는 이 시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투기 붐이 조성되었던 당시의 유럽사회와 우리 사이에는 몇 백년이라는 시간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투기 한가지를 놓고 보면 이런 시간차가 무색해진다. 여전히 사람들은 짜릿함을 갈망하고 있다. 개발 시대에는 부동산 투기를 했고 성장시대에는 온 국민이 주식에 투자를 했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로또를 산다. 대다수 사람들은 투기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짜릿함이 주는 행복감을 위해서라면 이런 위험성을 손쉽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짜릿함에 대한 기회비용이라고 자신을 납득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투기에 대한 우려를 내보이고 있다. 하지만 말쑥한 옷차림과 온갖 편리한 도구들로 넉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인들에게조차 분명 부족한 것은 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몇 천년 전 조상들이 자연이라는 거친 위험과 싸우면서 터득했던 이 기묘한 흥분감에 목말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출처

2004/08/17 23:24 2004/08/17 23:24

삼각 무역

Posted 2004/08/10 16:30,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대항해 시대와 삼각 무역
어린 시절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코에이사의 [대항해시대]가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유행에서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꽤 오랫동안 [대항해시대]의 팬이 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십대 소년이던 당시의 나를 가장 매혹시키던 단어는 삼각 무역이란 단어였다.

보다 수익성이 높은 무역 루트를 만들기 위해 백과사전을 뒤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같다. 역사에 기록된 무역로를 재현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무역로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왜 였을까?

우선 학교에서 배우는 무역의 기본 가정으로 돌아가 보자. 무역의 기본 가정은 두개의 국가와 두 가지 상품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두 가지 상품은 양국 모두에서 필요하나 상품이 산출되는 나라는 한 나라뿐이다. 따라서 양국은 교역을 통해 두 가지 상품을 모두 소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필요가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교역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상대국이 가지고 싶어하는 상품 A가 있어야 하며, 상대국 역시 우리가 가지고 싶어하는 상품 B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이런 조건이 간단하게 만족되는 경우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상품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한 국가가 특화를 가지고 산출해 낼 수 있는 상품이 적을수록 무역의 연결 고리는 매우 복잡해 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교훈은 따로 있다. 교역을 하자면 상대에게 대가로 건낼 상품이 필요하다. 자기 것이라면 좋겠지만 가진 것이 없다면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에게 대가로 건낼 무언가가 있었야 한다. 간단하지만 위의 조건은 오늘날의 세계를 설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건을 충분히 숙지했으면 [대항해시대]로 혹은 역사 속으로 돌아가자.

역사에 기록된 삼각 무역들


삼각 무역의 현대적 함의
교역 자체만 놓고 보면 교역은 영합 게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상대편에게서 상품을 사오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상품과 그에 대한 대가의 합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교역이 경제를 성장시킨다고 생각한다. 왜일까? 영합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교역이 경제를 성장시킨다고 생각할까?

사실 교역 그 자체는 경제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아니다. 교역을 통해 사회가 누릴 수 있는 자원 절약과 후생 증진이 바로 경제를 성장시키는 진짜 원동력이다. 교역은 사회가 최적 비용으로 생산해 낼 수 없는 재화를 소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단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지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비록 우리 사회가 생산해 내는 비용보다는 저렴하지만 교역 상대국이 생산하는 비용보다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제법 비싼 상품이다. 하지만 과거의 삼각 무역은 위에서 언급한 영합 게임에서 벗어난 가속 페달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바로 폭력과 약탈을 통한 공짜 교역과 이를 유지 시킨 인간의 욕망이다.

십대 소년에게 삼각 무역이란 단어는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활약하던 무역상들을 연상시키는 멋진 단어였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십대 중반의 청년에게 삼각 무역은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닌 기이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역사에 기록된 삼각 무역이 폭력과 희생을 동반했다는 사실은 너무 명확해 보인다. 베니스는 슬라브인들을 노예로 팔아 해상 제국을 건설했고, 스페인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씨를 말림으로써 범지구적인 삼각 무역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영국은 중국의 아편 중독이라는 극약 처방을 통해 산업 혁명의 전주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폭력과 희생이 동반된 당시의 무역 구조에 선뜻 동의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가정을 더해보면 삼각 무역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하게 된다. 노예도 아편 중독도, 폭력도 희생도 없는 인도주의적 무역 관행이 세계를 지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소비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면, 산업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일상 속에서 누리는 다양한 서비스와 상품들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날의 세계는 정적인 고요를 유지하는 재미없는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삼각 무역 자체가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가 잦았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희생을 토대로 혜택을 누리는 것은 국경을 초월한 미래의 우리들이다. 사실 현대의 삼각 무역은 과거의 삼각 무역처럼 암울한 분위기를 풍겨내지 않는다. 폭력도 없고, 희생도 없다.(물론 가시적으로만 없다는 뜻이다. 내부 구조적으로는 여전히 존재한다) 어쩌면 너무나 복잡하게 얽힌 현대의 교역 구조로 볼 때 삼각 무역이라는 단어 자체가 고어의 범주에 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백 년 전 삼각 무역을 태동 시켰던 기본 조건만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건을 사들이기 위해서는 팔 무엇이 필요하며, 그마저 없으면 교역에서 제외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각 국이 경쟁적으로 전략 산업을 육성하는 것도 따지면 팔 무엇인가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없으면 빼앗으라는 법칙도 그대로 적용된다. 물론 과거 같은 일방적인 약탈과 폭력을 보기란 조금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다른 형태로 변신한 약탈과 폭력은 여전히 교역을 유지하는 일부분이다.
2004/08/10 16:30 2004/08/10 16:30

the World that trade created - Intro

Posted 2004/08/06 16:26,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마이너리티가 되어버린 무역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긴 하지만 [무역]이란 단어와 조우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꽤나 만나기 힘든 단어지만 여차해서 만나기라도 하면 실질적인 의미의 무역를 다루기 보다는 개념적 차원의 무역을 다루는 것이 보통이다. 일부 학교에는 여전히 무역학과가 남아 있긴 하지만 무역이라는 화두는 경영쪽에서만큼은 마이너리티로 전락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꽤나 좋은 커리큘럼으로 구성된 학교의 수강 편람을 뒤져봐도 무역이나 교역에 관련된 과목은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사실 무역이 커리큘럼에서 사라진 이유는 다른데 있다. 상품 거래로 한정되었던 국가간의 교역이 이제는 생산 요소 거래로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무역론에 국제 생산론과 국제 금융론, 국제 전략론과 국제 재무론이 가미되었고, 그것이 이제는 국제 경영론이란 하나의 학문으로 분화되었다.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에 되려 무역이란 단어가 낯설어진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실제로 내 친구들 가운데 신용장과 무역원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소수이다. 상품 수송 방법에 따른 회계 처리 기준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국제 거래를 위한 스왑과 선물 전략에 달통한 그네 들이지만 신용장하면 크레딧 카드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마스터나 비자 카드로 구매를 하고 DHL이나 UPS로 배달 받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미쳐 알지 못했던 것
휴학을 하기 전까지 난 학교 신문사에서 한국의 1세대 기업인들로 불리는 창업자 그룹에 대한 기사를 전담하고 있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30년대부터 65년까지의 기업들의 행적을 탐구했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에 한가지는 전쟁과 자유당 정권, 보릿고개로 정의되었던 50년대가 60년대보다 되려 더 자유로운 무역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쪼개지기 전까지 한국 기업들은(물론 아주 소수였다) 중국과 티베트, 만주와 연해주, 일본까지 이어지는 영업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당시의 거래는 일반 시장 거래와 무역의 기묘한 비율로 혼합되어 있는 것이었다. 일부 기업들은 곡물의 선물거래시장(미두)을 이용해 오늘날의 신용장과 유사한 기능을 이용하기도 했던 것 같다.

심지어 전쟁이 한참이던 50년대 초반.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거래되었던 목록의 화려함은 오늘에 뒤지지 않는다. 일본과 홍콩, 그리고 부산을 연결하는 무역 루트는 당시 최고의 융성을 자랑하고 있었고, 사업한다는 사람치고 일본과의 밀무역이나, 각종 선물 거래에 손을 대지 않았던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것은 단지 흥미로운 사실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무역만큼이나 과거의 무역도 화려하고 재미난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단초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잘 교육 받은 점잖은 학자들이 모르는(다시 말해 수리적으로 분석이 불가능한) 또 다른 매커니즘이 만들어 낸 숨겨진 세계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조금씩 또렷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포스팅 공고
2002년 가을부터 시작된 나의 믿음은 작년 봄을 거치면서 점점 구체성을 띠어갔다. 현대적 경영 매카니즘을 토대로 교육 받은 우리가 그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던 세계를 설명할 단초가 되는 도서 목록을 작성했고, 어쩌면 새로운 칼럼으로 독립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도 했다. 상당히 많은 재량권이 주어졌던 신문사의 편집 방향을 토대로 볼 때 상황은 낙관적이었다. 인생 최대의 태클이라는 병역 문제로 휴학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휴학과 귀향, 훈련소와 시험, 혼미해진 정신 상태와 게으름은 당초 계획을 일년이나 뒤로 미루어 버렸다. 7월에 들어서야 노트북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던 기획서를 찾아내었고 대강의 색인도 머리 속에서 완성되었다. 할 일이 넘쳐나는 올 한해지만 애인도, 궁벽한 시골이라 나를 유혹할 것도 없는 현재야 말로 [유희]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인 것 같다. 지금하지 못하면 후회하게 될 거란 예측이 결심에 방아쇠를 당기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음 포스팅은 [the World that trade created- 삼각 무역]이란 제목으로 포스팅 될 예정입니다.
2004/08/06 16:26 2004/08/06 16:26

컨설팅펌에 대한 단상

Posted 2004/06/19 10:48,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대학에 처음 입학할 당시에 가고 싶던 직장은 컨설턴트였던 것 같다. 학교신문사에서 수습 기자로 일하면서 대부분의 컨설팅 펌들의 설명회는 다 들어간 듯 싶었는데 그 당시 나의 솔직한 감상은 정말 멋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검정 색 오피스 슈트도 멋있었고, 업무 분야의 다양함과 컨설턴트들이 지닌 당당함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였던 듯도 싶다. 단지 컨설턴트가 되는 것을 대학 시절의 목표로 삶는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기자 신분증을 이용해 리셉션 테이블에서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면서 컨설턴트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깨진 것 같다. 당시 설명회에 나온 컨설턴트들은 주로 BA였는데 대화를 통해서 파악한 그들의 일은 소위 [딱 갈이]로 불리는 제록스 머신의 휴머노이드 형태였다. 번역과 자료 준비. 복사(카피& 페이스트 포함)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입사도 어렵다는 그런 직장에서 하는 일이 보통 직장의 1.5.배의 연봉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 겨우 그런 일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어느날 Bain&Co.의 AC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잡았던 듯 싶다. 어느 정도 컨설팅 펌 특유의 분위기에 익숙해진 난 단도직입적으로 3년 후의 전망에 대해서 물어봤다. [베인에서 3년 뒤에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달변인 컨설턴트들이 할말을 찾아 머뭇거린 사실 자체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가 한 대답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MBA다녀와서 정식 컨설턴트가 된다면 좋겠지만 가능성이 없다면 일단 이직을 고려하겠죠. 따로 MBA를 다녀와서 AC가 아닌 정식 컨설턴트로 다시 지원하는 방법도 있구요. 제가 알기로는 AC 경력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거든요.

사실 결정적으로 컨설턴트라는 직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것은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였다. 취재차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가 대기업의 임원인 어느 선배 분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 분의 말을 듣는 순간 비즈니스 세계의 냉혹함에 치를 떨었던 듯도 싶다.
컨설턴트? 나도 MBA를 다녀왔지만 MBA에서 배우는 태반은 어떻게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가에 대한 요령이라고. 알량한 MBA하나 믿고 현장 비즈니스가 뭔지도 모르는 새파란 애송이들이 프로세스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보면 웃음 밖에 안 나와. 전략 팀에서 몰라서 손을 안 댔겠어. 실행 여건이 안되니까 주저하고 있던 것이지.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어떻게 실행 여건을 만들어 내느냐는 문제 아니겠나? 요즘 생각하면 컨설팅펌에 오더를 주는 것 자체가 일종의 tax같아. Financing과정에서 어느 컨설팅 펌에서 다녀갔다고 하면 대체로 후한 평가를 주니까 말이야. 일종의 name value를 구입하는 것인 것 같기도 하고…

두 번째 충격은 M사 서울사무소에서 실시한 한국의 여성 인력에 대한 리서치 결과였던 것 같다. 파이낸셜 플래너 혹은 보험 설계사를 한국 내 여성 고급 인력들이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로 진단을 했는데 한국계 미국인인 그 컨설턴트의 발표를 듣는 순간. 비웃음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여자 친구들에게 보험설계사가 되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아마 맞을지도 모르겠지. 어쩌면 그날부로 인간 관계가 종언을 고할지도 모른다고…]

저 사람은 여성 고급 인력의 범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 것일까? 진지하게 묻고 싶어졌다. 영어 발음이 매끄러웠다면, 아니 주변에 퍼스트 랭귀지가 영어인 친구 하나만 있었더라도 틀림없이 질문 했을 것이다. 뒤에서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고 있는 교수님을 무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사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블랙 슈트로 몸을 감싼 그 여성 컨설턴트들의 능력에 심각한 회의가 든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최고 학부를 나왔을 텐데 말이야. 어째 저렇게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것일까? 아마 저 보고서를 손에 든 여성부 이사관은 M사도 별 것 없다고 중얼거리겠지. 잘못된 자료 해석으로 내린 엉망 진창인 결론이니까 말이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Click!!

2004/06/19 10:48 2004/06/19 10:48

경제 위기론에 관하여

Posted 2004/06/06 16:25,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박승 한국은행 총재의 인터뷰를 읽었다. 중앙은행의 수장으로써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감을 내보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의 본질을 호도했다는 생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고유가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방어책으로 금리를 인상시키거나 통화공급을 수축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은 지극히 원론적인 수준의 답변이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명답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 위기론이 과대 평가 됐다는 답변은 중앙 은행의 수장으로서 보이는 ‘깡’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

사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지금이 몇 번째 경기 국면인지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가장 긴 경기 국면 주기일지도 모르고, 일부 연구처럼 사이클의 매우 짧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이 활황의 예비 단계라는 루머를 액면가 그대로 믿어주기에는 이 동네에서 먹은 밥이 너무 많다. 진짜 저점을 통과했는지도 확언할 수 없는 시점에서 경기 순환론을 근거로 경기가 회복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는다.(경기 선행지수도 활황을 알려주기에 부족하고, 재고지수도 마찬가지다)

경제 위기론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는 주어진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가의 문제다. 경제의 장기적인 발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표상 경제 위기로 보기 어려운 점이 분명 존재한다. 경제 성장률은 지난 분기 5.3%을 기록했고 환율은 안정되었으며, 금리도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실업률도 지표상으로는 분명하게 조금이나마 줄어 들었다. 기업의 매출순이익률은 늘어 났고, 부채비율도 역대 최저 수준이다. 차이나 쇼크와 유가 상승이라는 악재가 겹쳤지만 그래도 수출에 매우 큰 타격을 입힌 것 같지는 않다(참아낼 만한 수준의 타격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 같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지표 속에는 숨겨진 이면이 있다. 지난 분기 경제 성장률은 5.3%이지만 동일 기간 내 수출 성장률은 15%대 였다. 수입 성장률을 고려해도 NX(Net Export)의 대부분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성장이 일반 국민 계정의 소비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신규 투자 선행지수는 여전히 100이하이며 기업들은 저렴한 금리와 높은 수출 성장률 덕분에 거두어 들인 순익을 부채를 줄이는 데 쓰고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해석해 보면 상황은 위기에 가까운 쪽으로 저울추가 기운다.

콜금리와 시장 금리가 매우 근접한 현상황에서(심지어 콜금리의 추가적인 인하까지 논의 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이 신규 투자 대신에 부채를 줄이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는 뜻은 신규 투자할 프로젝트가 없다는 설명이나 장기적으로 금리가 요동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시그널이다. 하지만 금리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다만 현재로서는 신용 경색의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에 금리가 상승하기 보다는 하락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다만 연방단기금리의 인상폭이 매우 커진다면 이 것은 우리 금융 시장에도 분명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부채를 줄이고 현금 보유액을 늘리는 기업 파이낸싱 전략의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까? 첫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필립 부틀러의 주장대로 장기적인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이다. 장기적인 디플레이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경우 현재의 기업 파이낸싱 전략은 가장 효율적이다. 낮은 금리 수준과 가용 자본량이 낮은 상황에서 통화의 가치가 상승하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 현금을 보유함으로써 (다시 말해 현금에 투자한다는 의미다)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부틀러의 주장에 관해서는 그의 저서 [부의 대전환]을 참고하세요)

물론 저금리 상황에서 디플레이선 발생하더라도 즉각적인 자본 공급에 어려움은 없으며 기업이 현금에 투자하는 유인을 과대 평가 했다는 비난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비난의 토대는 솔로우 모형이나, 개방 경제 모델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며, 거래 비용이 0이며 금리차와 리스크가 없는 경제 모델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또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에 대하여 완벽한 대응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이 불거질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장기 침체를 보라. 일본 중앙은행의 엘리트들이 돈을 찍어 낼 줄 몰라서 안 찍었겠는가?

두 번째 가능성은 금리와 경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최선의 의사 결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공산품의 가격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부동산은 약세로 돌아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채의 가치가 폭락할 확률은 매우 낮으며, 가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고정 자산에 투자하기 보다는 현금 같은 유동 자산에 투자하는 편이 운용의 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온건한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다. 조금 쉬운 표현을 쓰자면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나 정치권에 아쉬운 소리해가며 사업하기 싫은 것이고(다시 말해 은행 대출과 로비에 학을 떼었다는 표현도 가능하겠지), 이 나라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주시하고 있으며(그러니까 신규 투자를 안 하지), 여차해서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확 해외로 튈 준비를 하고 있다는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그래서 고정 자산에 투자를 안 하는 거다. 유동 자산으로 들고 있어야 튀기가 쉽지.)

사실 경제 위기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신뢰 관계의 붕괴와 펀덤멘탈의 문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경제는 앞날을 생각하는 장기적인 비전에 투자하기 보다는 눈 앞에 닥친 위기를 벗어나기 급급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계와 기업 정부간의 신뢰 관계는 최악의 국면에 접어 든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는 [자기 실현적 예언]을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계 부분에서 보기에 현재의 경제 상황은 [예언]을 걱정할 판이 아니라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실제 상황]이다.

정부에 대한 기업의 신뢰감 역시 가계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무리 정부가 투자를 독려하고 경제 단체장과 간담회를 가져도 기업 입장에서는 공수표 한 장을 떼어줄 따름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기에도 심심하면 오라 가라 부르며, 중요 정략에 대해서는 방관을 최적의 정책을 삼는 정부가 더 이상 사고 좀 안쳐줬으면 하는 바람인 모양이다.

신뢰를 주지 못하는 정부는 결국 경제의 선순환 시스템을 붕괴 시킨다. 처음에는 소소한 불신이지만 소소한 불신이 만들어낸 부정적 영향력은 순환 과정을 통해 몇 배로 중첩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경제 성장률이 올라가도 실물 경제는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며, 높은 매출이익률을 내는 기업들은 투자 보다는 관망에 주력한다. 정부는 무능함으로 성토를 당하며 다시 신뢰를 상실한다. 대통령이 아무리 [자기 실현적 예언]을 경계해도 이미 서푼짜리 보다 못한 정부의 말에 기업과 가계가 납득될 리 만무하다.

수출과 금리, 환률의 삼박자가 맞아도 경제 주체간의 신뢰가 붕괴되고 성장 엔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으면 종국에는 단지 엇박자가 될 공산이 크다. 해외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국내 기업을 붙잡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경 분리의 원칙을 세우면서도 경제에 대한 정치의 지배 논리는 여전하다. 분리는 하되 누가 힘이 센지는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겠다는 그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가계는 어떤가? 지난 6년 동안 경제의 분배 시스템은 더욱 왜곡되었고, 기존의 사회관이 붕괴 일로를 걷고 있으며, 사람들 대다수가 피부로 느끼는 경기가 최악인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옳다면 옳은 것이라는 권위주의적 정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어렵지 않다. 다만 몇몇 핵심 전문가들의 머리에서 짜낸 정책 수단으로 뒤집기에는 너무 멀리 왔을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역량을 집중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강력한 매력과 현혹으로 긍정적 자기 실현적 예언을 온 국민에게 주입시키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번 행정부는 첫번째 방법을 사용할 정도로 책임감 있지도,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할 정도로 멋지지도 않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길은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빌며 몇 년을 더 기다리는 것 뿐이다.

...

2004/06/06 16:25 2004/06/06 16:25

닷컴

Posted 2003/12/06 16:22, Filed under: Column/Economic&Biz
인터넷 붐이 꺼진 이후 소위 인터넷 기업들로 불리던 닷컴 기업들의 전략에도 변화가 생긴 것 같다. 합리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승부하던 초기의 벤처들과 다르게 오늘날의 닷컴기업들의 기본 전략은 마케팅이다. 이것은 기술력의 차별화가 두드러지지 않을 정도로 각 기업들의 평균 수준이 비슷해진 요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평균 기술 수준을 구축하는데 소요되는 한계 비용이 줄어든 현실도 큰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디지털 경제에서는 초기 서비스 구축에 대부분의 비용이 소요된다. 서비스 이용자 1인을 추가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한계비용의 코스트는 제로에 가깝다. 게다가 기술 수준의 발전으로 초기 서비스 구축에 필요한 비용은 하드웨어적인 투자보다 소프트웨어적인 투자와 인건비가 대부분이다. 소프트웨어와 인건비를 코스트로 생각하기보다는 훗날 보상을 얻기 위한 일종의 간접 투자로 인식하는 닷컴 기업의 특징으로 생각해볼 때 디지털 경제에서의 초기 투하 자본의 크기는 매우 작다.

하지만 투하 자본에 비하여 닷컴 기업들의 운용할 수 있는 유동성은 매우 큰 편이다. 배당 가치나 수익에 의한 냉정한 평가보다는 미래의 경제적 가치인 EVA에 의해 평가받는 닷컴 기업의 특성상 등록 기업들의 경우 실제 기업의 실제 크기보다 많은 유동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통례이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가 시작된다.

실제 기업의 크기보다 많은 유동성과 낮은 구축 비용, 합리적인 경영자라면 남은 가용 자원을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사용해야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 투자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의 갈래는 여러가지이다. 하지만 수익과 성과에 목말러하는 직원들과 투자가들의 ‘눈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부분의 경영자들이 생각하는 갈래는 바로 마케팅 강화다. 이것은 투자의 성과가 느리게 나타나는 연구 개발과 인력 개발보다는 과감한 마케팅 투자의 성과가 보다 가시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경영자들의 이런 선택에도 나름대로의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 사소한 경품을 내건 이벤트 프로모션 하나로도 접속자수의 증가는 폭발적이다. 인간에게 호기심이란 결코 떨쳐버리지 못할 감정이 있는 한 이벤트 프로모션은 절반 이상의 성공을 보장한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투자보다는 절반 이상의 성공을 보장하는 마케팅에 가용 자원을 쏟아붓는 것이 이들 경영자들에게는 우세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다수 닷컴 기업들이 우세 전략을 선택한다는 근거아래 마케팅 투자를 늘리면서 시장은 혼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경쟁이 과열되면서 마케팅 차원의 지출이라 부르기에는 부적당한 유형의 지출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유명한 커뮤니티나 블로거, 영향력 있는 유저들을 사들인다는 소문은 더 이상 조심스레 떠도는 입소문조차 되지 못한다. 기업들은 새롭게 시작된 서비스의 성공을 위해서 사람들을 사들이고 경쟁 기업에서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이런 지출을 아끼지 않는다.

사실 이 글에서 기업들의 윤리성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수익성도 좋고, 윤리적인 기업이라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윤리적인 기업과 수익성 좋은 기업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수익성 높은 기업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필자다. 하지만 닷컴 기업들의 이런 혼탁한 자태는 꼴불견으로 다가온다.

90년대 초반 닷컴 기업들은 열정과 창조적 아이디어로 하나로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하지만 오늘의 닷컴 기업들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능구렁이 같은 심사를 지닌 거대기업들과 전혀 차이가 없다. 심지어 오늘날 닷컴 기업들이 보여주는 한심스런 작태는 이들 거대기업들 보다 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근래들어 조금 나아지는 닷컴 기업들의 수익성에 이번 한번만큼은 눈감아 주리라 마음 먹었다.

하지만 닷컴 기업의 빠질대로 빠진 윤리성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닷컴 기업들의 서비스 그룹화’다. 사실 다각화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닷컴 기업들의 다각화는 비합리적이다. 남다른 서비스 차별화를 이루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남들하는 것은 다 똑같이 하자라는 지극히 경멸 받아 마땅한 생각에서 나온 다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맹목적인 다각화를 뒷받침하는 요소가 낮은 개발비용과 풍부한 마케팅 지출이다.

그런데 이런 맹목적인 서비스 다각화가 과연 닷컴 기업의 수익성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인터넷과 기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전문화되고 차별화된 서비스에 시선을 끌린다.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 당길 수 있는 것은 단기적인 프로모션만이 아니다. 차별화되고 꼭 필요하며 유용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사람들은 주머니를 열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 닷컴 기업들이 하고 있는 아무런 차별성 없는 다각화에 주머니를 열 순진한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닷컴 기업들이 밟아가는 길은 과거의 신생 기업이었던 오늘의 거대 기업들이 걸었던 길과 점점 유사해지고 있다. 단지 그 범위와 기술이 다르다는 것일 뿐 그 행보를 설명할 수 있는 본질적인 영역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쩌면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 반복되듯이 기업들의 행보 역시 설명하기 어려운 난해한 흐름 아래 종속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2003/12/06 16:22 2003/12/06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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