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About_A_boy/Only the things!'

13 POSTS

  1. 2011/04/21 다시! (4)
  2. 2009/04/26 변덕스런 봄 (2)
  3. 2009/04/24 회중 시계
  4. 2009/03/26 나는 어떤 책?
  5. 2009/02/21 새벽처럼 찾아오는......
  6. 2009/01/16 Brevior saltare cum deformibus mulieribus est vita
  7. 2008/12/15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2)
  8. 2008/10/24 A bunch of unanswered questions
  9. 2008/08/19 여름나기(2008)
  10. 2008/05/31 메모 위의 상념
  11. 2008/03/27 소소하게 불평하다
  12. 2008/03/06 falling in memory (3)
  13. 2008/01/24 심야잡상

다시!

Posted 2011/04/21 22:19,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숫자의 감옥에 수감된 이후 잃어버린 것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문장이다. 자연스럽게 써내려지던 문장은 이제는 너무 조악해 부끄럽기만 단어의 나열이 되어버렸다.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확립한 나름의 문체도 사라지고, 이제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낯선 문장이 내게 손짓한다.

생각을 담아대는 가장 훌륭한 도구였던 문자가 낯설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어린 시절 단 한번도 꿈꾸지 않았다. 그 시절에 나에게는 그런 날이야 말로 1984년에 등장하는 쥐보다도 더 공포스럽고, 화씨 451의 미래보다 더 암울하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조금 허전하고 답답할 뿐 숫자의 감옥도 나쁘지 않다. 출퇴근 시간에 듣는 음악 뿐이지만 여전히 음악도 존재하고, 깊게 빠져들 만큼 충분한 여유가 없지만 책 역시 내 삶을 아직 떠나지 않았다. 학생 시절보다 더 다양한 커피를 마시고 에스프레소 머신도 집에 들여놓았다. 다만 옛날의 내가 느꼈던 감동과 기쁨이 보다 무미건조한 방법으로 표출될 뿐이다.

사실 가장 마음 아픈 순간은 어어지지 않은 채 몇해 동안 방치된 블로그를 보는 순간이다.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삶의 즐거움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이 곳의 황량함은 나를 어두운 불안의 경계 밖으로 내몬다.

길게 썼지만 결론은 하나다. 다시 이곳에 글을 쓰고 싶다.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대세인 이 시대에도 난 여전히 이 공간이 제일 아늑하고 편안하다.

2011/04/21 22:19 2011/04/21 22:19

변덕스런 봄

Posted 2009/04/26 22:38,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_가슴을 갈라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문장을 고르기란 쉽지 않다. 결국, 2주가 걸러서야 키케로의 서간문에 실린 유명한 문장이 떠올랐다. 본래는 대화편에 등장하는 문구를 키케로가 인용한 것인데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불의를 행하기 보다는 불의로 고통받는 것이 낫다' 정도다. 기억나지 않는 원문을 찾아 페르세우스 프로젝트에서 번역문을 찾았고, 친구에게 부탁해 롭 시리즈에서 해당 구절의 원문을 찾았다. 좋아해주면 좋겠지만 기뻐해주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자신은 좀 없다.

_ 다시 브로콜리 너마저도의 <보편적인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늦은 밤 텅빈 사무실에 앉아 스탠드를 켜놓고 도시를 삼킨 어둠과 자동차들이 만들어내는 붉은 행렬을 보면서 듣는 <보편적인 노래>는 새로운 맛이다. 사실 하루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혹사한 다음 찬바람을 맞으며 지하철 역까지 걷는 15분이다. 아이팟의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고 듣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스노우>나 페더의 <사일런트 크라이>는 왜 그리 좋을까? 부드러운 가죽 로퍼에 느껴지는 땅의 감촉과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그 15분의 존재 때문에 일하는 것이 좋다면 억지일까?

_오래 전에 읽다가 멈춘 『잃어버린 것들의 책』에서 아주 인상 깊은 문장을 발견했다. 누이 많은 집안에서 자란 막내 특유의 붙임성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날마다 한심한 유머를 터트리는 나로서는 그 문장을 진작에 외우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말이나 문장 따위에 사람의 마음을 담는다는 일의 무모함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은 항상 지나간 것을 후회하는 법이고, 조금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열정을 잃지 않는 법이다. 롤랜드라는 기사가 남긴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참조할 것!

_'완전 거짓말쟁이세요 -_-;'란 답신에 친구와 나는 거리에서 쓰러질 정도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on the street where you live'의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어쩌면 내 나이 또래가 마지막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 평소에 내지 못하는 용기를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낼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우리로서는 그네들이 사는 거리를 걸으며 우연이 찾아오기를 꿈꾸고 희망하는 데 말이다. 하지만, 몇 해만에 친구는 카메라를 챙기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시원스런 웃음을 얼굴에 띄워놓고 있었다. 구김 없이 유쾌한 순간이 너무 오랜만이라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설레임을 담은 표정으로 답신을 기다리는 지기를 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괜시리 나까지 즐거운 웃음에 전염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웃음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긴 해도 말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 그 길에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는 모르나 -되도록이면 해피엔딩이기를 바란다- 시간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은 비단 사라지지 않는 수염자국만은 아닐 테니 걱정은 천천히 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_2003년 7월에 시작한 블로그가 어느덧 햇수로 일곱 해를 맞았다. '50만 히트' 같은 것을 기다리는 유치함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이 거대한 내 삶의 기록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니 철없는 청년의 코믹 릴리프 혹은 부파 오페라를 묵언으로 감상해준 수많은 손님에게 꿈꾸는 일들이 마법처럼 이루어지는 하루가 찾아오기를 빈다는 인사쯤은 남겨도 되지 않을까? 

2009/04/26 22:38 2009/04/26 22:38

회중 시계

Posted 2009/04/24 07:25,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서른에 가까워 질 때까지 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회중 시계 보는 토끼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했고, 시계 초침 소리에 쫓기는 느끼는 사람들의 초조함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어느덧 나도 그들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2009/04/24 07:25 2009/04/24 07:25

나는 어떤 책?

Posted 2009/03/26 19:09,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You're The Guns of August!
by Barbara Tuchman
Though you're interested in war, what you really want to know is what causes war. You're out to expose imperialism, militarism, and nationalism for what they really are. Nevertheless, you're always living in the past and have a hard time dealing with what's going on today. You're also far more focused on Europe than anywhere else in the world. A fitting motto for you might be "Guns do kill, but so can diplomats."
Take the Book Quiz at the Blue Pyramid.

2009/03/26 19:09 2009/03/26 19:09

새벽처럼 찾아오는......

Posted 2009/02/21 22:16,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한 교정에 앉아 서로 고민과 꿈을 두서없이 늘어놓을 수 있었던 시기 친구 하나는 내게 사랑은 새벽처럼 찾아온다고 말하곤 했다. 새벽처럼 찾아오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한 숨을 내쉬는 그의 표정에는 무언가 간절한 것이 있었다. 어둠 속에 찾아오는 빛처럼 그 사랑은 녀석에게 소중한 것이었겠지. 하지만, 그 후로 난 다신 그에게 무엇이 새벽 같은 사랑인지,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물을 수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 대신 그를 감싼 것은 높이를 알 수 없는 격랑이었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는 격랑에 완벽하게 침몰해 버렸다. 메마른 표정을 지닌 그에게 새벽 같은 사랑을 묻기에는 난 덜 무뎠고, 그 역시 그 순간을 잊은 듯 입을 닫아버렸다.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남긴 채로 말이다. 그리고 나 또한 조금씩 그의 메마른 표정을 베껴가기 시작했다.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다시 생각난 것은 좀 의외의 순간이었다.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느낀 알콜의 향에서 철없던 어린 시절에 소독약 냄새가 나는 손을 잡고 평생을 살 수 없다고 말하던 나를 연상했기 때문이었다. 스무 살의 난 내 인생이 더욱 커다란 것일 줄 알았고, 내 야망의 크기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단단할 줄 알았다. 그랬기에 소소한 행복보다는 거센 물결에 내 자신을 맡기고 싶었다.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난 변하지 않았다. 예의 바르고 이해심 많지만 사랑에 있어서 결정적인 한 걸음만큼은 주저하며 머뭇거리기를 반복하는 그런 헛된 인물이 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날들이 지난 지금 난 그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고 부질없는 꿈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이제는 작고 소소한 것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일에 몸을 맡기는 일상 속에서 절로 깨닫기 때문이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술의 힘을 빌려 오랜 지기에게 그 말을 전하는 순간 난 그제야 이십 대의 한밤중을 넘겼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오래전 그가 말하던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이 무엇인지, 한밤을 넘겨야만 진실을 볼 수 있다던 어느 소설 속 문구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애써 부정해왔던 것이지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옛 지기가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던 것은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매일 찾아오는 새벽처럼 사랑은 항상 다시 찾아오는 법이고, 사랑 자체를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 앞에서 'to be or not to be'를 읊는  나를 모른 채, 그는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리라.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남아있다고 믿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버거운 이야기로 그는 나와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우습지만 스무 살의 난 복잡하고, 난해한 것에 끌리면서도 늘 바람꽃 같은 사람을 꿈꾸었다. 그리고 서른을 눈앞에 둔 이제 바람꽃 같은 여자가 영화속 한 장면처럼 내 눈앞에 서 있다. 사랑은 늘 새벽처럼 찾아온다고 하지만 어쩌면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 새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내 마음을 풀어놓겠다고 굳게 다짐해보건만 제자리를 맴도는 이 버릇만큼은 어찌할 수 없다.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을 내가 더는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홀로 마음속에 담아두지 못하겠음에도 말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인데 무슨 서설이 이리 긴 것인지 모르겠다.

2009/02/21 22:16 2009/02/21 22:16

_길에서 옛 친구를 만났다. 뜬금없이 그녀가 전하기를 봄바람처럼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맑고 뽀얀 얼굴의 옛 연인이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그녀의 어설픈 친절이 밉살스러웠다. 그녀의 상냥한 마음이 내게는 풍문의 여신인 파마의 주름진 얼굴을, 유배지에서 고통받은 시인의 삶을 떠올리게 하였다는 것을 빼곤 사실 그녀의 잘못은 없다.

세상에는 좋은 소식이 분명한데도 모르고 넘어가는 편이 나은 소식도 있다. '잘 됐네' 하고 대답하고 바보처럼 웃는 것이 이리도 힘든 일이었을 줄이야. 차라리 주정뱅이처럼 소리치고, 착한 것을 빼고는 가진 것이 없는 자처럼 불쌍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 먼 훗날 길에서 이 아이를 안은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 사이에 '서른 즈음'에란 노래를 부르기에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on the street where you live'를 콧노래 하며 걸었던 그 길은 도시개발에 지워졌고, 처음 아라비카 커피를 맛보았던 찻집은 볼썽사나운 음식점이 되었다. 단 하나 변하지 않고 남아있으리라 믿었던 나무 등걸도 지난여름 태풍에 몸쓸 정도로 상해버렸다. 어느새 소년이 청년으로, 소녀가 처녀가 될 만한 시간이 지났음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_ 인파에 시달리는 퇴근시간이 한가로운 퇴근길보다 좋은 유일한 이유는 핸드폰을 만지막거릴 공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사라졌다 믿었던 옛 버릇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되돌아왔다. 빡빡한 장문의 문자메세지를 작성했다가 이유 없이 지우기를 반복한다. 통화버튼을 눌렀다가 이내 연결종료버튼을 눌러버린다. 사람의 마음을 정직하게 전달할 방법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마음은 항상 조심스럽다.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언제까지 마음을 여밀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불행은 나를 지나치지 않기에 풀린 여밈 사이로 보인 언저리만으로도 난 반 보 전진 일 보 후퇴의 행로를 반복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내 삶은 또다시 책읽기를 좋아하고, 쉬이 술 한 잔을 비우자 청할 수 있으며, 홀로 있는 것이 자연스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될 것이 명백하다. 사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밀린 책이 책장 가득 이고, 공부할 것이 쌓여 있으며, 배울 것이 많으니 이런 것들에 시간을 보내며 서른을 맞는 것도 좋지 않을까? 다시 쌓인 십 년을 비웃으며 서른을 맞이하는 끝에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_ 나에게는 아주 가끔 '힘내'란 말을 건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친구 하나가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삶의 고비마다 이 녀석에게 대가 없이 얻은 '힘내'란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오늘도 이 녀석에게 힘내란 말을 또 한 번 염치없이 요구해버렸다. 걱정스레 시작한 녀석과의 통화는 유쾌한 농담으로 끝났다. 이 녀석이 아무에게도 가지 않았으면, 평생 좋은 친구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또 혼자 되뇌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란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참으로 무치한 사람이다.

2009/01/16 23:50 2009/01/16 23:50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Posted 2008/12/15 22:37,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누이들이 이 시집에 열광했을 때 솔직히 난 저 시집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문구가 궁상스럽고 못나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의 난 아주 가끔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되뇌게 된다. 지금 알고 있는 냉혹한 진실을 알았더라면 내 삶을 더욱 사랑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사랑하며 보냈던 시간을 나를 위해 쓰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요즘의 난 과거의 태만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천금과도 바꾸지 않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치르는 대가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쓰고 불쾌하며, 음습한 뒷골목의 좌판에 놓여 주인을 기다리는 방물처럼 처량하다. 참을 수 없는 비겁함에 나를 내던지는 거리낌도 사라졌고, 모욕에도 익숙해졌다. 자부심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나로서는 이제 더 빼앗길 것이 남지 않은 셈이다. 메마른 기계처럼 대답을 뱉어내는 내 입술은 어느 때보다 능변이지만 그 결론은 왜 이리 허무한 것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드디어 지난 화요일에는 모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것과 부딪쳤다. 그날 아침, 삐뚜름하게 안경을 쓰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 남자는 '줄만 서면 붙는 시험'에 떨어진 나를 비웃었다. 꽤 알려진 경제신문사의 보스가 던진 한 마디는 몇 년 전 그 남자가 내게 보여준 겸손하고 사려 깊은 행동과 맞물려 나를 혼돈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박봉을 감내하더라고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에 대한 내 순진함을 저주하며 조용히 마주 웃어주었다.

어린 시절 이나 예전이나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왜 난 잠시 잊었던가? 삶에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패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울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일 때뿐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잊었던 것일까? 평범함이라는 피할 수 없는 굴레가 내 삶을 조이기 시작하는 이 즈음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탈출을 꿈꾼다. 삶이 이 창과 같다면 새로 고침이란 단추를 누름으로써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지 상상하는 내가 혐오스럽긴 해도.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은 나의 얼굴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었던 최고의 찬사였다. 하지만, 요즘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난 스물여덟의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되리라 단 한 순간도 상상하지 않았건만 지금 내가 쓰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백서다.

여기저기서 받은 면접비로 제법 비싼 만년필 한 자루를 샀다. 책 없는 삶은 죽음과 같다는 라틴어 문구를 각인시키며 한순간 의기양양해졌지만 이내 몸과 마음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 이 펜으로 무언가를 쓰기 위한 기다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P.S.

결국, 고용통계에서 포지티브항이 되는 데 성공했다. 오래전부터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학창시절 한 번도 내 첫 직장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연수를 받기 시작했다. 주변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지만 요약하자면 의외의 선택 혹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대세다. 하지만, 수상한 시절에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내 결론이 틀릴 것 같지는 않다.

2008/12/15 22:37 2008/12/15 22:37

A bunch of unanswered questions

Posted 2008/10/24 23:47,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가끔은 서늘한 그늘이 진 평상에 누워 트렁크만 입은 채로 모시 침구 속에 몸을 숨긴 채 언덕 마루에 넘어가는 구름을 세는 휴일을 꿈꾼다. 높은 베개를 베고 서재에서 꺼내온 소설을 한 아름 쌓아놓고, 귀에는 시원하지만 리듬이 번잡하지 않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꽃내음 향긋한 프랑스 홍차를 홀짝이는 주말은 얼마나 여유로운가?

/내가 소설에서 헤어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낯선 시대, 낯선 거리를 걷는 여행자로서의 만족감이다. 때로 펜 끝에서 흘러나온 문장은 어느 화가의 붓터치보다 더 강렬하게 한 시대를 함축한다. 결코 실제로는 경험할 수 없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현대라는 볼썽사나운 폐허에 가려진 옛 거리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 또한 소설만의 특권이다. 그리하여 난 결코 소설이 그려내는 몽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심코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가을 냄새가 쏟아져 들어왔다. 아홉 해 전 마르케즈의 납치일기를 품 안에 넣고 길을 걷던 순간에 느꼈던 냄새와 놀랄 만큼 똑같은 것이었다.

/내 나이 스물의 유행은 말 그대로 'stylish'한 일본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전공서적 사이로 보이는 가벼운 소설 한 두 권이 그 사람의 취향을 설명하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큰누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를 기준으로 단체로 스무 살에 접어든 우리 집 같은 경우에는 이 무렵에는 이미 불씨조차 남지 않은 철 지난 유행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소설 특유의 재미에 싫증이 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2008/10/24 23:47 2008/10/24 23:47

여름나기(2008)

Posted 2008/08/19 00:31,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사나흘에 걸쳐 여남은 개씩 쌓이는 국적불명의 <걸린글>들을 지우는 일은 귀찮기보다 되려 반갑다. 몇 년 동안 한켠에 놓아만 두었던 글과 덧글을 살피며 이제는 아릿해진 추억의 한 조각을 잠시 음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수수께끼 같고, 때로는 술주정 같은 언행들을 읽으며 몇 분쯤 행복에 취해보는 건 나쁘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암호문 같은 모호한 표현들의 진의를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기다리고있긴 해도 말이다. 어쩌면 그때의 풋풋하기만 했던 그 설익은 절실함을 다신 꿈꿀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토록 반가운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돌이켜보면 순박하다 못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지금보다는 그 시절의 내가 더 멋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진솔한 감정을 가졌고, 관대한 품성을 지니고자 노력했던 청년 대신 내 안에 자리잡은 것은 회의와 불신에 찬 음모가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는 지금의 난 꿈을 가졌던 맑은 표정의 그와 마주치기 두렵다.

정채봉의 『느낌표를 찾아서』를 좋아하던 소년은 새로운 필기구를 살 때마다 친구에게, 혹은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이에게 편지를 쓰곤 했는데 지금의 난 그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펜을 쓰지만 정작 그 펜으로 쓰는 문장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아니 더 이상 편지를 쓸 곳이 없다. 서늘한 표정의 피곤하기만 한 친구들에게 다정다감한 편지를 쓰는 일은 어쩐지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내키지 않고, 몇 자 적어보았자 몸이 멀어진 만큼 감정의 진폭과 주기조차 달라져 진부한 인사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음, 흠모하는 이는 말할 것도 없고.

P.S.

다가오는 생일에는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를 갖고 싶다 졸라봐야겠다. 그의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읽고 있노라면 단단해진 껍질이 스무 살 소년처럼 말랑말랑해질지도 모를테니까.

2008/08/19 00:31 2008/08/19 00:31

메모 위의 상념

Posted 2008/05/31 02:14,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로디아 메모지에 쌓인 상념들. 상념이 상념인 이유는 그것이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을 벗 삼아 변하는 마음이란 것의 그 비난받아 마땅한 성실함을 탓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탓해 봤자 변하는 것은 없고, 변할 것도 없다.

1. 낯선 남자에게서 온 편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각이 이내 손이 멈춘다. 지금껏 보고 읽은 수많은 형상으로부터 닮은꼴을 찾아내려는 습관은 종적이 묘연하고, 영리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에 반사된 이채를 두 손으로 힘껏 잡고 싶은 욕망만이 남아 꿈틀거린다. 소년처럼 수줍게 입맞춤하고 싶고 그녀의 쾌활한 웃음을 미운 일곱 살 아이처럼 나 홀로 독점하고 싶다. 그녀가 연인이라면 어떻게 말할까? 내 무릎에 앉아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상상하고, 그녀와 함께 보는 심야영화나 함께 떠나는 기차여행 따위를 떠올려 본다. 연인으로서의 그녀를 상상해보는 일은 너무나 즐거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를 찾을 수 없다. 해맑게 웃고, 온전하게 생각하고, 명랑하게 말하는 그녀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다른 꿈을 꿀 여유가 없다. 때로는 암사자처럼 당당하고 대범하게, 때로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고혹적으로 내 앞에 선 그녀를 꿈꾸고 있노라면 호흡이 가빠지고 마음이 몽롱해져 내가 어디쯤을 범주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겁기에 입술을 떠나 눈꼬리까지 파도 치는 그 미소가 나의 것이라면 내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비밀일기

우유빛 젖가슴을 가진 하렘의 여인들을 바라보면서 그녀들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설 수 없다는 사실에 마냥 고통스럽기만 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어느 환관의 이야기를 읽다가 그가 흘려 버린 열정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별로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일치감이 존재한다. 아니 우리는 세월의 힘에 색이 흐릿해져 가는 흑백인화지 위의 사진처럼 열정으로 괴로웠던 그때를 그리워하며 그 순간을 직시하고자 노력하는 의지를 어깨에 나누어 매고 있다. 이제는 그 고통스러웠던 열정이 식었기에 되려 더더욱 그립고 안타깝기만 하는 그 정조를 소설 속의 환관과 나는 비밀스럽게 공유한 셈이다.

3. 사전에 없는 말

책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만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입가에 올려야 하는 웃음이라든지, 적절한 축하말 같은 것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결혼에 대한 그녀의 전언을 들었을 때 '결혼 축하해'라는 말이 왠지 진부하고 부족하게만 느껴졌지만, 그 상황에 적절한 말은 아쉽게도 내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기꺼이 '내 삶의 축제기간'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을 함께 해주었고, 우정을 나누어주었던 그녀에게 느끼는 것은 비단 아쉬움만이 아니다. 멈출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청금석처럼 늘 한결같이 푸르기를 바랐던 우정은 빛이 바래고, 인연의 고리들은 헐거워졌으며, 서로에게 무덤덤해지고, 종국에는 가장 아름다운 추억마저 불완전해졌다는 깨달음이 마음속을 흔들었다. 지나간 것들에 대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사진첩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후회하는 것들에 대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 아름다운 햇살을 함께 걸었던 친구들에 대해, 웃음과 울음이 다시 웃음과 울음이 교차했던 그 시간과 역사에 대하여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남긴 말은 억지스럽고 상투적이었으며, 난 당혹해 하고 있었고 냉담했다. 세상에는 많은 말이 있지만 어느 사전에도 내 마음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내가 진심으로 순수한 즐거움만을 담아 사랑했었고, 사심 없이 내 마음의 너그러움을 풀어놨으며, 불편함 없이 나를 꺼낼 수 있었던 그녀에게 했어야만 했던 '말'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4, 친구의 결혼에 대처하는 자세

다음날 나는 JY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똑같은 전언을 내게 고한다면 이번에는 한 삼십 분쯤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처럼 귀머거리 장님 흉내를 내리라. 헤아릴 길 없는 거센 마음의 풍랑이 끝날 때까지, 추억을 충분히 정리해 조리 있게 꺼낼 수 있게 될 때까지 벙어리 흉내를 내리라. 그리고 절름발이가 되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내 마음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아 여행을 떠나리라. 여행에서 찾은 그 말을 건네고는 나다운 가면과 분장을 모두 벗어버리고 마음이 따스한 벗들의 어깨를 빌려 새벽이 올 때까지, 더는 마음이 먹먹하지 않을 때까지 취해보리라 다짐했다.

5. 다시 시작되는 것들

그 병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지난 일요일 저녁에 재발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악마처럼 내 귓가에 오래된 서언 같은 것은 치워버 리라고 종용하기 시작했고, 바람 소리는 여기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5년 동안 참아왔던 보람도 없이 맹세는 헌신짝처럼 버려질 위기에 처했다. 내가 했던 수많은 헛된 맹세의 행렬에 새로운 서언을 하나 더하는 것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사실 그 병의 시작은 낯선 이불 밑에서 깨어나 덥수룩한 수염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은 분방한 차림으로 길을 걷다가 든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진한 에스프레소를 도피오로 마시고 싶다는 생각. 그전에는 마치 내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는 듯 진한 커피에 대한 갈증은 커져갔다. 보헤미안의 진한 커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풀려고 결국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스프레소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가 아니다. 좋은 브랜딩의 홍차가 상대방에게 기분 좋은 편안함을 선사하는 것과 달리, 향이 풍부한 커피가 상대에게 따스한 추억을 연상시키는 것과 다르게 에스프레소는 철저하게 혼자만을 위한 차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그해 겨울 에스프레소를 버리고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이리시 커피를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처럼. 그런데 어느 날 소리 없는 불청객이 되어 과거의 습관은 다시금 내 몸속에 자리를 잡았다. 에스프레소 도피오를 주문하는 나 자신을 위한 수많은 변명과 함께.

2008/05/31 02:14 2008/05/31 02:14

소소하게 불평하다

Posted 2008/03/27 23:47,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1.
좋아하는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질 때마다 내 마음에는 기이한 파문이 인다. 사람들의 관심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경험에서 비롯된 노파심과 사람들과 감동을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이 속 좁은 내 마음에 일으킨 짜증스러움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영화가 소설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을 때 감독과 극본가를 맹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된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Kite runner>가 개봉했다. 내가 상상한 아미르와 하산의 어린 시절이. 소라브를 구하기 위한 아미르와 아세프의 결투가, 정감있는 바바의 눈매가 영화를 통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소년 시절부터 비역질을 즐겼으며 유아성도착증까지 두루 갖춘 탈레반 아세프는 내가 읽은 수많은 책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 악역이었는데 그는 또 어찌 묘사될까?

몇 달 전 어톤먼트를 보며 두 소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 적이 있다. 브로니는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속죄로 그들을 위해 가장 행복한 허구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아미르는 그의 이복형이 하산이 그에게 건넨 'for you. a thousand times over' 말을 그의 양아들이자 조카인 소라브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화면으로 만나는 일은 필경 기쁘기 한량없는 일일 테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보물을 강탈당한 기분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이언 매큐언에 관해서 갑자기 떠오른 사실인데 그는 맨 오브 부커의 수상자가 되고, 두 차례나 숏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다음에야 입양된 형을 만났다고 한다. 미장이로 살아가는 대가의 형은 그의 부모가 결혼하기 전 불륜 관계일 당시에 얻은 자식인데, 이언의 어머니는 당시 전쟁터로 징집된 남편을 가진 유부녀였고,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더 연대의 장교였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남편이 전사한 이후, 그의 어머니는 정식으로 이언의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그 후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소설가와 그의 형은 서로 다른 운명을 살게 되는데 생각해 보면 소설가에게는 가끔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인 삶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2.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날 날씨와 바람, 꽃냄새와 배슬배슬 이어진 사소한 일상사마저 기억하는 이유는 사람 좋은 뵈는 여유나 유난히 좋은 기억력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내 삶에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마저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을 정도로 소중하기에 갈무리해야하는 대상은 꼭 연인만이 아니다. 내가 나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믿어주시는 아버지 등, 고집 세고 별난 아들 탓에 늘 마음 졸이는 어머니의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표정에만 언뜻 나타나는 걱정. 밉살맞지만 가끔 정곡을 찌르는 큰누이, 최근 관리의 대상이 된 둘째 누이,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막내 누이. 항상 내 유치함과 비겁함, 실수를 되돌아 보게 하는 오래된 친구들. 그들 모두는 내 과거고, 현재이며, 미래다. 그렇기에 사진첩에 아무렇게나 넣어두며 가끔 우연히 펼쳐보게 되는 낡고 색이 바랜 사진첩 속에 그들을 놓아두고 싶지가 않다. 그렇기에 난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반추하며 또 반추한다.

3.
내 개인적인 정책 가운데 하나는 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과거 따위는 지워버리고 누구에게나 낯선 타인이 되어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나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난 좋은 기억 속의 나이던, 나쁜 기억 속의 나이던, 어느 것 하나 부정하거나 지워버릴 수가 없다. 비록 졸렬하고 불편한 과거라 하더라도 한 사람의 역사이고, 그 역사가 없다면 오늘 내가 만난 그 사람은 단지 흐릿한 음영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렇기에 난 결코 내 과거를 부정할 수 없다. 과거를 과거로 남겨두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말이다. 오랜만에 '나'에 관하여 설명하거나, 변명할 필요없이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시간에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는 술자리를 가졌다. 경망스럽게 웃고, 사용법을 잊어버린 얼굴 근육이 바쁘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동안 다채로운 이야기가 공간을 수놓았다. 그리고 맥주와 함께 펼쳐진 이야기 속에서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이유가 과거를 존중하는 그녀의 태도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해낼 수 있었다. 조금 더 빨리 기억해 냈더라면 지금처럼 무디고, 성겨져, 돌처럼 단단해진 심장과 마주하는 일 따위는 없지 않았을까?
2008/03/27 23:47 2008/03/27 23:47

falling in memory

Posted 2008/03/06 23:11,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1.
두 해 전쯤 내 절친한 친구인 모는 짧은 문자 메시지 하나로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나약한 사내의 낙인을 받고 블라인드 데이트에서 물을 먹은 적이 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기실 나도 그 곡을 듣고 있노라면 비슷한 감정에 휩쓸린다. 오늘 지하철에서 파티셔플로 음악을 듣다가 François Samson의 연주와 조우하게 되었다. 내 짧은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속을 매만지고 지나갔다. 오월의 아침처럼 싱그러운 추억이, 나 홀로 삭힐 수밖에 없었던 삐뚤어진 상처가, 조용하게 불타오르는 염원이, 끔찍하고 잔혹한 복수심이 마음속을 어지럽게 지나갔다. 혹자는 이 곡이 지닌 설명할 수 없는 마력 탓으로 모든 책임을 돌리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속 편하게 그 의견에 동조하긴 아직 어렵다.

2.
<Skins>의 'Cassie'라는 에피소드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감정의 홍수에 빠져 버렸다. 거기에 이전 에피소드에서 토니라는 캐릭터가 합창단 앞에서 부른 'on the street where you live'를 듣고 있자니 술 한잔이 간절하게 생각난다. 어린 시절 <My fair lady>에 삽입된 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갑작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기에 출처조차 기억나지 않는 노래가 되어버린 것은 나만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잊어서는 안 될 노래를 잊어버린 것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about a boy>의 그 아름답던 눈을 가진 아역배우가 어느새 자라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보면 그저 시간의 힘에 모든 것이 무색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2008/03/06 23:11 2008/03/06 23:11

심야잡상

Posted 2008/01/24 09:19,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때때로 늦은 밤 향이 진한 커피를 마시며 비틀즈를 들으며 책을 읽고 싶은 밤이 있다. 또렷한 눈망울로 창밖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쌓이는 눈을 구경하고 싶은 밤. 다음날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보내고 싶은 저녁. 꼭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할 누군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정갈하면서도 담백한 문체로 쓰인 70년대 수필이나 대가들의 짧은 연애 소설. 너무 어둡지 않은 조명과 따스한 담요 정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억을 거꾸로 따라가다 보면 아직 턱수염이 나지 않았던 열 다섯 무렵에는 이런 밤 비틀즈 대신 스팅을 들었고 좁은 문과 달과 6펜스를 즐겨 읽었던 것 같다. 십대 후반에는 아이작 스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와 이름 모를 연주자의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들으며 츠바이크의 단편들을 읽어 나갔고, 스물 초반에는 별 의미 없는 메세지를 보내고는 밤새 답신을 기다리며 무심한 척 핸드폰과 창문을 바라보며 멍하게 보냈던 때도 있었다. 스무 살 넘은 사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고 애써 믿어버렸기에 이제는 별다른 애잔함조차 남지 않은 나의 사랑.

그때는 너무 괴로워서 어서 잊을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던 기억들도 시간 속에 흩어지고 바래 더는 조각을 이어 맞출 수가 없다. 나에게도 사랑에 들떠 있는 청년 시대가 있었던 것을. 안부 인사를 묻는 점잖은 편지인양 써내려갔지만 행간에는 간절한 소망과 들뜬 흥분을 담고 있었던 서간들로 채워졌던 시기가,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건강한 친구들과 봄바람처럼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맑고 뽀얀 얼굴의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때로는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덧없는 한 조각 감정의 먼지에 불과하지만 아주 가끔은 나에게도 그런 과거가 있었노라고 소리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바쁜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런 외침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마음속에 품은 단호한 결심 때문에 얼굴마저 서늘해진 지인들과 지친 일상에 표정마저 헐거워진 사람들 틈에서 나까지 메마르고 건조해졌다. 그리하여 더 이상 산들바람처럼 경쾌한 문장을 쓸 수도,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애정을 듬뿍 담아 안부 인사를 건넬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삶이고 쓰고 싶지 않지만 쓰지 않을 수 없는 늦은 밤의 지껄임이 아닐까?

2008/01/24 09:19 2008/01/24 09:19


Recent Posts

  1. 수상한 라트비아인
  2. Be on leave!
  3. 다시!

Recent Comments

  1. 항상 내게 꾸밈없이 솔직한 사람이... julia 2011
  2. 시간을 넘어 타임머신 같은 글이지... KRADLE 2011
  3.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비밀방문자 2011

Recent Trackbacks

  1. kz의 생각 keizie's me2DAY 2009
  2. 눈뜬 자들의 도시 The note of Legendre 2008

Calendar

«   2012/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Bookmarks

Site Stats

TOTAL 613215 HIT
TODAY 10 HIT
YESTERDAY 106 H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