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아침
Posted 2009/10/25 12:51,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국 내가 서있는 지평선이 전술한 이 슬프고 우울한 현실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온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국 내가 서있는 지평선이 전술한 이 슬프고 우울한 현실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온다
1.
스물일곱 가을은 위기의 계절이고 망실의 시기이며 불운으로 말문마저 막혀버린 시간이다. 그런데 쓰고 보니 어느새 첫눈마저 내린 겨울이 와 버렸다. 어깨너머로 흘려버린 어제의 작은 생채기들이 남기고 간 잔금들이 이제는 본격적인 붕괴를 알리는 전령이 된 이때에 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거리를 걷거나
지하철에서 보내는 무의미한 시간이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깊게 과거로 침잠해 있곤 한다. 무엇을 찾아 헤매는 것인지도 모른 채
기억 속 어딘가로 바쁘게 여행을 떠난 나는 사람들의 눈에 어찌 보일까?
사실 지금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향한 끊임없는 열정.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사실이 주던 그 총천연한 즐거움. 짧아지는 연필이 가져다주는 뿌듯함. 그 감정의 끝자락을 다시금 붙잡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심정이다. 고루하고 또, 고루한 삶이라 불평했지만 기실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음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은 없었다.
애석하게도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지는 않는다. 지금껏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가장 좋은 해법이
무엇인지 몰라서 당황했던 순간은 없었다. 입으로 뱉어내는 말에 거짓이 섞였을지언정 그 말로 스스로를 속여본 적도 없다.
하지만, 늘 문제가 되는 것은 무언가를 행하는 내 마음가짐이었다. 내 마음에 흡족한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싶다는 소박한 소망은 왜 이리 현현되기 어려운 것일까.
열아홉 겨울 같은 심란한 마음에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그런데 몇 주 째 전화가 꺼져 있다. 살아는 있는지 혹은,
무언가 중대한 결심으로 은둔을 선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그래서 서글픔을 지울 수 없는 스물일곱 가을 혹은
겨울이다.

3.
며칠 전 정년을 한 달 남긴 교수님
한 분이 크로스 볼펜과 300원짜리 30센티미터 자로 그래프를 도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마치 프린트한 것처럼 깔끔하고
아름다워 잠시 넋을 잃은 적이 있다. 크로스 펜의 선을 그리기에는 약간 둔중한 펜 끝으로 어떻게 저렇게 섬세한 커브를 그려낼 수
있는지 의아하던 난 결국 호기심을 못 참고 질문을 드렸는데 대답인즉슨 펜과 노트의 마찰을 최대한 줄인 채 펜을 지면과 90도를
유지하면서 팔꿈치를 축으로 캠퍼스를 사용하듯이 팔을 1/3 파이만큼 회전하면 된다는 것이 요체였다. 참! 한 가지 빼먹은 것이
있다. 한 40년쯤 그리다 보면 초밥의 달인이 밥알을 100개씩 정확하게 분배하는 것처럼 하얀 노트 위에 선과 공간을 분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나. 결론은 요체를 알아도 머리에 피도 덜 마른 나로서는 따라 그릴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란 말씀.
4.
스물일곱의 크리스마스는 비몽사몽 간에 지나가 버렸다. 시골집에 내려온 나는 이브 날에는 와인 한 잔을 마시자마자 잠자리로 직행했고, 크리스마스 날에는 난데없는 눈칫밥을 먹다가 체해 버렸다. 체한 김에 십 년 만에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며 밤새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명색이 연인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라는데 현관을 나갈 때마다 애교를 떠는 강아지만이 반기는 크리스마스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5.
한해의 끝자락에서 교훈 하나를 얻게 되었다. 아무래도 '누구나 자신의 상황을 가장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라는 교훈과 함께 일생동안 마음에 품고 다녀도 지나치지 않을 교훈이다. 요약하자면 '다른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고, 대범하게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로 멋진 사람이다.'라는 내용인데 기실 자신감이라는 견고한 기단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참을성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던 것 같다. 이 얼마나 졸렬하고 유치하며, 비겁한 행동인가?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단 하나도 양보하지 못하고, 단
하나도 수용하지 못하는 인생이란 얼마나 처연한 것인가? 어느 것 하나 빼앗겨서는 안 되고, 틀려서는 안 되며, 포기해서도 안 되는
사형대 위의 인간으로 사는 것이 동정받아 마땅할 삶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잊었을까? 미운 일곱 살처럼 울며, 큰 목소리만 내면 모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와 그것이 무엇 크게 다를까?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신뢰할만한 믿음이 없다는 사실은 불문가지다. 단지 목소리가 큰 사람이 되고자 지금껏 힘든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수용한도가 좁은 것은 반드시 타결되어야만 하는 협상에서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 얼마나 우울하고 몰염치한 혜택인가? 그런 혜택에 빌붙어 사는 삶은 또 얼마나 헐벗은 것일까? 이것은 타인의 관대한 도량에 기대 자신의 궁핍한 의견을 인정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신감이 부족해 목소리가 큰 사람으로 평생을 사는 일은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괴롭다. 이제는 이 못된 손님과 반가운 이별을 고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Thanks for your advice.
6.
정말 울고 싶었던 스물일곱의 마지막 날이다. 끝내 울지는 못했지만 먼 훗날 이 시기를 생각하며 선한 눈웃음과 섬세한 애정으로 이 시기를 묘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닌 것이라고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믿음으로 나를 신뢰해주는 몇몇의 애정밖에 없는 마개 잃은 유리병, 피처럼 촛농을 떨어뜨리는 양초 같은 시기였지만 곧 '즐거운 날'이 왔다고 말이다.
21살 봄부터 지난주까지 온갖 풍상을 함께 겪어온 크로스 볼펜을 버로워즈에게 앗겼다. 앗긴 충격이 어느 정도냐면 '너복설과'에 해당하여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크고 작은 시험을 함께 치렀고, 진심을 담은 수많은 말들을 함께 써내려갔으며, 수많은 커피집과 여행지에서 벗이 되어주었던 친구는 이제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기차에 앉아 혹은 비행기에서, 차창 너머를 보며 어깨너머로 흘러가버린 사건과 사람들을 묘사하던 녀석의 마지막이 이렇게 허무할 줄은 몰랐다. 누구보다 내 속마음을 잘 알던 녀석이었는데, 쓰기는 했지만 보내지 못한 채 사그라진 그 불꽃을 기억하는 유일한 녀석이었는데.
만약 알았다면 그 흔한 각인 한 번 해주지 못하고, 쓰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런 까닭으로' 밖에 쓰지 않는 펜들 사이에 너를 무심히 놔두는 일은 없었을 텐데. 사람들은 고작 볼펜 하나에 치졸할 정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나를 비웃겠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떠난 들 이렇게 헛헛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에게 새로운 리필심을 선물 할 때 짓던 표정 없는 그 미소를 본 사람은 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명예로운 은퇴를 허락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난 네가 지닌 행운을 포기할 여유가 되지 않았단다. 부디 나보다 더 좋은 주인을 만나 새로운 이름을 얻기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 뭣하면 나한테 오면 되는 것 아니겠어’라고 말하곤 했던 친구가 있다. 그 말을 던질 때마다 농담을 가장하긴 했지만 기실 마음마저 허튼 농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런 농담은 순천연한 농담이라기 보다는 슬쩍 마음을 떠보는 치사한 수작에 가깝다. ‘안녕’이란 인사와 ‘다음에 보자’라는 인사를 구분하는 나쁜 버릇을 지닌 나로서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서른쯤 되면 우아하지는 못해도 거짓말 같지는 않은 말을 던지게 될 줄 알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조차 없는데 녀석의 마음이 단호해지기 전에 내가 먼저 확신을 가지게 될거라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불순물이라고는 섞여 있지 않은 녀석의 단호함과 마주하고 나니 이래저래 입맛이 쓰다. 연인이 아니라 머슴을 찾는 것이 아니냐고 쏘아줬지만 녀석에게 비춰진 난 ‘Love is the only thing I wonder’이라고는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하고 거기에 더해 고집쟁이에 헌신 따위는 모르는 사내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이 글을 읽고 ‘나 같은 미인을 좋아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미안한걸’ 이라며 웃음을 터트릴 것이 뻔한데 내가 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모호함을 버리고 ‘I hope to write on your empty page’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출사표를 쓰는 셈이라고 위안해보지만 변명치고는 참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이른 새벽 그들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에 함께 일어났다. 그들은 짐을 챙겨 짊어졌다. 나막신이 바위에 부딪쳐 딸그락 소리를 냈다. 길을 걸어가면서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상상의 나래는 이미 거리의 환락을 쫓고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거리의 아름답고 육감적인 여자들만을 훔쳐 보았으며 바지리우스는 달콤한 술과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고 대리석 책상 위를 소리 내어 구르는 주사위의 음향에 귀를 세웠다.
이심 전심으로 그들은 격렬한 양심과의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두 사람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으며 메마른 입술은 기도를 중얼거렸으나 그들의 욕망은 끈끈하게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때 그들을 지켜보았다면 아마 틀림없이 순결한 순례자로 보기는커녕 절망에 빠진 사나이들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는 젊은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어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녀가 바삐 그 자리를 떠나자 퍼뜩 눈을 들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살 찐 맵시, 검은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삼단같이 늘어뜨려진 머릿단과 다갈색 목덜미, 매끈한 양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낭창거리는 모양새 좋은 허리, 구두를 신은 허여멀쑥한 다리 등이었다.
그 광경은 가련한 은자의 이마에 비지땀이 맺히게 했다. 머쓱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어떤 세찬 부끄러움과 답답함, 일종의 전율마저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며 이마를 소매 끝으로 문지르고 나서 마침 그녀가 되돌아 오는 모습이 눈에 띄자 얼른 눈을 식탁 위에 내리깔았다. 그녀는 아랑곳없이 음식을 내려 놓고 한동안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는 곧바로 사내의 마음 속에 일고 있는 곤혹과 착란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불청객의 인상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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