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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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5 어느 가을 아침
  2. 2007/12/31 스물일곱 (2)
  3. 2007/11/22 Good bye Cross!
  4. 2007/08/30 愛貰冊論 (4)
  5. 2007/08/03 출사표 (2)
  6. 2007/05/17 미인품평
  7. 2007/03/25 혼잣말!
  8. 2007/03/02 봄, 또 다시 (2)
  9. 2007/02/12 On my own (2)
  10. 2007/02/05 日常 小考
  11. 2007/02/02 우아하게 냉혹해지기 (4)
  12. 2007/01/29 십원 예찬 (2)
  13. 2007/01/16 Only the things the heart believes are true!
  14. 2007/01/06 (4)
  15. 2007/01/02 Caveat viator!(Let the wayfarer beware!)
  16. 2006/12/17 책갈피
  17. 2006/12/14 여행의 끝 (4)
  18. 2006/07/28 외출 (19)
  19. 2006/07/24 휴가 (2)
  20. 2006/07/13 술에 취하다
  21. 2006/07/12 장마(長霖)
  22. 2006/07/07 방황 아닌 방황
  23. 2006/07/01 Break time
  24. 2006/06/26 시작
  25. 2006/06/14 잡담
  26. 2006/06/09 바람처럼 흘러가는 일상 속에 (7)
  27. 2006/06/06 I'm ready
  28. 2006/05/20 murmur (4)
  29. 2006/05/08 I'm not Falstaff
  30. 2006/04/24 극장
날카롭지만 쓰디쓰고, 격렬하면서 고통스런 인식이 아침 나절의 나를 휘감았다. 운명에 투덜거리는 것이 멍청함의 또 다른 징후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면 크게 소리라도 질렀을 정도의 참담함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밀어 닥쳤다. 'deadlock'이라는 단어 외에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통찰력은 지혜의 정화지만 동시에 슬픔의 원천이며 그렇기에 자신은 운명의 방관자가 되어버렸노라고 아페르티프로 보기에는 지나친 몇 순배의 술잔과 함께 독백을 일삼던 시시한 소설의 쓰러져가는 한 인물이 생각난다. 그리고 나 역시 그 같은 인물로 늙고 그와 같은 epitaph를 가지게 되겠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국 내가 서있는 지평선이 전술한 이 슬프고 우울한 현실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온다

2009/10/25 12:51 2009/10/25 12:51

스물일곱

Posted 2007/12/31 07:11,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1.
스물일곱 가을은 위기의 계절이고 망실의 시기이며 불운으로 말문마저 막혀버린 시간이다. 그런데 쓰고 보니 어느새 첫눈마저 내린 겨울이 와 버렸다. 어깨너머로 흘려버린 어제의 작은 생채기들이 남기고 간 잔금들이 이제는 본격적인 붕괴를 알리는 전령이 된 이때에 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거리를 걷거나 지하철에서 보내는 무의미한 시간이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깊게 과거로 침잠해 있곤 한다. 무엇을 찾아 헤매는 것인지도 모른 채 기억 속 어딘가로 바쁘게 여행을 떠난 나는 사람들의 눈에 어찌 보일까?

사실 지금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향한 끊임없는 열정.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사실이 주던 그 총천연한 즐거움. 짧아지는 연필이 가져다주는 뿌듯함. 그 감정의 끝자락을 다시금 붙잡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심정이다. 고루하고 또, 고루한 삶이라 불평했지만 기실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음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은 없었다.  

애석하게도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지는 않는다. 지금껏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가장 좋은 해법이 무엇인지 몰라서 당황했던 순간은 없었다. 입으로 뱉어내는 말에 거짓이 섞였을지언정 그 말로 스스로를 속여본 적도 없다. 하지만, 늘 문제가 되는 것은 무언가를 행하는 내 마음가짐이었다. 내 마음에 흡족한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싶다는 소박한 소망은 왜 이리 현현되기 어려운 것일까.

열아홉 겨울 같은 심란한 마음에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그런데 몇 주 째 전화가 꺼져 있다. 살아는 있는지 혹은, 무언가 중대한 결심으로 은둔을 선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그래서 서글픔을 지울 수 없는 스물일곱 가을 혹은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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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필깎이 기능이 달린 연필 깍지는 연필 애호가에게 있어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항목이다. X-file에 열광했던 십대 중반에는 언제인가  연필 고무가 달린 노란색 Staedtler를 두 다스쯤 벌여놓고 쓰고 싶었는데 어느 사이에 변해버린 취향은 사춘기 소년의 소박한 소망 따위로는 만족할 줄 모른다. 혹자는 초등학교 앞 문구점을 중심으로 판매되는 요란한 장식의 연필 깍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깍지는 금속 메탈 소재에 A/S까지 가능한 물건이다. 어찌 되었건 지난 봄 잃어버린 연필 깍지를 새로 들였다. 지금껏 몽당연필 상태로 울고 있던 Faber Castell 참나무 연필들이 간만에 멋을 되찾고 책장 사이를 굴려 다니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에 이 녀석은 그라폰의 파인라이너를 장착한 단풍나무 수성펜과 더불어 요즘 내가 즐겨 쓰는 펜이 되었다. 떠나보낸 크로스의 빈 자리가 여전하긴 하지만 이제 슬슬 이 녀석들과 정을 붙여봐야겠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펜을 바꾼 이후에 사라졌던 열정이 슬슬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새로운 펜은 이 나이를 먹도록 나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기이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3.
며칠 전 정년을 한 달 남긴 교수님 한 분이 크로스 볼펜과 300원짜리 30센티미터 자로 그래프를 도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마치 프린트한 것처럼 깔끔하고 아름다워 잠시 넋을 잃은 적이 있다. 크로스 펜의 선을 그리기에는 약간 둔중한 펜 끝으로 어떻게 저렇게 섬세한 커브를 그려낼 수 있는지 의아하던 난 결국 호기심을 못 참고 질문을 드렸는데 대답인즉슨 펜과 노트의 마찰을 최대한 줄인 채 펜을 지면과 90도를 유지하면서 팔꿈치를 축으로 캠퍼스를 사용하듯이 팔을 1/3 파이만큼 회전하면 된다는 것이 요체였다. 참! 한 가지 빼먹은 것이 있다. 한 40년쯤 그리다 보면 초밥의 달인이 밥알을 100개씩 정확하게 분배하는 것처럼 하얀 노트 위에 선과 공간을 분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나. 결론은 요체를 알아도 머리에 피도 덜 마른 나로서는 따라 그릴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란 말씀.

4.
스물일곱의 크리스마스는 비몽사몽 간에 지나가 버렸다. 시골집에 내려온 나는 이브 날에는 와인 한 잔을 마시자마자 잠자리로 직행했고, 크리스마스 날에는 난데없는 눈칫밥을 먹다가 체해 버렸다. 체한 김에 십 년 만에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며 밤새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명색이 연인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라는데 현관을 나갈 때마다 애교를 떠는 강아지만이 반기는 크리스마스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5.
한해의 끝자락에서 교훈 하나를 얻게 되었다. 아무래도 '누구나 자신의 상황을 가장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라는 교훈과 함께 일생동안 마음에 품고 다녀도 지나치지 않을 교훈이다. 요약하자면 '다른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고, 대범하게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로 멋진 사람이다.'라는 내용인데 기실 자신감이라는 견고한 기단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참을성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던 것 같다. 이 얼마나 졸렬하고 유치하며, 비겁한 행동인가?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단 하나도 양보하지 못하고, 단 하나도 수용하지 못하는 인생이란 얼마나 처연한 것인가? 어느 것 하나 빼앗겨서는 안 되고, 틀려서는 안 되며, 포기해서도 안 되는 사형대 위의 인간으로 사는 것이 동정받아 마땅할 삶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잊었을까? 미운 일곱 살처럼 울며, 큰 목소리만 내면 모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와 그것이 무엇 크게 다를까?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신뢰할만한 믿음이 없다는 사실은 불문가지다. 단지 목소리가 큰 사람이 되고자 지금껏 힘든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수용한도가 좁은 것은 반드시 타결되어야만 하는 협상에서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 얼마나 우울하고 몰염치한 혜택인가? 그런 혜택에 빌붙어 사는 삶은 또 얼마나 헐벗은 것일까? 이것은 타인의 관대한 도량에 기대 자신의 궁핍한 의견을 인정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신감이 부족해 목소리가 큰 사람으로 평생을 사는 일은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괴롭다. 이제는 이 못된 손님과 반가운 이별을 고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Thanks for your advice.

6.
정말 울고 싶었던 스물일곱의 마지막 날이다. 끝내 울지는 못했지만 먼 훗날 이 시기를 생각하며 선한 눈웃음과 섬세한 애정으로 이 시기를 묘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닌 것이라고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믿음으로 나를 신뢰해주는 몇몇의 애정밖에 없는 마개 잃은 유리병, 피처럼 촛농을 떨어뜨리는 양초 같은 시기였지만 곧 '즐거운 날'이 왔다고 말이다.

2007/12/31 07:11 2007/12/31 07:11

Good bye Cross!

Posted 2007/11/22 14:44,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21살 봄부터 지난주까지 온갖 풍상을 함께 겪어온 크로스 볼펜을 버로워즈에게 앗겼다. 앗긴 충격이 어느 정도냐면 '너복설과'에 해당하여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크고 작은 시험을 함께 치렀고, 진심을 담은 수많은 말들을 함께 써내려갔으며, 수많은 커피집과 여행지에서 벗이 되어주었던 친구는 이제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기차에 앉아 혹은 비행기에서, 차창 너머를 보며 어깨너머로 흘러가버린 사건과 사람들을 묘사하던 녀석의 마지막이 이렇게 허무할 줄은 몰랐다. 누구보다 내 속마음을 잘 알던 녀석이었는데, 쓰기는 했지만 보내지 못한 채 사그라진 그 불꽃을 기억하는 유일한 녀석이었는데.

만약 알았다면 그 흔한 각인 한 번 해주지 못하고, 쓰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런 까닭으로' 밖에 쓰지 않는 펜들 사이에 너를 무심히 놔두는 일은 없었을 텐데. 사람들은 고작 볼펜 하나에 치졸할 정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나를 비웃겠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떠난 들 이렇게 헛헛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에게 새로운 리필심을 선물 할 때 짓던 표정 없는 그 미소를 본 사람은 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명예로운 은퇴를 허락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난 네가 지닌 행운을 포기할 여유가 되지 않았단다. 부디 나보다 더 좋은 주인을 만나 새로운 이름을 얻기를.
2007/11/22 14:44 2007/11/22 14:44

愛貰冊論

Posted 2007/08/30 22:58,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어린 시절부터 나를 보아온 친구들은 지금의 모든 노력이 먼 훗날 연애소설을 즐길 줄 아는 곱게 늙은 노인으로써의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이란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그들이 잘 내려진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재미난 소설 한 권에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수없이 봤기 때문이다. 지금 막 달콤한 입술을 훔친 사람처럼 만족감에 빠진 내 표정을 기억하고 있으며, 입으로는 '서시 같은 미녀'를 입술에 달고 살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탐독증에 걸린 사람마냥 책을 먹어치우는 삶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심이랄지 야망이랄지 것들이 남보다 부족하지는 않지만 기나긴 삶 동안 야망 하나만을 지주로 삼기란 무리다. 신내림을 받아 작두에 올라탄 이의 무아지경처럼 책을 읽는 동안의 나 역시 그런 몰아에 빠진다. 문장이 지니는 독특한 호흡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는다. 그때의 평화로움과 행복감을 알기에 되려 난 감정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진짜배기 사랑에 서투른지도 모르겠다. 진짜 사람사이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복잡한 수사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라든지, 세상 여자 모두가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독심술의 대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자주 잊곤 한다. 게다가 진짜 사람사이에서는 세상이 얼어버린 듯 멈추어버린 시간의 공백이 없다. 오 맙소사! 

친구들에게는 애완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든지, 정치적 성향이 유사한 사람과 결혼하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상 내가 빠져보고 싶은 사람은 훌륭한 서가를 소유한 사람이다. 읽기는 했으되 주머니 사정으로 사지 못한 특정 시기의 유산들을 보물처럼 품고 있는 서가도 좋고, 읽으려 마음 먹었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린 책들로 꽉 찬 서가도, 나와 비슷한 취향으로 가득 채워진 서가도 좋다. 굳이 많은 장서를 자랑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질이지 양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안목이 기호를 말하는 시대가 아닌가? 게다가 운이 좋다면 『Ex Libris』의 저자처럼 서재를 결혼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근래 들어 입에 올리기 시작한 새말 가운데 하나가 서점증후군이다. 자발적 독신증후군에 이어 친구와 주거니 받거니 이어지는 대화의 새로운 소재인데 요약하자면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기 보다는 되려 아름답다는 이야기이다. 둥그런 허벅지와 부풀어 오른 가슴을 지닌 립밤으로 윤을 낸 입술의 여자보다는 에밀 아자르를 읽는 여자가 더 눈에 띄는 법이다. 키엘 립밤을 쓰냐고 말을 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로맹가리와 진 세버그의 이야기로 말문을 여는 것은 쉽다. 굳이 대문자로 쓰인 폴리오가 무엇인지 인큐내뷸러가 무엇인지 몰라도 된다. 그저 드라마보다 소설을 소설보다 나를 조금 더 좋아해주면 그만이다.

P.S.
장난 반, 투정 반. 나머지는 하릴 없이 내리는 지겨운 비때문에
2007/08/30 22:58 2007/08/30 22:58

출사표

Posted 2007/08/03 23:02,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 뭣하면 나한테 오면 되는 것 아니겠어’라고 말하곤 했던 친구가 있다. 그 말을 던질 때마다 농담을 가장하긴 했지만 기실 마음마저 허튼 농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런 농담은 순천연한 농담이라기 보다는 슬쩍 마음을 떠보는 치사한 수작에 가깝다. ‘안녕’이란 인사와 ‘다음에 보자’라는 인사를 구분하는 나쁜 버릇을 지닌 나로서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서른쯤 되면 우아하지는 못해도 거짓말 같지는 않은 말을 던지게 될 줄 알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조차 없는데 녀석의 마음이 단호해지기 전에 내가 먼저 확신을 가지게 될거라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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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마음 한구석으로는 드라마나 소설에나 어울릴 상황 전개를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서서히 나이란 것을 먹고, 그러다 보니 쌓인 신뢰와 시간이라는 덫에 물리는 상황 연출을 말이다. 그렇기에 ‘좋긴 하지만 이제와 새삼스럽게’란 말로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자 했던 친구들의 시선을 속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후회할 것이라는 친구들의 협박에 ‘나중에 술 한잔 마시면서 털어버리면 되는 것 아니겠어’ 하고 대거리를 했던 만용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불순물이라고는 섞여 있지 않은 녀석의 단호함과 마주하고 나니 이래저래 입맛이 쓰다. 연인이 아니라 머슴을 찾는 것이 아니냐고 쏘아줬지만 녀석에게 비춰진 난 ‘Love is the only thing I wonder’이라고는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하고 거기에 더해 고집쟁이에 헌신 따위는 모르는 사내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이 글을 읽고 ‘나 같은 미인을 좋아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미안한걸’ 이라며 웃음을 터트릴 것이 뻔한데 내가 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모호함을 버리고 ‘I hope to write on your empty page’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출사표를 쓰는 셈이라고 위안해보지만 변명치고는 참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2007/08/03 23:02 2007/08/03 23:02

미인품평

Posted 2007/05/17 11:07,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사람마다 제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천성에 가까운 고약한 버릇이 하나씩 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 천성에 가까운 버릇이 거친 말버릇이 되기도 하고, 고약한 술버릇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 경우에는 무엇일까? 사실 열거해 보자면 내 고약한 버릇이 한두 개로 끝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제약이 가해진다면 까까머리 중학생 시기부터 지금까지 친구들과 길을 함께 할 때면 단 한번도 빼먹지 않은 그 일을 골라야 할 것 같다.

장황한 서두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일은 이른바 ‘미인품평’이다. 좋게 말하면 서로의 미적 감각을 뽐내는 치열한 경연의 장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겁 많은 사내 녀석들의 시답잖은 입담에 불과한 이 버릇이 내가 혐오해 마지 않으면서도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이 된 까닭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아는 사실이라고는 언제부터인가 ‘품평회’에 끼어들어 말하는 나를 저주하고 욕하는 자성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을 거둘 수는 없다. 한 번 끼어든 노름판에서는 쉬이 빠져나올 수 없듯이 내가 빠진 수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게 나를 빨아들인다. 설령 그것이 스스로를 천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해도 말이다.

물론 아주 가끔은 ‘의견 거절’이라는 표현으로 이런 난처한 상황에서 빠져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의견 거절’ 뒤에 숨겨진 말들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저렇게 보여도 민낯은 아마 다를 꺼야’ ‘저 몽롱한 안개 눈썹 덕분에 눈에 총명함이 없네’ ‘간장 녹이는 살품!’ ‘가선 진 목 때문에 실격’ ‘잠이 사이를 진지하게 탐구해 볼만 하다’ 때로 아주 가끔은 나 스스로에게 ‘넌 지금 여신의 개입 이전에 갈라테아를 바라보는 피그말리온일 뿐이야’하고 세뇌를 걸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진지하게 이 못된 버릇을 내 몸에서 지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하는 행동이 본질적으로는 익명이란 그림자 속에 숨어 거칠고 치졸한 말을 쏟아내는 쏟아 내는 무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같은 진지한 깨달음 때문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발견한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며 내쉬는 어떤 이의 한숨 때문이다. 며칠 전 학교를 배회하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린 채 친구에게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쏟아낸 적이 있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쏟아 부었으면 그 미색이 저렇게 된 거야? 그 놈팡이는 제 놈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나 알까?’ ‘뭐가 누군데 그래’ ‘3시. 작년 봄 내가 열광했던’

차를 사러 들어간 매점에서 다시 그녀와 마주친 나는 표정 없는 눈으로 무심한 듯 한데를 바라봤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을 때 커다란 전신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사슴 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내쉬는 한숨을 목격했다. 그 순간에나 그녀가 우리의 대화를 전부 들었음을 내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처음 본 사람처럼 모른 척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사실이 흔들리지 않는 진리로 다가왔다. 지독하게 운이 없는 하루라고 웃어 넘기기에는 그 한숨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

그 날 이후였던 것 같다. ‘미인품평회’에서 쏟아냈던 수많은 말들이 형틀이 되어 내 주리를 틀어대기 시작한 즈음은. 실상 형틀이 자극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마음의 짐이다. 무언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누구한테도 책망 받지 않는 상태야말로 극악하지도, 그렇다고 지선하지도 않은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형벌이다.

'미인 품평' 없이 친구들과 함께 하는 산책은 어딘지 허전하다. '미인 품평' 마저 할 수 없다면 갑갑하게 막힌 내 삶은 소소한 일탈 마저 허락되지 않는 극도로 무미 건조한 것이 되고 만다. '미인 품평' 이 없다면 무슨 핑계로 귀에서 이어피스를 뽑고,  책에서 눈을 떼야 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할 때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믿어보는 것을 빼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채로 말이다.

2007/05/17 11:07 2007/05/17 11:07

혼잣말!

Posted 2007/03/25 17:49,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대학에서의 마지막 하루들을 보내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가운데 하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같은 수업을 듣게 된 아직은 어린 친구들에게 빠져들어 보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 사실이다. 이제는 '새신랑'에서 '헌신랑'으로 전락하고 있는 형님들이 그렇게 말하던 복학생의 반사이익 같은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흘러간 과거가 다르기에 어쩔 수 없이 발견되는 그 삶의 간격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향수'를 보러 가겠노라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그네들 옆에서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전 감각을 되살려 생선더미에서 태어난 그루누이를, 그리고 그 작은 코를 상상하며 이야기의 조각들을 끼워 맞추고 있는 내가 참으로 낯설다. 결론적으로 그네들이 열광하는 것들에 나는 무지하고, 그네들 역시 내가 열광하는 것들에 무지하다. 이런 간격을 매울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 한다면 그 놈 참 대단한 녀석이다!

 쏟아지는 두툼한 Case materials들 틈바구니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일주일이 훌쩍 흐른다. 하루라도 게으름을 부리면 어느 사이에 감당하지 못할 만큼 쌓이는 짐들이 만들어 내는 암초사이로 표류하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하루쯤 암초사이로 배를 몰아대는 편벽한 내 습성은 여전히 그대로다. 하루쯤 난파선이 되어 황망한 표정으로 유령처럼 교정을 배회하는 그 습성에서 언제쯤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요즘 들어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하나는 'Am I Falstaff?"와 'Where is my G. Taro?'라는 질문이다. 작년에 떠났던 여로에서 스트랫포드도 아닌 파리의 바스띠유 광장에서 Falstaff란 이름의 술집을 발견한 적이 있다. 자리에 앉아 삼페인 잔에 제공되는 맥주를 홀짝이려는 찰나 머릿속으로 그리던 Falstaff와 너무나 닮은 한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분 좋은 발견이란 듯 왼손 검지로 삼페인 잔을 만지작거리려는 찰나 그들에게서 미래의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15년 쯤 후에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입구에 설치된 조잡한 Falstaff의 모형처럼 내 존재를 웅변적으로 대변해주는 인물이 어디 또 있을까?

 아무리 침묵과 겸손, 그리고 평화로움 지배하는 세계로 편입되어 고요한 삶을 살고자해도 세상은, 삶은 나에게 그런 것들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시끄러운 Falstaff가 되어 내 삶을 촛농처럼 낭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Falstaff의 삶이 즐거운 것이라 해도 난 그런 삶을 참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Falstaff의 삶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줄 어떤 계기인지도 모르겠다.

 언제인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먼 옛날 앙드레 말로의 짧은 전기에서 게르다 타로의 사진을 조우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언급된 짧은 단락을 읽으며 로버트 카파와 그녀가 만들어 냈던 모종의 광휘를 발견하게 되었다. 훗날 그것이 매우 현실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농담 같은 사기극이고, 그 소품 같은 사기극이 종국에는 아름다운 로망이 되었으며, 다섯 개의 전쟁을 누빈 종군기자가 첫 번째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심장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 순간 이후 난 마음속으로 게르다 타로 같은 사람이 내 삶에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끊임없이 생각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건달에 가까웠던 아마추어 사진기자의 서투른 삶 속에서 운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끌어 낼 줄 알았던 동시에 짙은 사랑에 결코 질식되지 않았던 그녀 같은 존재가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나 이 지독한 수렁에서 건져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우렁각시 반 평강공주 반이 섞인 그런 이상적인 존재를 꿈꾸는 내가 어리석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리석음을 수없이 반복하며 어리석게 사는 것은 나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의 공통 생활양식이다.
2007/03/25 17:49 2007/03/25 17:49

봄, 또 다시

Posted 2007/03/02 18:08,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보니 어느새 봄이다. 들숨마다 꽃내음이 가득 찬 봄은 아니지만 제법 따뜻해진 햇살이 아침을 반기는 그런 봄. 그리고 그런 봄을 맞이해서 이런 저런 소소하지만 중요한 일들을 무사히 넘겼다. 3월이 시작되기 전에 복학생 친구 녀석들과 '소주 한 병'짜리 모임도 가졌고,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던 복잡한 일도 거의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인터넷 서비스를 연결하고, 편지쓰기나, 주소록 정리 등의 소소한 봄맞이 연례행사만 끝내면 된다.

 매 끼니처럼 반복되는 야근에 지친 친구들은 아직도 학생이란 신분을 보유한 나에게 부럽다는 말을 던지고는 한다. 하지만 작년 봄과 올해 봄은 느낌이 너무 다르다. 올해 봄은 작년 봄에 군필자로써 느꼈던 홀가분함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대신하고 있는 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정을 가득 매운 신입생들의 활력과 비교해보자면 내 모습은 참으로 '늙수레'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숨기려고 해보았자 숨길 수 없는 세월이 준 선물이라고 자위해보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모습이 참 부러운 것이다.

 원형극장을 담은 백주년기념관의 지하층의 앉아 독특한 블랜딩의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학교 당황해 있으려는 찰나 크리스천으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물건이 옆자리에 앉는다. 어여쁜 처자라도 반갑지 않은 그 상황에 나못지 않은 늙수레한 인물이기에 정중한 축객령을 내렸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참 만만한 인물로 변했나보다. 아니면 그런 축객령이 레기오투스의 스페인 단검처럼 그의 신앙심에 불을 지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자기 말을 꺼내놓기 시작한 태도가 역린을 건들었다. "제가 자리를 피해드릴까요? 아니면 그쪽에서 피해주실래요?" '꺼져버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수많은 말 가운데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그 말이 입술에 걸렸다. 쳐진 어깨로 걸어가는 그 물건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난 정말 지옥에 떨어져 마땅할 그런 나쁜 사람이 맞는가 보다.

 해마다 봄이 주변에 내려앉을 무렵이면 무언가 색다른, 인상 깊은 한 해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색다른 인상' 대신 내 삶에 고명으로 얹히는 것은 낮은 농도의 우울과 몽상이다. 등을 침상에 뉘이자 말자 잠에 빠져드는 일상이 오기 전까지 나를 점령하고 있는 그 기분 말이다.
2007/03/02 18:08 2007/03/02 18:08

On my own

Posted 2007/02/12 22:53,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억지로 띄운 굳센 표정 같은 것 따위로는 오랜 지기에게 속마음을, 걸음걸이만 보아도 들어나는 심리를 부모님께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로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또 다시 만나게 된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나지만 화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자아에 생긴 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갈 때는 차라리 아예 부셔버리는 편이 낫다. 자신감의 기초가 실력이 아닌 기대 혹은 꿈에 밑바탕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위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아를 포기하는 일은 어렵지만 헛된 자아를 지키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보다는 뭐든 다시 시작하는 편이 더 낫다. 그것만이 새로운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라틴 격언 가운데 'Fidem qui perdit, nihil pote ultra perdere.'라는 문장이 있다. '명예를 잃으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라는 문장이다. 나 자신의 부적절함과 소소한 운명의 농간 덕분에 이 격언이 의미하는 상황을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스스로의 나태함과 운명의 냉혹함에 백기 항복하고 무장해제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목까지 내놓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등골에서 느껴지는 싸리한 서늘함을 느끼며 하루를 사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다. 이제 시간이 주는 유용함을 모두 써버렸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시기는 항상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기로에서였다.
2007/02/12 22:53 2007/02/12 22:53

日常 小考

Posted 2007/02/05 00:03,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봄처럼 포근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멀리서는 따사로운 햇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강아지는 창문 아래에서 호기롭게 낮잠에 빠진다. 그런 강아지를 보며 초쿄파이 1/4조각으로 잠을 방해하는 것이 요즘의 내 일과이다. 바쁜 식구들을 대신해 집안 청소며,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 착한 아들 노릇도 해보고, 외출할 의도가 없음에도 착실하게 면도를 해본다. 열흘 가까이 사람 구경조차 못했음에도, 매력적인 향으로 꼬일 사람이 없음에도 샤워 후에는 스킨과 로션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게다가 마무리로는 향수까지 뿌려본다. 덕분에 서재에서는 늘 은은한 사과향이 맴돈다. 책상에 앉아 연필을 붙잡고 있노라면 손목을 타고 오르는 연한 향에 마냥 행복하다. 봄 분위기가 나는 푸른색 스프라이트 셔츠를 입고, A8을 타고 흐르는 Rita Calypso의 목소리를 친구 삼아 책장에 빠져든다.

왼손은 무의식적으로 찻잔을 찾아 책상을 헤맨다. 몇 해만에야 화해한 Earl Grey는 서서히 나를 중독 시키고 있다. 햇수로 따져보니 만으로 4년을 꽉 채운 냉전 기간이었다. 가끔은 12시가 넘도록 깨어있는 밤들이 있다. 그런 날이면 음악을 친구 삼아 창밖을 바라보며 겨울밤의 별자리를 감상하는 일 대신 예전처럼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싶기도 하다. 낮에도 제대로 전화를 챙겨 받는 일은 좀처럼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통화와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3년하고 몇 개월만의 일이다.

화해는 그것만 아니다. 에드몽 당테스가 메르세데스에게 말했던 '스물 넘은 사내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있은 지 4년 만에 다음에 만날 진짜 약속을 했다. 다음에 만날 약속이 뭐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일까 의아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다음에 만날 약속이란 나에게 그 어디에도 견줄 바 없는 귀한 선물이나 진배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자, 나를 안도하게 만드는 말. '까다로운 기호 덕에 만족을 모른다' 라는 편견을 사긴 해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은 단순하다.

'다음번에는 커피 한 잔'. '다음번에는 영화 한 편', '다음번에는 뭐'. 오늘이 끝이 아니라 다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정말 중요하다. 맺고 끊는 것이 불분명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연연하는 것은 아니지만 잃고 싶지 않은, 잃게 되면 너무나 큰 박탈감을 감수하게 될 인연들이 나에게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 것들이 바로 나란 인간의 '살아 있는 갈대들'이다. 그 '살아 있는 갈대'가 있기에 난 기록상의 존재가 아닌 순간의 마음과 기분을 나눌 수 있는 진짜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P.S.
『보헤미안 스캔들』을 다시 읽다 주석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In his eyes, she(the woman) eclipses & predominates the whole of her sex' 잠시 마음을 맡길 수 있는 나무 그늘 혹은 의탁처가 되진 못하더라도 지금껏 내가 받은 느낌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문구는 없을 듯하다. 아울러 이번 주는 정말 바쁜 한 주가 될 듯하다.

그리고 상경 일자를 되묻는 친구들에게 대답하자면 설 이후에나 지금 만끽하고 있는 고요한 평화에서 벗어나 인세로 돌아갈 예정이다. 몸이나 마음이나. 자신감이나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상태다. 물보다 차를 더 많이 마시는 것이 탈이긴 하지만, 음지를 이용해 보는 영화 속의 거리들을 내가 걸어보았다는 것에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이 곳이 탈속한 곳이긴 하지만 말이다.
2007/02/05 00:03 2007/02/05 00:03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터인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우아하게 냉혹해지기’와 같은 뜻이 되었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논리 검증 같은 것은 모른 척 잠시 제자리에 놓아 두자.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된다’ 와 ‘우아하게 냉혹해지기’의 상관관계이지 이것이 보편성을 지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니 말이다.

‘우아하게 냉혹해지기’는 역설적이지만  ‘촌스럽게 순진하기’ 단계에서 비롯된다. 한껏 고양되다 못해 과잉에 가까운 감정 상태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촛농처럼 삶을 낭비하던 A는 좌절과 배신 등 복수극에 등장할 수 있는 모든 소소한 사건들을 다 겪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게 된다.

A는 그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아니 정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촌스럽게 순진하기’가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 방식이며,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보다는 비웃음을 얻기에 딱 좋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A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바꿔 놓는다.

열렬하게 타오르던 감정은 삭막해지고, 끝을 모른 채 이어지던 말은 잠잠해지며, 기분 따라 움직이던 하루는 꽉 짜인 스케쥴에 관리되는 하루로 변한다. 웃음이 줄어드는 대신 비웃음은 늘어가며, 칭찬보다는 논쟁과 비판에 익숙해진다. 아니 그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어든다. 무관심과 무신경함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아름답거나, 멋진 존재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며, 귀찮다라는 말이 쉽게 입에 오르내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지금 ‘촌스럽게 순진하기’ 단계를 지나 우아하면서도 쿨함을 지향하는 단계에 접어 들었다. 냉정하게 잇속을 챙기고, 알뜰하게 삶을 보살핀다. 예전에는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이 열정과 진솔함이었는데(가끔은 무모함이기도 했다) 이제는 유용성을 토대로 가치를 판단한다. 시간과 돈이 중요해진다. 혼자 보는 영화에 익숙해지고, 말수가 줄어드는 만큼 통화량도 줄어든다. 자기에 대한 투자는 불어나는데 자기 밖의 모든 이들에게는 점점 인색해진다. 과연 이런 것이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일까?

가끔은 예전의 ‘촌스럽게 순진하던’ 그때가 그립다. 사랑한다는 말을 손쉽게 입에 담을 수 있던 그때가 말이다. 지금은 사랑조차 과거처럼 명료하지 않으며, 미움도 강렬하지 않다. 더이상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짓는 일은 없다. 하지만 가끔은 끈적하게 사랑한다 말하고, 집요하게 손을 붙잡고 싶다. 전화를 들었다가 왠지 모를 어색함에 다시 집어 넣는 것은 컬러링만 듣다 전화를 내려놓는 것보다 더 촌스럽다. 과연 ‘우아하게 냉혹해지기’가 정말 우아한 것일까? 치촐함과 상처를 두려워 하기 때문에 피하고 숨는 것을 그렇듯하게 포장하는 것은 아닐까? 
                                                                                                                          28th, Jun, 2005
P.S.
스물 다섯 6월에 작성한 글. 이 글을 이제서야 발견한 이유는 폴더 정리의 허술함 탓이 크다. 아니 조금 더 냉정하게 따져 보면 당시에 '우아하게 냉혹해지기'란 문제는 내 삶을 압박하던 진짜 두통거리였기에 결론이 나지 않은 화제로 삶을 더우 복잡하게 만들 의향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것과 화해한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머리속을 맴도는 문장은 '내 삶도 꽤 재미난 것이었군'이란 한 마디뿐이다.
2007/02/02 00:41 2007/02/02 00:41

십원 예찬

Posted 2007/01/29 20:33,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지기와 나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대표적인 '십원'짜리들이다. 가지기에는 모양이 나지 않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평소에는 거의 용도가 없으나 아주 가끔은 그것의 부재가 아쉬운 존재. 냉정해서 나쁠 것이 없다고 믿는 우리로서는 '십원'짜리 이론을 통해 스스로를 반성한다. '십원'짜리에서 벗어나 고액권이 되고 싶지 않으냐고 스스로를 꼬드기기도 하고 어째서 우리가 '십원'짜리에 불과한지 심도 있게 고찰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고찰의 결과는 항상 같다. Pros, Cons가 뚜렷하게 들어나는 사람들은 신비감이 없다. 신비감이 없다면 내재가치가 과대평가되는 법이고, 낮은 평가가치는 가격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차대조표처럼 Pros와 Cons의 차변과 대변이 딱 맞아 떨어진다면 더 이상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십원'짜리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도 나쁘지 않다. '십원'짜리들에게는 adventuress가 따라 붙는 법도 없고, 웬만한 실수 정도는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다. 홀로 즐겁게 사는 방법을 터득하기만 한다면 제법 괜찮은 외관을 유지할 수도 있다. 가끔씩 까닭 모를 우울함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는 마의 시간대가 짧게 존재하긴 하지만 고액권이 되어 진폭이 큰 희비의 쌍곡선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그 여유를 스스로의 삶을 돌보는데 사용할 수 있다. 이야기를 사랑하고, 차를 좋아하며,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열렬하고 극적인 그 무언가를 누릴 수는 없지만 소소하지만 따사로운 그 무엇을 즐길 수는 있다. 삶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운데 하나가 사랑이 아니라면 '십원'짜리 매력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가끔 '십원'짜리에게도 참을 수 없는 순간은 찾아온다. 이른바 情理解固의 시간인데 이것은 '십원'짜리로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시간과도 같다. 고액권에 투자 결정을 내린 누군가가 과감하게 '십원'짜리를 버리기로 마음먹은 순간이다.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엉켜있던 인연의 매듭은 어느 순간 헐렁해지고 예의바르면서도 감각적인 문구로 포장된 최후통첩이 도착한다. 안녕이란 말을 뜻하는 문장이 얼마나 많을 수 있는 지 셈하는 일은 흥미롭지만 그 셈의 대상이 되는 일은 전혀 즐겁지 않다. 그렇게 시간은 슬픈 노래처럼 흘러간다.

그러나 아직 절망하기는 이르다. 아니 절망할 필요조차 없다. '십원'짜리로서의 경험은 삶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들과 포기해도 되는 것들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며, 헛된 맹세의 공허함을 포착하는 능력과 순간을 영원으로 간직하는 신기한 재주를 제공한다. '십원'짜리로서의 삶은 집중력이 필요한 관찰과 인내심이 필요한 기다림, 협상의 윈셋을 넓히는 포기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얻는 진짜 수확은 바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자신감이다. 뭐 그러니 '십원'짜리 매력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P.S.
지기에게. 앞으로 다시는 소위 '십 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것이 오늘 결정한 내 두번째 정책이야. 그러니 자네도 프렌즈를 접게나. 그리고 고마워. 김군에 말에 의하면 '그 녀석도 누군가가 필요할 때'가 있을텐데 마침 그때가 요 며칠이었나봐. 새해가 되면 정말 어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께. 내 이름으로 약속할께. 그리고 만약 어제와 같은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면 지체없이 말해주어야 해!    
2007/01/29 20:33 2007/01/29 20:33

책에 관하여
한국을 비운 틈에 출간된 책들을 서가에 채워 넣었다. 신뢰하는 리뷰어들의 침묵(개중에 두 곳은 링크 자체를 잃었다)을 증거 삼아 2006년 하반기의 도서 시장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서점에는 절판과 반값 세일 사이의 경계선에 놓인 놓치고 싶지 않은 책들이 몇 권이나 쌓여 있었다. 결국 언제 읽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재방의 거대한 뱃속에 일단 던져두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책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노릇인 모양이다. 참 지난여름에 서재에 던져두고 갔던 책들의 대부분은 연말을 이용해서 먹어 치웠다. 제대로 된 리뷰를 쓰기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아 짧은 코멘트로 된 긴 리스트로 작성중인데 그마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지난봄에 빼놓은 리스트와 뒤섞여 1종 프로그램 오류를 토해내고 있는 참이다.       

배우에 관하여
배우에 관한 내 사고 방식은 지극히 폐쇄적이고 불건전하기 짝이 없다. 남자 배우들은 애당초 인지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으며 여자 배우의 경우 극중의 캐릭터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대의 최신 문법에 맞춰 그녀가 지닌 이미지와 순간순간의 매력에 매료될지는 몰라도 희노애락을 모두 아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삭막하지만 다소 애매한 애늙은이로 십대를 보낸 나로서는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반응이다. 그런 것에 열광하기에는 내 십대는 꽤 바빴고, 스스로가 유치하다고 정의내린 행동들을 실행에 옮길 만큼 용감하지도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난 사람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천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견지해오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극중 캐릭터에 대한 호감으로 무심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매력적이지만 좌절을 두려워하는, 도도하지만 유리처럼 쉽게 부셔지는 인간을 발견했다. 아니 극중 캐릭터란 분장이 한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란 것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 무엇보다 이런 성격에 저항력이 0에 가깝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앞으로 어떤 발언으로-아마 친구들이 믿고 있거나 알고 있는 나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일 것이다-친구들에게 당혹감을 선사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오지에서의 일상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로 햇살이 따스한 하루였다. 꽤나 쌀쌀하던 지난 한 주를 짧은 반바지차림으로 지냈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식구들은 긴바지와 함께 꺼내 입은 분홍색과 하얀색이 반복되는 화사한 스프라이트 셔츠에 한마디씩 한다. 밖에 돌아다니는 것이 취미인 녀석이 공부한답시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란 어머니의 말씀이 뒤통수에 와 닿는다.

오지에서의 삶은 이렇다. 지난 2주 동안 누이를 제외한다면 젊은 처자라고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고, 택배 배달 청년들을 제외한다면 아버지이외의 성인 남자 역시 보지 못했다. 거실 소파에 앉으면 지리산 반야봉이 보이고, 부엌 창문으로는 이름 모를 7부 능선에 쌓인 눈이 보인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길에 들리는 바닥이 들어난 작은 저수지에서는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서재방에 앉아 커피와 홍차, 녹차로 이어지는 차의 대향연을 즐기기 여념 없다.

사실 그럴듯한 꾸밈 뒤에 숨겨진 진실은 이렇다. 시간은 많은 것들과 화해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화해는 미움과 증오를 버리게 만들었고 그것은 다시 모든 감정이 비롯되는 어떤 시작점을 앗아가 버렸다. 화해는 분명 기분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 화해는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해 끝에 내가 얻은 평화는 조용한 것인 동시에 공허한 것이 되었으며 이제는 어디에 마음을 투묘해야 할지 모르겠다. 바람이 노크하고 지나갈 때마다 유리창에 비친 건장한 사내의 등을 획인하게 되지만 그 등으로 덥혀줄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방안을 산책하듯 맴돌며 낯선 거리를 걷던 순간이며 대담한 포옹과 긴장감 넘치던 한밤중의 산책 같은 것을 비를 맞으며 세상이 무너진 듯 방황하던 오래전의 못난 내 모습에 겹쳐보는 것이 아닐까?

Post Scriptum
Happy birthday to you!
2007/01/16 00:05 2007/01/16 00:05

Posted 2007/01/06 00:29,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오지에서 하루쯤 탈출해보려는 계획은 영하 7도의 매서운 바람과 폭설 속에 좌초될 듯싶다. 산사면을 타고 내려오는 추운 바람은 어찌 참아보겠지만 눈밭을 헤치고 나가는 일만큼은 인내심을 초월하는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십년지기에게 여행이 남긴 흔적들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대로 눈이 내린다면 계절이 풀리기 시작하는 2월 말에나 녀석들을 보게 될 것 같다.

오랜 여행을 핑계로, 마음을 번잡하게 만드는 복잡한 인파의 물결이 싫다는 이유로 들어앉은 서재방에서의 일상은 실상 마음을 공허하게 만든다. 내 삶에서 이렇게 안부 인사를 듣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까닭 없이 친구들의 애정 어린 표현이 그립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상당히 꼴사나운 바램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예전과 다르게 '잘 지내시는가?'란 이 짧은 인사마저도 서로를 버겁게 만드는 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바쁜 삶 속에서 짧은 서신 한 장을 쓸 마음의 여유조차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리라.

결국 오후에는 지친 내 정신을 잠시 뉘일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는 K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휴가 중이라는 그녀의 답신에 잠시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털었다. 가짜 점쟁이 흉내를 내는 대상가운데 이 녀석만큼은 제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녀석의 오랜 요구를 수락하자면 녀석은 내가 아껴둔 '나무 그늘'이다. 그녀와의 관계맺음은 내 삶의 가장 거대한 실험가운데 하나이며 그 끝을 예상하는 일마저 두렵다. 우리 사이가 제롬과 알리사같은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번번히 강조하긴 해도 삶이 내게 허락한 것들 가운데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며,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능력을 가진다해도 절대로 번복할 수 없는 추억을 공유했던 내 삶의 증인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궁벽한 진짜 오지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는 내 안부를 38일 동안 물어봐 달라는 쩨쩨하고, 구차하며, 비겁한 청을 아무 곳에나 확 던져버리고 싶은 요즘이다. 염치없는 무뢰배 같은 청이 입속을 맴도는 것을 보면 스물일곱 수는 세월에 바스러진 돌처럼 숨기고 싶은 내면의 균열을 들어내는 위험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2007/01/06 00:29 2007/01/06 00:29

 내가 삶에서 가장 아끼는 시간들은 서시처럼 아름다운 처자와 해후하는 순간도,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가며 역전의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순간도 아니다. 정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들은 서재방에 앉아, 혹은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며 책장을 넘기려는 찰나다. 재미난 소설을 만났을 때 내 뺨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재미에 온몸이 떨려 온다. 문장에 춤추는 내 정신은 어느 사이에 소설 속 한 장면으로 걸어들어 가고 있다. 주인공들의 호흡에서 내 삶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들을 동경하는 동시에 경멸하며,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해 마지않는다.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보다 더 강렬하게 몰아치는 감정의 범람을 지켜보면서 가끔은 나 자신이 또 다른 피그말리온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어떠랴.

서재방에 넉넉한 쇼파를 가져다 놓았다. La Traviata를 틀어 놓고 넘기는 의무감의 펄프 덩어리와 밀린 책들 속에서 숨을 쉬고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번뇌도, 즐거움도 아닌 애매한 감정의 덩어리가 느껴진다. 아직까지 이 감정의 덩어리를 정의하는 정확한 말을 찾아내진 못했다. 그냥 사람이란 존재가 실존하기에 갖게 되는 범주화되지 않은 감성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해답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뭐가 대수랴? 삶에는 이것 말고도 답을 모르는 문제가 무궁하다.

근래에는 막내 누이와 <환상의 커플>이란 드라마에 빠져 있다. 만화처럼 유치한 드라마에 홀딱 빠져 버린 내 모양새가 우습지만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유는 분명하다. 잘난 척하며 고상을 떨어보지만 사람이 느끼는(혹은 내가 느끼는) 감정의 베이스는 그렇게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질감을 자극하면서도 기분 나쁘게 만들지 않는 그 재주에 그냥 져주기로 마음먹고 나니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친 김에 조금 더 선심을 쓰자면 감정의 맥문을 틀어쥐고 쥐었다 놓았다하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펄프 덩어리를 푸는 실력이 어떤 영역에서는 과거보다 나아진 부분도 있는 반면, 어떤 영역에서는 참으로 고지식해진 부분도 있다. Cunning이란 단어를 좋아하던 나였는데 어느새 우직한 인간이 되었나 보다. 우직한 인간의 삶은 늘 이용당하고, 상처 입으며, 가슴 속이 숯 덩어리가 되는 숙명을 따른다. 우직한 인간의 삶은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삶보다는 편안한 삶이 더 좋다.  

어느 사이 스물일곱 수다. 이제는 십년지기란 말이 평범해졌고 청춘에 얽힌 소소한 이야기들 역시 나이를 먹었다. 나이를 먹은 것은 비단 추억만이 아닌 모양이어서 그마저 거의 남지 않은 생기발랄함과 사랑에 대한 갈망을 함께 잃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음모로 석류를 먹고 반년은 내 세상 반년은 딴 세상에서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한다. 해야 할 일들은 많지만 해놓은 일들은 없는 이 나이를 저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만은 그 저주마저 귀찮아져 백 원짜리 하나 쓰기 쉽지 않은 산골에서 새해의 첫새벽을 맞았다. 스물일곱 수의 첫 시작은 이렇다.
2007/01/02 20:40 2007/01/0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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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2006/12/17 10:31,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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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Sep. '06, Leamington Spa
무거운 금속제 책갈피 대신 'well-thumbed books' 속을 차지했던 사진 한 장. 여행의 막바지에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아쉬움을 달래고자 집에 오자마자 필름을 스캔했다. 두 눈을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어떻게 얻은 사진일까 호기심을 자아낼 친구들도 있겠지만 호기심은 호기심으로, 꿈은 꿈으로 남아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2006/12/17 10:31 2006/12/17 10:31

여행의 끝

Posted 2006/12/14 01:07,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비행기의 에어브레이크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파리로부터 싱가포르를 거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시간의 벽을 한순간 뛰어 넘은 것처럼 어느 사이에 스물일곱 수라는 말 많고 탈 많은 나이가 코앞에 다가와 있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길었다면 길었고 짧았다면 짧았던 여행을 마무리 지으며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니 어딘지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고 고민 많아 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긴 여행 끝에 얻은 홀가분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당장은 조금 막막하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잘 해나갈 것이 분명하다고 되뇌는 자신과 조우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자신감의 근원은 긴 여정동안 과거를 잊어버리는 법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관통하는 강 속에 그림자를 띄우고 상념에 젖어있는 동안 드디어 망각이라는 편리한 친구를 얻었으며 흘러가는 물결 속에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던져 버리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무엇보다 혼자 걷는 길에도 한 사람의 동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외롭지가 않았다. 자신의 그림자를 벗 삼아 술잔을 기울인다는 시구가 허망한 고독의 발산이 아닌 또 하나의 엄연한 진실임을 체득한 순간 내 삶은 다시금 맹목적으로 무언가에 몰두 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되었다.

이번 겨울이 시작되면서 나 스스로에게 부여되었던 마지막 유예가 끝났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주는 유용함을 누린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겠지만 마지노선에서 인간은 스스로에게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법이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는 마지막 디딤돌에서야 말로 가장 용감해 질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단호함과 용기를 보여줄 수 있는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한다면 다른 순간은 그저 허무의 연속일 뿐이다. 그리고 허무만큼 내가 증오하는 것은 없다. 이제는 고민과 상념의 폭풍우가 나를 번뇌하게 만들었던 하루의 그 5분조차도 사라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 자신을 고문했던 스스로의 제약조건 같은 것은 이제는 그 흔적조차 묘연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2006/12/14 01:07 2006/12/14 01:07

외출

Posted 2006/07/28 18:59,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눈을 뜨자마자 무덤가의 귀신을 벗삼아 은하수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궁벽한 일상에서 탈출하기로 마음 먹었다. 택시를 불러 타고 고개 두 개를 넘고 하천 하나를 건너 도착한 역사의 보도 블록에 감격할 찰나 곁을 지나가는 젊은 처자의 살내음이 느껴졌다.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노승이 산사를 벗어나는 수행승에게 던진 첫마디처럼 그것은 매우 ‘강렬한 유혹’ 이었다. 짐짓 점잖은 척하며 시계를 들여다 보았지만 기차가 올 때까지 13분이 더 남았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시계로 눈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헤르만 헤세의 『두 사람의 죄인』이란 단편이 떠올랐다.

이른 새벽 그들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에 함께 일어났다. 그들은 짐을 챙겨 짊어졌다. 나막신이 바위에 부딪쳐 딸그락 소리를 냈다. 길을 걸어가면서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상상의 나래는 이미 거리의 환락을 쫓고 있었다. 유스티누스는 거리의 아름답고 육감적인 여자들만을 훔쳐 보았으며 바지리우스는 달콤한 술과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고 대리석 책상 위를 소리 내어 구르는 주사위의 음향에 귀를 세웠다.
이심 전심으로 그들은 격렬한 양심과의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두 사람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으며 메마른 입술은 기도를 중얼거렸으나 그들의 욕망은 끈끈하게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때 그들을 지켜보았다면 아마 틀림없이 순결한 순례자로 보기는커녕 절망에 빠진 사나이들이라 여겼을 것이다.

물론 두 단락이 통째로 기억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익숙한 도시로 오는 한 시간의 기차 여행 중에서 난 스스로가 유스티누스와 바지리우스의 분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너무 강렬한 유혹이 많았다. 공부를 핑계로 산사에서 한 달을 보낸 친구가 학교에 나타났을 때의 눈빛이 떠올랐다. 거울이 없어 확신할 수 없겠지만 ‘제대로 달아올랐다’고 놀려대던 그 눈빛과 지금의 내 눈빛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은 이런 의미에서는 공평하다. 놀리는 자에게 놀림 받는 자의 상황을 예외 없이 거치도록 농간을 부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후의 하루는 아래의 인용구처럼 펼쳐졌다. 

그는 젊은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어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녀가 바삐 그 자리를 떠나자 퍼뜩 눈을 들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살 찐 맵시, 검은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삼단같이 늘어뜨려진 머릿단과 다갈색 목덜미, 매끈한 양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낭창거리는 모양새 좋은 허리, 구두를 신은 허여멀쑥한 다리 등이었다.
그 광경은 가련한 은자의 이마에 비지땀이 맺히게 했다. 머쓱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어떤 세찬 부끄러움과 답답함, 일종의 전율마저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며 이마를 소매 끝으로 문지르고 나서 마침 그녀가 되돌아 오는 모습이 눈에 띄자 얼른 눈을 식탁 위에 내리깔았다. 그녀는 아랑곳없이 음식을 내려 놓고 한동안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는 곧바로 사내의 마음 속에 일고 있는 곤혹과 착란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매우 오랫동안 난 이 단편 소설이 내 이해의 밖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의 두 번째 장인 「두 개의 세계」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 소설 역시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내 자신의 이야기였다. 누가 뭐라 해도 난 점잖은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며 자라났고 내 친구들 가운데 소위 ‘들이대는’ 성향을 지닌 이는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비굴하지 않은 당당함을 자부심이라 믿는 것과 유혹에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몇 달 동안 자르지 못할 머리를 입대하는 젊은이처럼 짧게 잘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후퇴하기 시작한 이마의 선이 짧게 자른 머리칼 사이로 명확하게 들어났다. 고민의 주제가 될 만큼 심각한 편은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은 슬프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 것은 버릇처럼 무릎에 올려 놓은 두 손에 스치는 감각과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머리를 만지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아낙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까닭 모를 관능이다. 보통의 사내들이 즐기는 술자리 토크에서는 백일 휴가를 나왔을 경우에만 관능으로 인정되는 가장 수준 낮은 이 단계에 당황스러워 하는 내가 우스워지기 시작했다.

9월에 보스턴으로 떠나는 친구와 오랜 만에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인지 기약할 수 없는 서로의 인생 항로가 아쉬웠지만 어디에 투묘를 하던 최선을 다할 녀석이기에 걱정은 없었다. 다만 함께 보낸 십대의 후반부가 떠올랐다. 내장산의 등산로를 천천히 걸으며 나누었던 대화와 학교 후원에 누워 오갔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의 우리가 꿈꾸었던 삶에 우리는 얼마나 충실한 것일까? 80%는 충실했다 자부해도 될 듯싶다. 하지만 충실하지 못한 20% 때문에 우리의 발걸음은 마냥 가볍지 못한 것이고 고민에 휩싸여 가끔씩은 신을 원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 업무 및 환전을 끝낸 나는 비를 맞으며 역사로 향했다. 하지만 길고 긴 ‘나막신이 바위에 부딪쳐 딸그락 소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플랫폼에서 함께 비를 맞던 처자는 삼류 통속 소설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가령 ‘알몸으로 햇볕에 태운 것이 틀림 없는’ 같은 묘사라든지, ‘커다란 링 귀걸이를 한’ 혹은  ‘가슴골 사이로 빗물이 흘러 내리는’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묘사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묘사의 대상이 된 마이애미의 백사장과 비 내리는 8시 10분 전의 시골 플랫폼 사이의 간격에 웃음이 나왔다.

이야기의 마무리는 이렇다. 점잖은 모범생 이미지와 다르게 오늘 난 마음으로는 수십 번 욕망에 굴복했고 눈으로는 그보다 더 많이 욕망에 굴복했다. 다시 일상의 고요함으로 돌아온 지금 『두 사람의 죄인』을 펼쳐본다. 욕망에 굴복하는 일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헛된 외출의 끝은 늘 이런 것이 아닐까?
2006/07/28 18:59 2006/07/28 18:59

휴가

Posted 2006/07/24 09:40,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1.
귀가하는 기차 안에서 어린 시절 알고 지내던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고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꽤나 신경질이 난 표정이었다. 예의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주의를 주려는 찰나 그 아이를 알아 보았다. 그 아이 역시 나를 알아봤고 우리는 멋쩍은 표정으로 눈인사를 나누었다. 어째서 무슨 음로를 꾸미는 사람들처럼 눈인사를 주고 받았을까? '잘 지내'라던지, '아이들이 예쁘네' 같은 사교적 멘트는 어째서 생각나지 않은 것일까?

두 아이를 낳은 그 아이의 몸에서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던 그 옛날 소녀의 실루엣이 환영처럼 겹쳐 보였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작은 도심에서 첫아이를 안고 가던 그 아이와 마주쳤던 기억이 났다. 그 아이의 나이든 남편과 닮은 둘째 녀석을 유심히 바라봤다. 모든 상황에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곧잘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소녀들에'에 등장하는 등을 뒤로 돌린 소녀같다고 되뇌이곤 했다. 그녀의 길며 곧은 등허리가 내가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정립하는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가? 그러던 그 아이가가 이제는 르느와르에서 드가의 모델로 변해 있었다.

두 아이를 혼내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에서 오빠로 이내 손님으로 호칭이 바뀐다. 어느 소설의 한 장면 같았다. 호칭이 정해지지 않은 사내만큼 서글픈 것이 있을까? 그 아이에게 내 머리 속에는 그 아이의 소녀 시절과 막 첫 아이를 낳은 시기의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 남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결례라는 사실을 모르지만 않았어도,  나에게 조금 더 분별이 없었다면 혹여 그 아이가 옛날처럼 환하게 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2.
집에 내려왔다. 지갑 속에는 한 푼의 현금도 들어있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사실 현금이 필요 없다. 현금이 있어봤자 쓸 곳도 없고, 그 흔한 비디오 대여점 하나 찾을 수 없는 이곳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동네 청년이 되기 위해 2킬로미터쯤을 걸어나가야 한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 본 가장 오지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이곳에도 장점은 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하게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넓은 책방에는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 있고 오래 자지 않아도 새벽이면 잠에서 깨어난다. 기차의 기적 소리를 제외하고는 바깥 세상을 떠오르게 만들 어떤 자극도 없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사람 많은 도심을 걸어 다니며 아름다운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로 친구들과 쉴 틈이 없었는데 이제는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도, 아름다운 존재들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적한 나의 휴가는 일주일 후면 끝나게 된다. 다시 사람 많은 대도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제법 긴 여행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여행 동안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반드시 결정해야 하는 문제들이 적힌 수첩과 함께 하는 여행이지만 여행의 묘미는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일 테니 말이다. 아니 아무런 인연의 끝도 닿아있지 않는 낯선 세계에서 이방인으로 보내는 몇 달이야말로 내가 그렇게 갈구하던 휴식이 아닐까?

돌이켜 보면 내 하루는 겉보기에는 느긋하지만 항상 쉴 틈 없는 나날들로 점철된 몇 해였던 듯싶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시간이란 괴물에 쫓겨 많은 것들을 외면하곤 했는데 이제는 어떤 것들을 외면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 있는 그 긴 목록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안녕’ 이란 말로 무엇이든 회복할 수 있다 자주 말하곤 했었는데 그것으로 관계를 회복할 수는 있어도 잃어버린 기억을 해결하기란 요원하다는 사실을 연거푸 깨닫는 요즘이다.


3.
창문을 열어 놓으면 소리 없는 불청객이 찾아오곤 한다. 이 불청객은 오래지 않아 동거인으로 변했고, 언제부터인가 이유없이 그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거나, 그를 괴롭히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난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복잡하다. 혐오하는 듯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녀석을 좋아하는 내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복잡한 감정의  수렁에 빠져있을 때 난 녀석을 집 밖으로 추방해 버린다. 소리 없이 다시 찾아오는 그가 어제의 그와 같은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불청객의 인상착의


2006/07/24 09:40 2006/07/24 09:40

술에 취하다

Posted 2006/07/13 09:04,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평소와 다름 없는 시간에 눈을 떴으나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가령 책상 위에 잔돈 몇 백원이 흘러 나와 있다던지, 책이 거꾸로 꼽혀 있다든지 하는 경우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지난 밤의 세세한 이야기가 80% 정도만 기억난다는 것이다. 버릇처럼 외우는 택시의 번호판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양껏 마시고 취해보기'란 wish list의 항목 하나를 지웠지만 이런 항목을 지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항상 뒤늦게서야 깨닫게 된다.

지난 밤에는 오랜만에 엽서를 즐겨쓰곤 했던 벤치를 둘러 보았다. 그곳에 간다는 이유만으로도 난 취할 필요가 있었고(그곳에 간다는 결심을 하자마자 바로 과음의 단계를 넘었다) 막상 그곳을 보는 순간에는 진짜로 취해 있던 것 같다. 관리를 안했는지 덤불이 지나치게 무성해 있었지만 어느 오후를 회상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까닭 없이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시간의 무상함이 나를 습격하기 전에 미친 척 춤이라도 추어야 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찾아봐야 가슴 아프기만 한 것들이 분명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난 밤 같은 즐거움이라면 기꺼이 취할 수 밖에 없다. 곤피스를 점령한 노새들이 하룻밤 술로 기력을 회복했던 것처럼 매너리즘 반, 피곤이 반 섞인 기묘한 상태를 끝내기 위해서라면 취할 수 밖에 없다. 곤혹스런 동어 반복과 꼬부라진 거친 발음을 감내해준 상대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취할 수 밖에 없는 하루란 분명 존재한다.

문학이라던지 예술이라던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신 부동산과 '남자들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떠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 삶의 90%는 세속적인 일들에 매여 있고 10%조차 되지 못하는 잉여 시간만이 아름다운 것들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무관한 사람이 아름다움을 입으로 논한다는 것은 어딘지 부끄럽고 겸연쩍은 일이다.

마지막으로 나 역시 그녀처럼 수첩에 무엇인가를 다시 기록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해야할 일들과 계획으로 어수선한 지금의 수첩 대신 진짜 살아 있는 삶을 기록하는 그런 수첩으로 말이다.

P.S.
21세기 초, 나의 생필품 거래처였던 어느 마트에서 보곤 했던 자매에 대한 단상을 찾을 수 없다. 매우 또렷한 인상이었기에 어딘가에 분명 적어 놓은 것을 기억하는데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밤새 기억을 되집고 또 되집어 찾아낸 기억들은 여전히 모호하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과 셈을 치루는 모습 등 매우 단편적인 것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장바구니를 붙잡고 한번쯤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상대와 전혀 다른 우연에 의해 다시 조우했다. 어째서 지난 밤에는 '언니 때문에 말을 못걸었어요' 라던지, '뒷모습을 보니 누군지 정확하게 알겠어요' 같은 말 대신 변죽을 울리는 말만 했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조금 초췌한 얼굴로 학교에 나가니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얼마나 마셨냐는 질문에 다섯 손가락을 펴들자 이내 나무람이 시작된다. 지금 납량특집 찍냐는 힐난까지 받으며 머리를 긁적여 보지만 어느 놈 하나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줄 기미가 없다.
2006/07/13 09:04 2006/07/13 09:04

장마(長霖)

Posted 2006/07/12 08:38,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1.
시간은 내 마음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요즘의 난 줄기차게 흐르는 시간 앞에 무책임하게 모든 것을 방임하고 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음에도 비가 온다는 핑계로 일찍 자리에 누웠다. 시급히 결정해야 하는 문제들 앞에서 이렇게 무력한 내 자신을 발견하기란 꽤 오랜만의 일인듯 싶다.

2.
보름쯤 아무 생각 없이 본가에 내려가 쉬고 싶다. 일주일쯤은 연락두절 상태로 잠을 자고 싶다. 뜻을 알아주는 지기들을 만나 불안감을 토로하고  싶다. 내 대신 모든 것을 고민하고 결정해줄 대리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한다. 제법 멀리 걸어왔음에도 여전히 이 길은 안개 속에 놓여 있다. 언제쯤에야 이 길의 끝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길에 끝에서 웃을 수 있기만을 바라는데 어느 것 하나 녹녹지 않다.

3.
서툰 사람이 되어버린 나를 발견하는 일은 항상 마음을 썰멍하게 만든다. 매력에 굴복하기 찰나,내가 느낀 매력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나를 발견하고 부풀어 오른 마음이 시들어 버렸다. 시든 마음을 붙잡고 들어와 4시가 되기도 전에 잠을 청했다. 사랑한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 아름답다는 말을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진 걸까? 눈동자를 바라보며 표정으로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이상 붉은 얼굴의  낯설기만 한 사내로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

4.
전시회에 가는 동안 uncertain world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친우와 토의를 거듭했다. 결국 의연하게 또 다시 걸어가보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낯선 결론도, 모르는 결론도 아니다. 하지만 밤새 내리는 굵은 빗방울을 맞으며 새벽 산책을 하는 일이 싫은 것처럼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길을 걷는 것은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조금 쉬운 길과 어려운 만큼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길이 놓여 있다. 쉬운 길을 따라가는 쪽이 제일 현명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쉬운 길을 따라가다 후회하기 보다는 어려운 길을 따라가며 힘들어 하는 쪽이 주어진 재능과 자부심에 조금 더 적합한 길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함 없는 사실이 있다면 오늘처럼 짓굳게 내리는 빗 속에서는 결코 걷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다. 새벽부터 깨어 음악을 듣고 밀린 독서를 하건만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옮기고 싶지 않다.
2006/07/12 08:38 2006/07/12 08:38

선배의 결혼 선물을 고르기 위해 인사동에 들렸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잠시 동안 선물을 사러 다닐 나이는 이미 지났다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늘 그렇듯이 이런 일은 남들보다 조금 더 꼼꼼하고 기억력 좋은 내 몫이다. 그렇기에 마음 속에서 불거지는 신경질을 다스리는 일도 쉽다. 그냥 ‘빌어먹을 의무감’이라고 소리 없이 몇 마디를 내뱉고 나면 이내 평화로워 지는 것이다.

선물을 사고 인사동에서 대학로까지 걷는 동안 동행한 친구 같은 후배 녀석과 제법 긴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불과 몇 시간 전 방콕으로 휴가를 떠나기 전 친구가 던지고 간 말이 계속 마음을 맴돌았다. 요약하자면 ‘세상에는 될 사람과 안 될 사람이 있는데 넌 안 될 사람만 좋아한다’라는 상투적인 문장이다. 그리고는 후배의 남자 친구와 어울려 술잔을 기울였다. 4년 반 만에 친구 같은 후배가 누군가의 연인일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모습은 내가 알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다시 상투적인 표현을 남발하자면 그제서야 내가 지닌 문제가 무엇인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고 애정을 느낄 때 판단의 전제가 되는 것은 연인으로써의 기대감이 아니었던 것 같다. 기가 찬 노릇이지만 지금껏 판단의 전제가 되었던 것은 상대에 대한 존경이었다. 그랬기에 늘 그렇게 무언가 어색하고 이상했던 것이 분명하다. 본능적으로 걸음이 쉽게 옮겨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늘 굼뜬 사람이 되었고 좀처럼 섞이지 않는 기름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열 혹은 사랑스러운 말투와 다정스러움에 대한 기대감보다 올곧은 행동이나 재능, 무엇보다 삶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통해 형성되는 기대감이 애정의 기초가 된 울고 싶은 상황의 연속 혹은 중첩이 내 과거의 전부라니 세상을 헛살았다는 느낌과 함께 두 다리의 힘이 쭉 빠진다. 하지만 문제는 알았으되 해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답을 모르지는 않으나 지난 시간 동안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것들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란 누구에게나 어렵다.  
2006/07/07 23:36 2006/07/07 23:36

Break time

Posted 2006/07/01 12:47,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머리 위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시험이 끝났다. 결과는 나중 문제이고 일단은 지난 몇달 동안 지속되었던 긴장의 끈을 잠시 늦추어도 된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헤픈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부족한 잠과 오랜 시험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내려와 보니 비가 나를 반긴다. 앞마당에 자리를 펴고 밤새 별자리를 보겠노라는 다짐은 장마에 묻혔지만 빗소리가 싫지는 않다. 사람 구경조차 쉽지 않은 이곳의 빗소리는 도시의 빗소리와는 다른 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정신을 차리고 달력을 보니 어느 사이에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 버렸다. 만 스물 넷 십개월, 군필에 대학 3년을 마친 것이 지금까지 내가 해놓은 것의 전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남자의 과거가 이렇게 요약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다. 나도 어느 소설가처럼 폼나게 나를 묘사해 보고 싶지만 난 테니스화를 신지도 않고 햇살에 비친 옆얼굴이 줄리앙처럼 아름답지도 않다. 아니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조차 진실을 가리기 위한 연막일지 모른다. 어쩌면 나란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몰개성적인 취미로 이루어진 고루한 존재라는 꼬리표가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던 서재에 앉아 홍차를 마시며 고루한 사람답게 갚아야 할 편지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몇 주동안 해야 할 일들과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을 가늠하고 있자니 모든 일이 귀찮아진다. 지루한 삶에 대하여 뭐라고 편지에 쓰고, 사람들을 만나 어떤 뻔한 거짓말을 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 어느 사이에 취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고루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조차 없는 치명적인 상황은 아니다. 사실 그 어느 때보다 낯선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마음을 사로 잡는다. 예전 같았으면 눈길이 닿지도 않았을 소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이제야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여행할 시간에 접어 든 모양이다.

I wish… 
‘Salon de Thé’ 구경. 그런데 호텔 14층에 있는 찻집에 가는 것은 넌센스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복학생 친구들의 이번 학기 숙원이던 VIPS行. 사실 위장 크기를 재어보기 위한 목적도 없지 않다/ 피카소전과 인상파전 관람. 이직 기간동안 마찰적 실업 상태에 있는 친구말에 의하자면 둘 다 별로란다/  돌아오는 수요일에는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제대로 취해 보기. 사실 지금까지 못취했던 것은 시험 때문이 아니라 취할 만큼 마실 재원 부족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밥집 순례. 보름쯤 식비 걱정을 덜 수 있을 듯 싶다. 이제야 레포트 대필에 대한 대가를 지급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결혼식장에서 소리소문 없이 유부남이 되어버린 형님들 놀리기/ 더 늙기 전에 클럽行. 마지막으로 가본 것이 4년 전 신촌이었으니 말 다했다/ 연극 보기. 그런데 올 여름에는 볼 만한 것이 없더라 / 수유동에 있는 인장사에 성명인과 전각 주문/ 절판을 염려하여 사들였으나 시간 제약으로 읽지 못한 책들 정리 / TMAX 5롤 찍기/ 우연이라고는 너무 자주 마주치는 2층 어문학실의 某氏 집중 분석/ 이사 및 조금 긴 여행 준비/ 일단은 이만큼만…         
2006/07/01 12:47 2006/07/01 12:47

시작

Posted 2006/06/26 07:29,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기묘한 흥분감도, 주저함도 없는 월요일 아침이다. 밤새 내린 비 덕분인지 사위는 어둡지만 마음만큼 편안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는 것은 이유 없는 배짱뿐이라는 말이 나에게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사실 앞으로 5일 동안 드나들어야 할 곳은 나로서는 너무나 친숙한 강의실이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던 고개와 옆자리에 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이 쿵쾅거렸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시작이다.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보다 더 좋았던 날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유쾌한 마음뿐이다.
2006/06/26 07:29 2006/06/26 07:29

잡담

Posted 2006/06/14 07:17,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1.
주말 동안 본가에 다녀왔다. 친구들은 기말 시험을 앞 둔 주말에 집에 다녀오겠다는 내 말에 기가 찬 표정을 지었지만 친구들의 놀람과 달리 종강과 시험 사이의 틈을 이용해 집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선 제법 긴 기차 여행 동안 꽤나 많은 양을 공부할 수 있고 서울에 가지고 있는 책보다 본가에 더 많은 참고 자료가 있으며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친구들의 놀람이 옳았다. 금요일 밤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60여 시간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배를 채우는 것과 차를 마시는 것, 영화를 보는 것과, 밀린 잠을 자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심지어는 낮잠까지 잤다). 결국에는 기차와 지하철에서 시험을 코 앞에 두고 벼락치기를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번에 구매한 Harrods의 사과향 홍차와 오랜 만에 먹어본 막내 누이의 머핀 덕분인지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만족감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2.
지난 금요일 저녁에는 누이의 드라마 브리핑이 있었다. 사실 텔레비전 따위는 보지 않아도 한 시간 반 동안의 브리핑이면 최근 드라마의 경향과 요점, 인물 관계 및 관람 포인트를 모두 알 수 있다. 사실 누이의 브리핑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까닭으로 자칫 답답한 인물로 비쳐질 수 있는 동생을 위한 배려인데 언제부터 인지 몰라도 집에 갈 때마다 이어진 것은 어느 사이에 정례화 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누이의 이런 배려는 동생의 이미지 향상 대신에 복학생 친구 녀석들을 텔레비전의 마수 앞에 내던지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어쨌거나 드라마 전성기가 지났다는 누이의 말대로 주말 동안의 텔레비전은 정말 재미 없었다.   

3.
디마케팅이라는 말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마케팅 효과가 역으로 발생하는 경우를 뜻한다. 그리고 주말 동안 본 텔레비전과 상점들은 디마케팅의 살아 있는 표본이었다. 실제로 광고의 주목적은 인지도 향상을 통한 매출 확대에 목적이 있다. 결국 남들 하는 식으로 따라가는 마케팅으로는 인지도를 올릴 수 없고 되려 사람들이 축구를 보고 있는 시간만큼 구매는 줄어 들게 된다. 디마케팅의 남발로 식상한 광고가 흘러 넘치는 지금이야 말로 차별화된 광고 전략을 사용할 수 있는 최적기가 아닐까 싶은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붉은 색을 못 둘러서 안달이다.

4.
文翰筆墨의 약자를 翰墨이라 한다. 또 文翰筆墨를 주고 받는 자리를 翰墨場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옛사람은 翰墨遊戱를 자신의 낙관으로 삼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말이 꽤 마음에 든다. 최초로 본 출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되새김질 시켜준 출처는 『중국회화사삼천년』이다. 그 책에서는 翰墨에서의 翰자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해 잘못된 해석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문구가 지니는 뜻마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렇게 문구를 풀어 쓰는 이유는 당분간은 블로그 작성자의 닉네임으로 기재 될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루바이야트를 다시 읽었는데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조차 통하지 않는 것을 붙잡고 있기에는 아직 난 젊다.
2006/06/14 07:17 2006/06/14 07:17

1.
간만에 학교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제법 긴 드라이브도 즐겼고 산등성이 탐색도 다녔다. 잠시 낮잠을 즐기기도 했고 점심마저 공짜로 먹었으며 일당 받은 만큼 수다를 떨고 가야만 한다는 아저씨 덕분에 한참이나 웃을 수 있었다. 6월에 다녀온 단체 소풍 같은 느낌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는 정도. 여비로 받은 3천 500원으로 마시는 맥주 한 잔의 시원함이 있기에 다들 싫은 내색들을 하지 않고 다녀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법으로 보장된 사유로 인한 수업 불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다. 더위에 녹초가 된 친구 하나는 일곱 시로 수업이 옮겨졌다며 지친 표정으로 수업을 들으러 갔다. 웃으며 기분 좋게 다녀오려고 노력하지만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소집되는 훈련을 좋아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군복 주머니에서 깜지를 꺼내 틈틈이 무언가를 외워야 할 정도로 바쁜 시간을 앗아간 법이라는 존재 앞에서 무기력한 우리에게 어느 강사의 몰이해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2.
이번 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 면도하는 주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면도를 거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사실 이런 다짐 이면에는 ‘복학생=아저씨’라는 대학 내의 평범한 진리 체제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아저씨로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저씨로 보이고 싶지 않은 대상은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인상적인 다섯살 아래 터울의 한 아가씨이다. 아니 졸음에 취해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딛는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는 소녀 같은 아가씨 때문이다.

사실 옆 자리 혹은 건너 옆자리에 주로 앉은 이 묘령의 아가씨가 나에게 주로 던지는 질문은 상식적인 수준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 묘령의 아가씨는 인상은 좀 험악해 보이지만 학구적인 복학생들의 친구인 나에게 ‘오늘 출석 불렀어요?’와 ‘시험에 뭐가 나오나요?’ 따위의 질문을 던진다. 오늘은 핸드아웃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시험에 출제하기로 공고한 것에 관하여 물었다. 『슈렉2』에나 등장하는 그런 고양이 눈으로 말이다. 그 눈에 넘어간 나는 친구들에게도 읊지 않은 수업의 전문을 순수하게 읊었다. 아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그녀에게 풀이까지 해주었다. 묘령의 아가씨에게는 차갑고 불친절한 복학생 아저씨의 설명이겠지만 호의가 없는 경우에는 상대가 무안해질 정도로 친절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하는 내 못된 성격머리를 아는 친구들에게는 꽤나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몇 주전인가에는 강의실까지 걸어가는 5분 동안 못 견딜 정도로 가슴이 떨려왔던 적도 있다. 수능이던 고시이던 이어폰까지 꼽고 콧노래까지 부르며 느긋하게 길을 걷는 나에게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아는 지 모르는 지 이 묘령의 아가씨에게 난 ‘회전문을 잡아주는 낯선 사람’에 불과하다. 무언가 말을 걸어보고 ‘낯선 사람’에서 인식 안으로 걸어 들어갈 만한 노력을 기울 법도 한데 요즘의 나에게는 그것이 참 어렵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것. 대화를 나누고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기 위해 벌이는 일련의 행동들이 예전과 다르게 낯설고 힘든 고단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이 묘령의 아가씨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관찰은 ‘거의 모든 것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늘 파란색 캔커피를 마시고, 신 맛보다는 쓴 맛과 어울려 한층 자극적인 단 맛을 좋아한다. 학과 안에 친한 동성 친구들이 거의 없다. 아는 이성 친구들은 군대에 갔을 시점이고 비슷한 나이 또래의 동성의 자매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 역시 이 곳 졸업생일 것이 분명하고 악필에 정리하는 재주가 없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포부가 있다. 하지만 포부만큼 노력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 이 묘령의 아가씨를 정의하는 가장 좋은 표현은 막연한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는 충만한데 정작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가벼운 방황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 틀림 없다. 눈 화장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상이 달라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보통의 간격 사람들에게는 귀엽거나 혹은 조금은 잠에서 덜 깬 인상을 주겠지만 아마도 냉정할 만큼 스스로에게 대한 SWOT분석이 철저할 것이라는 점에 내 이름을 걸 수 있다.

사실 잠잘 시간을 쪼개 잠시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이유를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그저 먼 훗날 한번쯤 꺼내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사람으로 내 눈에 비쳤던 모양이다. 아울러 어떤 행동을 취할 여유가 없는 현실에서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렇게나마 남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호기심과 관찰은 여기까지다. 난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알기 전에는 누군가를 좋아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위인이니 말이다.
2006/06/09 07:28 2006/06/09 07:28

I'm ready

Posted 2006/06/06 08:34,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1.
오랜 시간 동안 난 이곳에 ‘어깨 너머’의 이야기에 관하여 줄기차게 써왔던 것 같다. ‘어깨 너머’를 추억하고 생각하는 일은 너무나도 비효율적이고 쓸모 없는 일이란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속내를 고백하자면 실제로는 ‘어깨 너머’를 잊어본 적이 없다. 내게 있어 ‘어깨 너머’란 너무나도 열정적인 시기이고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묘한 시간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보면 더 이상 ‘어깨 너머’에 어떤 집착도 남아있지 않다. 지하철에서 노라 존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추정은 이내 확신으로 변했다. 이제는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열정을 다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호기심과 참을 수 없는 사랑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야 말로 난 앞으로 걸음을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 너무 늦은 것이지도 모르겠지만 난 원래 빠른 듯하면서도 늦은 사람이니 애 탈 것도 없다. 조금의 유예가 더 필요하긴 하지만 마음은 조금씩 변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 싶다.

2.
지난 겨울부터 나는 시험을 핑계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나’란 존재보다 ‘유용성’을 토대로 나를 평가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보다 ‘유용성’을 토대로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환멸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난 어리광을 받아주는 최후의 보루도 아니고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일회용 서비스 센터를 자청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너무나 소중한 친구들에게까지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우리가 쌓아온 오랜 시간과 우정에 호소할 따름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 삶에 여유를 되찾고 급한 불을 끄고 나면 내가 먼저 지난 시간의 과오를 사죄하고 유감스러워할 것이 분명하다고 지금은 이렇게 밖에 말할 것이 없다.

3.
수업과 관련되어 ‘한경’을 견학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대개가 비슷하다는 추억에 휩싸일 찰나 달갑지 않는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내가 적을 두고 있는 이곳에서는 ‘칭찬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사람들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질문을 위한 의도적인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 좋게 웃어 주었지만 한 번만 더 속보이는 짓을 하면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노하우를 보여줄 참이다.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또 쉽게 나오는 질문처럼 모욕적인 것은 없다.
2006/06/06 08:34 2006/06/06 08:34

murmur

Posted 2006/05/20 12:04,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1.
아침부터 학교에 사복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뛰기 좋은 운동화와 바지, 꽉 졸라 맨 허리띠, 스포츠 신문 사이에 숨긴 커다란 무전기와 짧은 스포츠 머리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저런 차림일 바에는 차라리 정복으로 출입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답게 본능적으로 사복 경찰이 학교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껄끄러웠다. 무엇인가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유야 어찌되었건 교내를 배회하는 경찰은 용인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그들이 교내에 있었던 특별한 사정은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점심을 끝마쳤을 무렵에서야 알 수 있었다. 싱가포르 대사관 소속의 벤츠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학교를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사복 경찰들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돌아다닌 이유가 설명이 되었다. 근래의 이곳이 떨치고 있는 악명으로 보아서는 충분한 보안 조치라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입맛은 쓰다.

2.
일주일 가운데 목요일 아침에 이곳에 앉아 신문을 읽는 시간이 제일 좋다. 나무 그늘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고 일견 정연한 듯 보이지만 불규칙적인 돌들이 소리 없이 나를 반겨준다. 오른손에 돌을 한 움큼 집어 들고는 말 없이 책장을 넘기며 차가운 돌들이 가져다 주는 감촉을 즐긴다. 오래지 않아 먼지를 벗고 투명한 빛을 뽐내는 하얀 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법열에 준하는 기이한 희열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이 곳이 좋은 이유는 나무 잎새로 파고드는 햇살의 싱그러움 때문도 한적함 때문만도 아니다. 이 곳이 정말 좋은 이유는 과거의 어떤 사건에도 물들어 있지 않은 낯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앉아 있노라면 어디든지 걸어갈 수 있을 듯한 착각에 휩싸인다. 이곳에서는 어떤 그림자도 배회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현재에 실존하는 자아뿐이고 너무나도 맑아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화창한 아침뿐이다.

3.
근래의 나는 서투른 사람이 된 듯 하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겠노라 무심해진 사이 마음은 메말라 갔고 이제는 상황에 적절한 표현을 잊어버렸다. 어설픈 농담과 진심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걱정이 값싼 연민처럼 보이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난 친절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호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위선적인 관심을 보이는 짓 따위는 죽어도 하지 못하는 성마른 사람이란 사실이다. 여전히 내게 있어 관심은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항상 그렇듯이 언어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오해에 가려 좀처럼 보이지 않는 진실은 더 맑고 더 크다.

4.
언제부터인가 과하게 기쁨을 들어내는 일이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듯 하다. 좋은 일이 있었음에도 되려 침묵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침을 떼고서는 가야 할 길을 마저 걷고 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끝까지 가보기로 오래 전에 결심한 참이다. 가끔은 혼자 걷는 길이 위태로우며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운명이려니 하고 체념해 버리면 참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다. 
2006/05/20 12:04 2006/05/20 12:04

I'm not Falstaff

Posted 2006/05/08 06:24,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스물 여섯의 봄은 스물 둘과 다르며 스물 셋과도 다르다. 사내들만의 장난스런 웃음이 끊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에는 예전만큼이나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시간은 서로가 서로를 조망하는 방법과 양상 다르다는 사실을 친절하게 깨우쳐 주곤한다. 하지만 이런 친절이 다행스러운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걸었으면 좋겠지만 나에게 최선인 길이란 숙명적으로 혼자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운 스물 여섯 봄!

2006/05/08 06:24 2006/05/08 06:24

극장

Posted 2006/04/24 20:51, Filed under: About_A_boy/Chronicle 'My name is Falstaff'
월요일 아침에는 학교를 벗어난 김에 오랜 만에 극장에 들렸다. 월요일 조조영화를 보는 군상이 얼마나 다양한 의혹의 대상이 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이목이 없는 시간을 쪼개 도심까지 다시 나오는 귀찮음을 무릎 쓰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영화의 시작은 열 시. 한 시간 반 동안 스타벅스 2층에 앉아 민트향 타조 핫 티와 스콘을 시켜놓고 책을 폈다. 한참 동안 모형을 도해하고 정리하다가 유리창에 반사되는 내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사실 유리창에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스물 셋의 내가 떠올라 있었다. 무엇이 좋은지 말쑥하게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작스레 궁금한 것이 생겼다. 당시의 그는 영원한 것을 믿었을까? 사람을 믿었을까? 그는 행복했을까? 3년 후 같은 시간대에 그 자리에 혼자 있을 줄 알고나 있었을까? 그것도 아무런 회한도 설렘도 없이?

아쉽게도 난 그의 대답을 잊어버렸다. 당시와 별다르지 않은 옷차림에 같은 차를 마시고 있으나 이제 그는 혼자 걷는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들이 줄어들었으며 오래 살고 싶어한다. 휠씬 야심만만해졌으며 외로움은 더 적게 느낀다. 당시의 그가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가는 마지막 과정에 놓여 있었다면 이제 청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첫머리에 서 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지닌 잠재적 가능성에 비해서 썩 잘된 영화는 아니었다. 조금 더 짜임새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으나 정상을 향해 차오르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 버렸다. 아니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였더라면 한층 깔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밉지는 않은 영화였다. 영화 속의 키스는 당혹스러울 만큼 부러웠고 어둠 속에서 시간은 쏜 살처럼 흘러갔다.

상영관을 나와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동안 잠시 옥외 테라스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펜스에 몸을 기대고 있는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음료를 마시는 그녀가, 작은 부채로 더위를 식히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젠 정말 안녕이다.
2006/04/24 20:51 2006/04/24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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