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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라트비아인

Posted 2011/10/31 15:25, Filed under: Review/Book
 아직은 웃음도 마음도 지금보다 더 앳되던 청년 시절에는 하얀 종이를 보는 순간 문장이 쏟아 나오곤 했다. 그 시기에는 산책하는 동안 흘러가는 생각을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주던 서평이 완성되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내 삶의 다른 일들처럼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변명을 하자면 꺼리는 많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나를 찾는 전화벨 소리 사이로 진지한 생각이 빠져 나가서 그런 것이라 자조도 해보고, 옛날 달라진 빠르고 즉흥적인 세상 때문이라 투정도 부려본다. 하지만, 얄팍한 변명 사이로 선명하게 보이는 진짜 이유를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이유란 간단하다. 이제는 글을 쓰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고백하고 나니 이제야 서툰 문장으로 나마 서평을 쓸 용기가 생긴다. 이제 진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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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소설이다. 추리 소설 경력을 이어 나가는 동안 ‘심농의 매그레 반장’이란 언급과 조우할 기회는 있었지만 내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영국식 추리 소설의 전통이랄 수 있는 어수룩한 경찰에 대한 불신 혹은 조롱에 나 역시 깊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셜록 홈즈나 미스 마플, 포와르가 경찰 반장이라면 얼마나 어색할 것인가? 항상 허둥거리고 잘못된 단서만 추적하는 경찰이 없다면 유머는 어디에서 찾으란 말인가?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범죄 소설에 필요한 휴머니티는 단연 멍청한 경찰이다. 게다가 뛰어난 지성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대신 귀찮은 일도 도 맡아야하고, 비웃음의 대상으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시리즈는 이런 영국식 추리 소설의 전통과 배치 된다. 주인공인 매그레는 용감한 거인이면서, 지적이며, 무엇보다 감수성이 풍부하다. 게다가 그는 아편도 피워야 하고, 클럽에도 가야하는 바쁜 파트타임 탐정들과 다르게 사건의 일선을 떠나지 않는다. 메그레는 수사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인물이자, 다양한 정보 수단을 통제하는 인물이며, 사건의 단서들을 충실하게 독자에게 보고하는 인물이다. 매그레 시리즈에는  파트 타임 탐정들이 자신들의 천재성으로 줍게 되는 완전 범죄를 꿈꾸는 범인들이 놓친 단서 대신에 매그레와 함께 수사를 진행해 가는 동안 획득한 작은 단서들이 그려내는 큰 그림이 있다. 영국식 추리 소설에 비하면 트릭이 떨어지긴 해도 말이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매그레 반장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첫 작품이지만 꽤 충격적인 소설이고 아름다운 문체를 지닌 작품이다. 플롯 자체는 매우 간결하다. 열 페이지도 넘기기전에 독자는 사건의 얼개를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매그레 반장과 함께 뒤쫓는 사건은 일반 추리 소설과 궤를 달리한다. 실제로 파리의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보통이고, 탐정과 조력자의 안전이 보장되는 다른 소설과 다르게 반장이 아끼는 부하는 무참하게 살해 당하며 매그레 본인은 거리에서 총격을 받는다. 심농의 간결한 문체는 비스케이만의 차가운 바닷물과 빗물. 안개와 더러운 하인숙, 독한 술냄새를 자유자재로 그려내며 독자를 몽환의 세계를 이끈다.

 어쩌면 일반적인 좋은 추리 소설의 기준에서『수상한 라트비아인』은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추리 소설의 본분인 추리라는 얼개가 뛰어난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물들이 지니는 개성과 심리 묘사, 분위기 만큼은 탁월하다. 때로는 사건 그 자체보다 등장 인물이 지닌 삶의 비극적인 요소가 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슬픈 결말을 향해 처연하게 걸어가는 인물들의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기에는 강인하면서도 예민한 매그레 반장은 좋은 친구다. 매그레와 함께 걷는 길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있기에 위안이 된다고 할까?
2011/10/31 15:25 2011/10/31 15:25

Be on leave!

Posted 2011/07/25 01:20, Filed under: Ad infinitum/Amor vincit omnia

 창밖으로는 하렴 없이 비가 내리고 난 졸린 눈으로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덧없는 주말은 이미 지나버렸고 시간상으로는 월요일에 접어든 한밤 중인데 그녀는 아직도 서면과 씨름 중이다.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좋으련만 나로서도 아내가 하는 일은 좀 버겁다.

 정신을 차릴 때마다 몇 달씩 시간이 흘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직장을 가졌으며, 별다른 고민 없이 서른을 넘겼다. 계절의 변화에 일회일비 하지 않고, 굳은 날을 헤아리는 일 없는 연애 끝에 늘 바람꽃 같다 묘사했던 사랑스런 연인과 결혼을 했다. 청년 시기의 난 고민 많고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있기를 좋아하던 섬세하다면 섬세하고 괴팍하다면 괴팍한 사람이었는데 요즘의 난 그저 편안한 사람이다. 사랑스런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왜 이리 짧은지 한탄하고, 그다지 복잡할 것도 없는 사안을 이해못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것을 제외하면...

 복잡하게 썼지만 요약하면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 마음을 글로 옮길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고, 신혼 여행 겸 여름 휴가를 가기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다 보니 주말이 끝나 버렸다는 말이다. 늦은 밤 라디오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불현 듯 몇 문장 토해놓고 싶은 기분도 들고.



2011/07/25 01:20 2011/07/25 01:20

다시!

Posted 2011/04/21 22:19,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숫자의 감옥에 수감된 이후 잃어버린 것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문장이다. 자연스럽게 써내려지던 문장은 이제는 너무 조악해 부끄럽기만 단어의 나열이 되어버렸다.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확립한 나름의 문체도 사라지고, 이제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낯선 문장이 내게 손짓한다.

생각을 담아대는 가장 훌륭한 도구였던 문자가 낯설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어린 시절 단 한번도 꿈꾸지 않았다. 그 시절에 나에게는 그런 날이야 말로 1984년에 등장하는 쥐보다도 더 공포스럽고, 화씨 451의 미래보다 더 암울하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조금 허전하고 답답할 뿐 숫자의 감옥도 나쁘지 않다. 출퇴근 시간에 듣는 음악 뿐이지만 여전히 음악도 존재하고, 깊게 빠져들 만큼 충분한 여유가 없지만 책 역시 내 삶을 아직 떠나지 않았다. 학생 시절보다 더 다양한 커피를 마시고 에스프레소 머신도 집에 들여놓았다. 다만 옛날의 내가 느꼈던 감동과 기쁨이 보다 무미건조한 방법으로 표출될 뿐이다.

사실 가장 마음 아픈 순간은 어어지지 않은 채 몇해 동안 방치된 블로그를 보는 순간이다.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삶의 즐거움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이 곳의 황량함은 나를 어두운 불안의 경계 밖으로 내몬다.

길게 썼지만 결론은 하나다. 다시 이곳에 글을 쓰고 싶다.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대세인 이 시대에도 난 여전히 이 공간이 제일 아늑하고 편안하다.

2011/04/21 22:19 2011/04/21 22:19

Hey! Sweet dreams!

Posted 2011/01/14 01:48, Filed under: About_A_boy/Letter

몇 해전 제프리 유제니다스의 『처녀들 자살하다』를 읽는 동안 과거를 추적하는 이제는 중년을 향해가는 미시간의 옛 소년들의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진 때가 있다. 그들의 후회와 안타까움 밑바탕에 깔려 있는 불행한 소녀들에 대한 미안함을 보면서 문학적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냈지만 동시에 결코 소년들 같은 후회가 내 삶에 찾아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항상 잔인하다.

서른의 끝에서 옛 친구의 죽음과 조우했다. 너무나 안타까웠고 불행하였던 사건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가해한 우울함을 선물했고, 결국 한 해를 마지막하는 12월의 마지막 오후 사무실 책상 앞에서 지구 반대편 아마존 강가에서 연말을 맞이한 친구와 학창 시절의 우리를 떠올리는 동안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귀국하면 밥이나 먹자란 그의 인사말이 허망한 마지막 인사가 될 줄 몰랐기에 참담함을 감추지 못하는 친구를 보면서 삶이 조금은 허망해졌다. 사무실 밖은 연말인파로 들썩거리기 시작했지만 그후로 몇 시간 동안 사무실에서의 내 웃음은 슬픔을 감추기 위한 가식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은 항상 선명한 컬러 사진 속의 열여덟 봄소풍 당시의 모습이다. 대학 졸업의 후의 모습을 보지 않은 것도, 제대 후 어설프게 기른 수염을 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왼쪽 끝에서 홀로 팔십 센티미터쯤 떨어져 누군가의 어깨에 팔을 기댄 그처럼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열 네 살부터 스물 한 살까지 수 많은 장면이 머릿속에 담겨져 있지만 왜 이 사진만이 계시처럼 떠오르는지는 이제는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가 되었다.

1994년 처음 내가 본 그는 결코 호감이 가는 존재는 아니었다. 듣기 불편할 정도로 빠른 말과 독특한 억양. 정상과 사시의 경계에 선 눈동자, 먼지 낀 안경.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한다 쳐주기에는 모자란 성적. 무엇보다 열의와 노력은 있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지성. 격렬하지만 쉽게 꺼지는 분노. 이 모든 요소는 어리기에 더욱 잔인할 수 밖에 없었던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소년들 사이에서 그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돋보이게 만듦과 동시에 그의 한계를 가늠하게 만드는 기준이 되었다.

어느 날 지저분한 그의 안경릅 벗겨 닦아주면서 처음으로 맨 눈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안경을 벗은 맨 눈을 보는 순간 열 여섯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피로한 눈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 순간에야 그도 우리가 그를 보고 느끼고 있는 인상을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동시에 특이한 생각을 내뱉거나, 돌발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 사실을 부각하는 지금의 그 자신도 진지한 결의를 통하여 형성된 하나의 행동 양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무지한 쪽은 나였으며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삶과 진지하게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 머리속을 꿰뚫었다. 동시에 그 의 노력과 좌절이 온전하게 보답받지 못할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힘겹게 만드는 괴로운 삶이 전개될 것이며, 그가 달관이란 개념을 배울 때까지, 내가 여기 있다고 격렬하게 제 목소리를 내는 행동 양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를 표현할 때까지 그가 평온함을 얻지 못할 거란 확신 마음 속에 새겨졌다.

시간이 흐름 속에 그와 오랜 시간을 공유하게 되었지만 처음 받은 인상은 계속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그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이 싫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되려 좋아졌다. 그의 논리적 비약이 억지로 들리지 않고, 그의 짧은 분노에도 익숙해졌다. 그가 잠시 고요히 쉴 때는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으며, 그의 거친 숨소리가 좋아졌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나가기 마련이고, 시간은 소년에게나 노년에게나 똑같이 좋은 친구다. 인생은 제법 길기에 시간이 그에게 현명함을 가르쳐 줄 것이고, 결국에는 삶의 평화와 행복이 그에게 찾아올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운명의 여신이란 참으로 변덕스러워서 내 확신이 거짓이 되고, 혹여 그의 노력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보답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열여덟 이후 우리는 가끔 그의 행동을 장난 삼아 놀려댔지만, 그의 노력과 고단한 삶을 길고 긴 인생의 한 단계 혹은 준비 과정, 가치 있는 삶의 경험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도전과 희망이 스스로를 구속하는 덫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소년에게 꿈은 필요한 법이고, 그 역시 꿈 꿀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은 자신이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란 간단한 진리에 수긍했다. 아직은 뭐든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무모함이 소년의 특권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틀렸다. 적어도 칠십쯤은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삶이 그에게 허락한 시간은 고작 삽십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삽십년 쯤은 태어나서 자라고 울며 괴로워하며 커다란 목표를 꿈꾸어도 된다는 논리에는 그 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성취 혹은 달관을 통한 행복이 기다리고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알았더라면 조금 더 따뜻하게 안아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누었을 고민을, 우리는 그가 혼자 해결하도록 놓아 두었다. 가끔 힘들다는 투정을 들어주기는 해도 결코 너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가장 가치있게, 가장 행복하게 쓰라고 조언해주지는 못했다. 그의 노력과 피로함, 고통, 고뇌가 보답받기를 빌어주었지만 늘 가능성에 반신반의했던 우리였지만 그가 종국에는 작은 삶에 만족을 느끼며 행복할 것이란 사실 만큼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서른에 어이 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그는 내가 보아온 시간 동안 오늘보다는 내일을 생각하며, 자신보다는 덧없는 주변에 기대에 부응하고자, 스스로가 인식하는 냉정한 현실에 수긍하기 보다는 더 나은 미래와 커다란 꿈을 향해 자신을 맡겼다.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죽음은 이제 우리가 꿈꿀 시간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경종임과 동시에 소년들이 단 한 순간도 인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십대의 어느 봄. 도서관에서 카프가 전집을 읽으며 그는 고통 없는 빠른 죽음, 혹은 자살이 그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때 우리의 반응은 한편은 걱정에 한편은 성마름에 꽤나 거칠했는데 돌이켜 그 순간을 생각하면 울음이 생각을 멈춘다. 완벽하고, 아름다우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했음을 이제는 안다. 그의 고단했던 삶에 때로는 장난으로, 때로는 어리석음으로 무게를 더했기에 미안하고, 그의 노고를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던 인정머리 없음에 부끄럽다. 따뜻한 선의로 삶의 피로와 커다란 성공에 대한 갈증을 나누지 못했음을. 아니 말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2011/01/14 01:48 2011/01/14 01:48

소설가의 죽음

Posted 2010/09/07 00:24, Filed under: Column/Historical

 숫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요즘의 나에게 문학은 환상과 같다. 어느 사이에 문학은 손을 뻗어 붙잡고 싶지만 좀처럼 붙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름다운 문장에 환호하던 난 사라지고, 이제는 마음껏 써지지 않는 토해내면 보잘 것 없는 문장에 좌절하는 나만 남았다. 어린 시절 문학은 나에게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세상에는 감히 정복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 속에서 내 지성뿐만 아니라 허영심 또한 자라났다. 하지만, 어두운 도서관의 서가를 정복하는 즐거움이 대제국의 황제가 되는 기쁨과 같다고 믿던 소년의 꿈은 달마다 차고 비기를 반복하는 월급 통장 사이에서 어느새 사치품으로 전락했다.


 달콤하고, 편안하고, 즐겁고, 안락하지만 문학이 없는 오늘의 내 일상에 던져진 낯선 소식이 바로 주제 사마라구의 죽음이었다. 내가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던 그 즈음에도 이미 노령의 그였던 만큼 죽음은 당연한 순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운 여름을 이기기 위해 차가운 물과 벗하는 동안 블리문다의 아름다운 모습이, 하늘을 날기 위한 투쟁이, 모두가 눈이 멀어 버린 세상에서 눈이 멀지 못한 저주를 안은 한 여자의 삶이, 늘 소설 속 어디쯤 자리 잡고 있다가 종국에는 쓸쓸하게 죽어간 한 마리 개가 마음을 스쳐갔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내려진 결정이 우리를 만들어간다는 노작가의 인터뷰가 생각나 마음에 깊은 파문을 남겼다.


 매일 새로운 이야기가 세상에는 쌓여가지만 대가다운 상상력과 필력을 이야기에 담아 삶의 본질을 함께 고뇌하고, 통찰을 제시하던 거장들의 시대는 이제 저물어가고 있다. 끝이 없으리라 믿었던 소설의 전성기도 이렇게 대가들의 소멸과 함께 끝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 삶의 이십대를 풍요롭게 수놓던 그의 작품을 기리며!

 

2010/09/07 00:24 2010/09/07 00:24

알링턴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Posted 2010/06/09 01:19, Filed under: Review/Book

소설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의문을 표하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난 책이란 매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작가와의 대화를 즐긴다는 요지의 대답을 하곤 한다. 얼치기 독심술사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 순간 순간마다 이어 지지만 작가가 창조해낸 미지의 세계로 걸어들어가 작가의 생각을 훔쳐보는 일은 즐겁다. 거기에 독자라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서는 창작의 고뇌 혹은 재창조의 어려움에 대한 배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독자란 작가가 창조해낸 무기물인 이야기에 상상력을 결부시켜 진짜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때로는 비정할 정도로 냉혹해져도, 사소한 일에 흥분해도, 엉뚱한 이해로 작가를 오도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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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에 흥분하기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는 역제 떄문에 소설이 지닌 매력이 반감된 경우에 속한다. 원제 the Arlington Park가 지닌 소설적 배경의 단순 명쾌함과 유사성은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라는 사족 덕분에 반감되고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아이러니가 담긴 제목 덕분에 소설 집중을 어렵게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실존이 되지만 '여자들의 완벽한 하루'는 '전설의 레젠드' 따위에 불과한 넝마에 불과할 뿐이다. 열흘 동안 이어지는 비처럼 우울한 현실에는 그만한 진지함이 필요하다. 도시의 어느 거리로도 치환될 수 있는 평범함과 그 평범한 속에 담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참으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답답한 그 현실을 '어느 완벽한 하루' 따위로 말장난으로 오도하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냉혹해지기

깊은 고민 없이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소설들의 특징은 참신함은 있지만, 신념이나 철학의 부재가 눈에 띈다는 점이다. 레이첼 커크스의 이 소설도 이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2/3지점까지 등장하는 각 인물들의 삶은 독자에게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하여, 여성으로서의 삶으로 규정되는 현실의 답답함에 대하여 분개하고 진지한 고민을 요구로 한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은 그저 그런 공간에 아무런 희망도 의지도 없이 놓여 있다. 레이첼 커크스에게 이들이 동정의 대상인지, 아니면 진지한 성찰의 대상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녀의 캐릭터들에 대한 작가 스스로 애정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겠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갇혀 천천히 삶의 무게에 질식해 버릴 때까지 하렴 없이 내일에 몸을 맡길 그녀들에게 목간 인형처럼 뻣뻣한 결말 대신에 약간의 다정한 배려를 베풀어 주었다면 이 작품은 조금 더 희망적인 작품이 되었을 테고 소설로서의 완성도 또한 높아졌을 것이다.

때로는 비극보다 희극이 삶을 더 잘 변주해 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웃음기조차 지워버린 채 또 다시 지옥보다 더 괴로운 현실에 울어야 할 독자들에게 그 누구보다도

P.S. Mrs. Dalloway를 추모하며, 버지니아 울프 흉내는 아무나 내는 것이 아니다.

2010/06/09 01:19 2010/06/09 01:19

날카롭지만 쓰디쓰고, 격렬하면서 고통스런 인식이 아침 나절의 나를 휘감았다. 운명에 투덜거리는 것이 멍청함의 또 다른 징후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면 크게 소리라도 질렀을 정도의 참담함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밀어 닥쳤다. 'deadlock'이라는 단어 외에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통찰력은 지혜의 정화지만 동시에 슬픔의 원천이며 그렇기에 자신은 운명의 방관자가 되어버렸노라고 아페르티프로 보기에는 지나친 몇 순배의 술잔과 함께 독백을 일삼던 시시한 소설의 쓰러져가는 한 인물이 생각난다. 그리고 나 역시 그 같은 인물로 늙고 그와 같은 epitaph를 가지게 되겠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국 내가 서있는 지평선이 전술한 이 슬프고 우울한 현실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온다

2009/10/25 12:51 2009/10/25 12:51

아우구스투스

Posted 2009/05/29 09:36, Filed under: Review/Book

몇 해 전 앤서니 애버릿의 키케로를 읽을 때 난 공화국의 현실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공화국의 이상에는 동의했던 한 남자를 소설처럼 극적으로 그려낸 것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지적하는 사실들이, 작가가 사실로부터 그려내는 거대한 형상에 이성은 침묵했고 그가 그려낸 키케로의 비장함에 숙연함을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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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과연 그가 그려낸 것에 경탄한 내가 과연 옳았던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문가가 쓴 연구서들이 줄기차게 번역되어 나오면서 아마추어 역사가가 쓴 로마사를 바라보는 시선에 감탄 대신 냉혹함이 서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통찰력이 때로는 뻔뻔한 표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생긴 비웃음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샤임의 로마혁명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앤서니 에버릿이 그린 아우구스투스에 다소간의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인물이 지니는 잔인함과 비겁함, 불굴의 의지력을 섬세하게 그려낸 점이나, 노련한 정치가로 성장하기 전의 젊은 도살자의 모습은 꽤 재미있더라도 말이다. 그가 그려내는 것들은 공화국이란 치장을 뒤집어쓴 황제정의 어두운 일면이나, 상식이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로마사의 상식을 변주한 것에 불과하기 떄문이다.

게다가 그는 그레이브스의 소설적 영향력을 완벽하게 종속되어 있다. 리비아와 티베리우스로 대표되는 구공화정 주도 세력의 힘을 인정하는 것과 리비아를 악녀로 그리는 것은 별개다. 그녀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너무나 단편적이어서 역사적 사실로 어떤 해석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천년 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지탱하던 주요 파벌의 숨겨진 알력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파벌 사이의 경쟁은 있었겠지만 애버릿이 그린 바대로의 공화정 말기와 다를 바 없는 일인자가 되기 위한 소리 없는 내전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자리바꿈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추정할 뿐 추론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마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 어떤 책보다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기 이전의 옥타비아누스가 겪었던 험난한 젊은 모험가로서의 십 년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기에

2009/05/29 09:36 2009/05/29 09:36

기나긴 순간

Posted 2009/05/03 14:25, Filed under: 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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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번역될 벨린저의 소설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축복이다. 그의 교차 서술은 재미있지만 동시에 번역의 묘가 살아 있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반복해서 읽다보면 쉽게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기나긴 순간』은 그의 소설 가운데 유일하게 봉인을 열 필요성을 느낀 소설이지만 동시에 가장 시시한 결말을 가진 소설이었다. 이미 소설의 초반부에서 검토한 가장 황당한 결말 가운데 하나로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졌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황망한 결말이라 일고의 여지도 없이 제거해 버린 하나의 가능성으로 소설이 끝났을 때 독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벨린저의 『이와 손톱』 수준의 완성도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분노에 책장을 찢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쌓이지나 않을까?

2009/05/03 14:25 2009/05/03 14:25

변덕스런 봄

Posted 2009/04/26 22:38,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_가슴을 갈라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문장을 고르기란 쉽지 않다. 결국, 2주가 걸러서야 키케로의 서간문에 실린 유명한 문장이 떠올랐다. 본래는 대화편에 등장하는 문구를 키케로가 인용한 것인데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불의를 행하기 보다는 불의로 고통받는 것이 낫다' 정도다. 기억나지 않는 원문을 찾아 페르세우스 프로젝트에서 번역문을 찾았고, 친구에게 부탁해 롭 시리즈에서 해당 구절의 원문을 찾았다. 좋아해주면 좋겠지만 기뻐해주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자신은 좀 없다.

_ 다시 브로콜리 너마저도의 <보편적인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늦은 밤 텅빈 사무실에 앉아 스탠드를 켜놓고 도시를 삼킨 어둠과 자동차들이 만들어내는 붉은 행렬을 보면서 듣는 <보편적인 노래>는 새로운 맛이다. 사실 하루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혹사한 다음 찬바람을 맞으며 지하철 역까지 걷는 15분이다. 아이팟의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고 듣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스노우>나 페더의 <사일런트 크라이>는 왜 그리 좋을까? 부드러운 가죽 로퍼에 느껴지는 땅의 감촉과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그 15분의 존재 때문에 일하는 것이 좋다면 억지일까?

_오래 전에 읽다가 멈춘 『잃어버린 것들의 책』에서 아주 인상 깊은 문장을 발견했다. 누이 많은 집안에서 자란 막내 특유의 붙임성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날마다 한심한 유머를 터트리는 나로서는 그 문장을 진작에 외우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말이나 문장 따위에 사람의 마음을 담는다는 일의 무모함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은 항상 지나간 것을 후회하는 법이고, 조금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열정을 잃지 않는 법이다. 롤랜드라는 기사가 남긴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참조할 것!

_'완전 거짓말쟁이세요 -_-;'란 답신에 친구와 나는 거리에서 쓰러질 정도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on the street where you live'의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어쩌면 내 나이 또래가 마지막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 평소에 내지 못하는 용기를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낼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우리로서는 그네들이 사는 거리를 걸으며 우연이 찾아오기를 꿈꾸고 희망하는 데 말이다. 하지만, 몇 해만에 친구는 카메라를 챙기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시원스런 웃음을 얼굴에 띄워놓고 있었다. 구김 없이 유쾌한 순간이 너무 오랜만이라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설레임을 담은 표정으로 답신을 기다리는 지기를 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괜시리 나까지 즐거운 웃음에 전염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웃음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긴 해도 말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 그 길에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는 모르나 -되도록이면 해피엔딩이기를 바란다- 시간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은 비단 사라지지 않는 수염자국만은 아닐 테니 걱정은 천천히 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_2003년 7월에 시작한 블로그가 어느덧 햇수로 일곱 해를 맞았다. '50만 히트' 같은 것을 기다리는 유치함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이 거대한 내 삶의 기록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니 철없는 청년의 코믹 릴리프 혹은 부파 오페라를 묵언으로 감상해준 수많은 손님에게 꿈꾸는 일들이 마법처럼 이루어지는 하루가 찾아오기를 빈다는 인사쯤은 남겨도 되지 않을까? 

2009/04/26 22:38 2009/04/26 22:38

회중 시계

Posted 2009/04/24 07:25,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서른에 가까워 질 때까지 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회중 시계 보는 토끼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했고, 시계 초침 소리에 쫓기는 느끼는 사람들의 초조함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어느덧 나도 그들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2009/04/24 07:25 2009/04/24 07:25

책 읽어주는 남자

Posted 2009/04/13 09:04, Filed under: Review/Book

난 새책을 사랑한다.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새책을 읽는 것은 내 은밀한 소유욕을 채워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타인의 손때가 묻은 헌책에도 새책 못지않은 즐거움이 남아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은 책 속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누군가의 흥분과 긴장감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극도의 흥분 상태와 긴장감은 손가락 끝 마디를 습하게 만드는 법이고, 책장에는 이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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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는 동안 내가 발견한 재미도 바로 이런 흔적에서 비롯되었다. 얼굴조차 모르는 타인의 흥분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을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비정상적인 범주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이란 매개체를 통해서, 책장 끝에 남은 진한 손가락 자국을 통해서 낯선이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어째서 그녀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소년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나가 스타킹을 신는 장면에 매료되었을까? 또 나와는 다르게 알몸으로 등에 다가선 한나보다도 책을 읽어주기를 청하는 그들의 의식에 더 매료되었을까? 수영장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한나의 뒷모습을 부정한 소년의 절규에 왜 그들은 눈물을 흘렸을까? 한나의 방에 남아 있는 사진 한 장이 왜 그렇게 그녀들을 슬프게 만들었을까?

독후감이나, 독서회의 점잖은 대화와 달리 책에는 문장으로 숨길 수 없는 진짜배기 감정이 남아 있을 때가 있다. 재미없는 부분을 재빨리 넘기는 손가락의 투표는 발의 투표만큼이나 정직하고, 소설의 백미를 알려주는 지표 역시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엄격한 평가의 기준을 들이대자면 『책 읽어주는 남자』는 우리가 수없이 접한 소년과 중년 여자의 사랑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청춘>을 통해 이 장르에 대한 혐오감을 희석시켰고, 책을 읽어준다는 행위가 지니는 독특한 매력을 제외하면 이 책은 권터 그라스를 비롯한 47그룹의 아류라는 인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시간을 뛰어넘는 고전이 되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게 사랑에 대하여, 부끄러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다는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2009/04/13 09:04 2009/04/13 09:04

임페리움

Posted 2009/03/29 13:07, Filed under: Review/Book

서구의 북컬렉터들이 바라는 이상이 있다면 -물론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는 인큐내뷸러나 아메리카나 같은 것을 제외하고- 최상의 것은 저자 자신이 소유했던 수택본이나 원고를 손에 넣는 것이고 다음은 초판에 담긴 서명본을 얻는 것이다. 다행히 이런 기이한 취미는 우리네 문화와는 너무 이질적이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내 손에도 우연하게 저자 서명본 초판이 놓였던 적이 있다.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들린 워터스톤즈의 낭독회에서 본 로버트 해리스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빼면 마른 체격의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주름진 얼굴을 가진 가진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으나 그가 내가 흥미롭게 본 <이니그마>와 <파더랜드>의 원작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그가 낭독하는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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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키케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새로운 시대극이라는 광고 문구보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훌쩍 넘긴 어느 페이지에서 발견한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이었다. 마치 현대의 리포터가 현장을 취재한 듯 펼쳐지는 공화정 로마를 상징하는 부조리와 치열한 경쟁의 장을 다룬 한 막 앞에서 작가의 특별한 능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화정 로마를 다룬 소설의 백미는 항상 콜린 맥컬러우의 『로마의 일인자』 시리즈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로버트 해리스의 『키케로 3부작』은 다른 의미의 백미가 될 것이 확실하다. 맥컬러우의 『로마의 일인자』가 캐릭터와 섬세한 묘사가 만들어 내는 인간의 본성의 치열한 장을 설명하고 있다면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은 정치 스릴러에 가깝다. 맥컬러우의 로마가 인간이기에 욕망하는 수많은 탐욕과 야망이 만들어 내는 향연이라면 로버트 해리스의 로마는 정치라는 경쟁의 장에 던져진 투쟁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경기장에서 키케로만큼이나 다양한 적을 가졌고, 험한 고초를 겪은 인물은 없으리라.

『임페리움』은 키케로의 삶의 단계를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베레스에 대한 기소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정치인 키레로의 본격적인 투쟁이 펼쳐질 무대를 마련한 집정관 당선과 함께 마무리 짓는다. 그 사이 몇년 동안 독자는 아무런 정치적 입지를 갖지 못한 이 지방 출신의 이 로마인이 어떻게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고, 포퓰라리스의 이익을 대변자였다가 얼마나 극적으로 옵티마테스로 변신을 했는지를 추적해 나간다. 키케로의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었다고 이 책은 규명하지 않지만 최소한『임페리움』 안에서 저자는 그 역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간 한 사람의 로마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세대가 내전을 통해 소멸한 다음 로마의 주인이 된 지방출신의 새로운 로마인들이 만들어 낸 허울뿐인 공화국의 주인공들과 그가 얼마만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를 이야기 이곳 저곳에 뿌려두고 있다.

물론 이야기는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카탈리나 탄핵을 통해 보여줄 키케로의 활약과 공화국의 프린켑스로써 삼두에 맞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그의 정치적 역경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그의 신념과 용기가 어떻게 드러날지는 아직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제 겨우 기나긴 이야기의 서두만 풀어놓고 있음에도 이 소설의 재미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P.S.


2009/03/29 13:07 2009/03/29 13:07

나는 어떤 책?

Posted 2009/03/26 19:09,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You're The Guns of August!
by Barbara Tuchman
Though you're interested in war, what you really want to know is what causes war. You're out to expose imperialism, militarism, and nationalism for what they really are. Nevertheless, you're always living in the past and have a hard time dealing with what's going on today. You're also far more focused on Europe than anywhere else in the world. A fitting motto for you might be "Guns do kill, but so can diplomats."
Take the Book Quiz at the Blue Pyramid.

2009/03/26 19:09 2009/03/26 19:09

화가들의 천국

Posted 2009/03/16 21:20, Filed under: Review/Frame

세상에는 각각의 빛을 품은 수많은 장소가 있다. 런던에는 런던의 빛이 있고, 파리에는 파리의 빛이, 프로방스에는 프로방스의 빛이 있으며 베니스에는 베니스만의 빛이 있다. 언제인가 여행 전문지의 사진기자가 되고 싶다고 되뇌었던 것은 이런 사실을 텍스트가 아닌 몸을 통해 느꼈기 때문이리라. 필름에 담기는 빛은 그동안 내가 여행했던 장소가 지니는 독특한 지문이 된다. 그렇기에 빛과 색을 고르라면 역시 난 색이 아닌 빛을 고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색이 빛보다 아름다울지라도. 빛은 내 삶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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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파리의 빛이 가장 아름답게 담기는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연석 위에 깃든 오후의 태양을 즐길 수 있는 퐁피두센터 앞 광장과 시가지 위에 낮게 걸린 구름에 닿은 파리의 빛을 볼 수 있는 퐁피두센터의 레스토랑에서일 것이다. 퐁피두센터에서 바라보는 파리는 매우 아름다워 센터에서 만날 수 있는 현대미술의 거장들을 초라하게 만든다. 예술이 위대할지 모르나 그것이 자연보다 위대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인 동시에 예술의 지향점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센터를 채운 수많은 재기 발랄한 작품들과 학생들의 스케치가 바라보는 궁극의 지향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저 빛이 만들어낸 위대한 풍광보다 더 멋진 것을 만들어 내는 것. 그런 꿈을 꿔보는 것이 어쩌면 퐁피두센터의 존재가치인지도 모른다.

사실 <화가들의 천국>이란 주제로 열린 퐁피두센터 특별전을 보고 이런 상상의 나래라던지, 감정을 토설하는 것은  온당한 태도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 인상에 남은 퐁피두센터를 말하지 않고서는 전시회를 보고 내가 느낀 정서적 이질감을 제대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퐁피두에서 감상한 그림들은 보다 해체적이었고, 성기고 낯설었으며, 꾸미지 않는 오브제와 이미 현실에서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오브제를 구상과 비구상 모두에서 볼 수 있는 모순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퐁피두센터 특별전이란 이름과 다르게 전시회를 통해 내가 바라본 것은 오르세 미술관의 따스함과 테이트 모던의 온건함, 그리고 야수파이기를 포기한 화가들의 후기작들이 총망라된 예쁘고 이해하기 쉬운 성찬이었다. 12월의 빛을 즐겼던 그 당시로써는 이해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독특함을 대신한 것은 밝고 희망적인(?) 색채의 미술이었지만 내심 그런 부분이 더 좋았다. 진짜 '화가들의 천국' 보다는 '갤러리의 천국'에 걸린 그림들이 더 아름다우리라 믿는 나로서는 '갤러리의 천국'에 걸릴 법한 작품들을 바라보는 동안 즐거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티즈의 위대한 실험정신과 브라크의 지문을 숨길 수 없는 초기작들, 언제나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샤갈의 무지개, 야수파의 해체를 선언한 이후 매너리즘의 함정에 빠져 다시는 위대함을 회복하지 못한 많은 화가의 그림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우아한 소품처럼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일견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자연스레 화가로서 완숙해지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시대에는 더는 위대한 도전이 될 수 없겠지만, 당시로써는 위대한 도전이고, 실험이었음이 분명한 작품들과의 만남은 만남 자체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폴 존슨에 의하면 많은 작품을 보는 것보다 거장의 명작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것이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는 더 좋은 방법이라지만, 사람은 굽이굽이 돌아가고  때로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을 더 좋아할 때가 있다. 내게 있어 이 전시회가 그랬다. 거장들의 걸작에 접근하는 수작보다는 그곳까지 도달하기 위해 모든 고뇌를 쏟아부은 수수한 작품들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2009/03/16 21:20 2009/03/16 21:20

스틱스강의 하우스보트

Posted 2009/03/12 22:29, Filed under: Review/Book

나처럼 허세를 부리며 약간의 인문학적 소양을 가졌다고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으로서는 『스틱스강의 하우스보트』 같은 제목 자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스틱스강에 떠 있는 하우스보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함이 밀려왔고, 저승을 헤매는 영혼들이 나누는 대화가 어떤 것일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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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다시는 우디 앨런의 코메디를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음에도 <Scoops>를 보게 된 것은 아름다운 스칼렛 요한슨 때문이 아니라 스틱스강을 건너는 와중에 이승으로 잠시 도망친 한 영혼의 행위가 이야기의 시발점이 된다는 설정에 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백하건대 시간 여행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저승으로의 여행이다. 그렇기에 단테의 『신곡』에 열광했고, 사악한 오딧세우스가 심연에서도 여전히 고뇌하고, 불평하는 영웅들을 만났던 장면의 전율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스틱스강의 하우스보트』는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책과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라면 한 번쯤 생각해 봤고, 읽어봤을 이야기를 작가는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그렇기에 재미는 있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지는 않는다. 또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게 하지만 이내 공허한 침묵으로 독자를 밀어 넣는다. 저승의 영혼들이 벌이는 논쟁은 즐겁지만 산뜻하지는 않다. 기발한 소재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해는 높이 살만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이 짧은 소설 속에서 어떤 아름다움도 찾을 수 없다.

-피곤한 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서서 보기 좋은 책. 잠시의 유쾌함을 위해 의식을 의탁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겠지만 읽고 난 뒤의 허망함에 대해 단단히 각오를 하고 책장을 넘겨야만 하는 소설.

2009/03/12 22:29 2009/03/12 22:29

안녕, 복남!

Posted 2009/02/27 22:15, Filed under: About_A_boy/Letter

시골집에서 키우던 복남이가 죽었다. 반가움에 어쩔 줄 모르고 빠르게 뛰는 녀석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는데...... 기쁨을 온몸의 근육으로 표현하는 녀석은 또 하나의 가족이었고, 녀석의 영리함은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발치에 누워 배를 벌러덩 내놓은 채 누워있는 녀석의 표정은 몇 시간의 고된 여정이 가져다준 피로를 잊게 하기에 충분했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이내 잠이 들곤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선량이 표정이 마음속에서 솟아나 얼굴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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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제는 녀석과 함께 보낸 수많은 시간이 희미하다. 지난 설 연휴에 본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려 해도 다른 기억들 속에서 쉽사리 꺼내지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녀석이 우리 가족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에 녀석을 기억하는 일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녀석이라면 내 아이가 녀석을 매만져줄 만큼 오래 살 줄 알았고, 만약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냄새만으로도 새 식구가 된 내 처를 알아보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지독할 정도로 우리 식구밖에는 몰랐던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지친 몸으로 우리의 손짓을 갈구하며 떠났다. 강아지로서는 짧지 않은 삶이었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리 길지 시간 동안 우리 가족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행복감은 준 채로 말이다. 살아가면서 나를 둘러싼 바깥 울타리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한 끝 없는 헌신을 녀석은 나에게 주었고. 그랬기에 녀석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녀석에게는 영원과도 같을 오랜 삶을 살면서 녀석에 대한 추억과 기억이 희미해지고 말 것이란 사실이 유쾌하지 않다. 왜 녀석을 본 마지막 순간에 조금 더 오래, 따뜻하게 만져주지 못했을까? 녀석의 평생 우리만 생각하며, 우리만이 삶의 전부였던 녀석에게 말이다.

2009/02/27 22:15 2009/02/27 22:15

새벽처럼 찾아오는......

Posted 2009/02/21 22:16,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한 교정에 앉아 서로 고민과 꿈을 두서없이 늘어놓을 수 있었던 시기 친구 하나는 내게 사랑은 새벽처럼 찾아온다고 말하곤 했다. 새벽처럼 찾아오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한 숨을 내쉬는 그의 표정에는 무언가 간절한 것이 있었다. 어둠 속에 찾아오는 빛처럼 그 사랑은 녀석에게 소중한 것이었겠지. 하지만, 그 후로 난 다신 그에게 무엇이 새벽 같은 사랑인지,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물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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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 대신 그를 감싼 것은 높이를 알 수 없는 격랑이었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는 격랑에 완벽하게 침몰해 버렸다. 메마른 표정을 지닌 그에게 새벽 같은 사랑을 묻기에는 난 덜 무뎠고, 그 역시 그 순간을 잊은 듯 입을 닫아버렸다.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남긴 채로 말이다. 그리고 나 또한 조금씩 그의 메마른 표정을 베껴가기 시작했다.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다시 생각난 것은 좀 의외의 순간이었다.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느낀 알콜의 향에서 철없던 어린 시절에 소독약 냄새가 나는 손을 잡고 평생을 살 수 없다고 말하던 나를 연상했기 때문이었다. 스무 살의 난 내 인생이 더욱 커다란 것일 줄 알았고, 내 야망의 크기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단단할 줄 알았다. 그랬기에 소소한 행복보다는 거센 물결에 내 자신을 맡기고 싶었다.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난 변하지 않았다. 예의 바르고 이해심 많지만 사랑에 있어서 결정적인 한 걸음만큼은 주저하며 머뭇거리기를 반복하는 그런 헛된 인물이 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날들이 지난 지금 난 그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고 부질없는 꿈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이제는 작고 소소한 것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일에 몸을 맡기는 일상 속에서 절로 깨닫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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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힘을 빌려 오랜 지기에게 그 말을 전하는 순간 난 그제야 이십 대의 한밤중을 넘겼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오래전 그가 말하던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이 무엇인지, 한밤을 넘겨야만 진실을 볼 수 있다던 어느 소설 속 문구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애써 부정해왔던 것이지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옛 지기가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던 것은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매일 찾아오는 새벽처럼 사랑은 항상 다시 찾아오는 법이고, 사랑 자체를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 앞에서 'to be or not to be'를 읊는  나를 모른 채, 그는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리라.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남아있다고 믿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버거운 이야기로 그는 나와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우습지만 스무 살의 난 복잡하고, 난해한 것에 끌리면서도 늘 바람꽃 같은 사람을 꿈꾸었다. 그리고 서른을 눈앞에 둔 이제 바람꽃 같은 여자가 영화속 한 장면처럼 내 눈앞에 서 있다. 사랑은 늘 새벽처럼 찾아온다고 하지만 어쩌면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 새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내 마음을 풀어놓겠다고 굳게 다짐해보건만 제자리를 맴도는 이 버릇만큼은 어찌할 수 없다. 새벽처럼 찾아오는 사랑을 내가 더는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홀로 마음속에 담아두지 못하겠음에도 말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인데 무슨 서설이 이리 긴 것인지 모르겠다.

2009/02/21 22:16 2009/02/21 22:16

자전거를 탄 세 남자

Posted 2009/01/31 23:02, Filed under: Review/Book

불과 보름 전까지도 『자전거를 탄 세 남자』에 대한 내 평은 한 계절을 풍미할 수 있는 베스트셀러는 될 수 있으나 고전으로 살아남을 만큼의 문학적 가치는 없다는 것이었다. 『 보트 위의 세 남자』가 불멸의 고전이 될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가지고 있는 반면 『자전거를 탄 세 남자』의 과장된 풍자는 되려 소설의 완성미를 떨어뜨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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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립무원의 설국에서 보낸 설 연휴 동안 소설을 읽어가는 관점에 변화가 생겼다. 자전거를 타고 떠난 세 남자의 여행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는 세 남자의 숨겨진 이유에 더욱 끌렸기 때문이다. 『보트 위의 세 남자』가 삶에 찌들지 않은 젊은 남자들의 유쾌한 소극이라면 『자전거를 탄 세 남자』는 적당히 삶에 찌들고, 포기를 배운 중년 남자들의 탈출극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진짜 재미를 느끼려면 그들의 좌충우돌 여행보다는 그들이 내뱉어 내는 대화와 에피소드 뒤에 숨겨진 불안감에 동감을 표하는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탬즈강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가 볼 수 있었던 나른하면서도 유쾌한 세 남자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변했는지 발견하는 것은 이 두 권의 소설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깨달음이다. 세 남자만큼이나 멋진 캐릭터였던 몽모랑시는 더이상 짖지 않고, 젊음이 주는 특권을 누리던 게으른 사내들은 누군가의 남편이, 혹은 나이 먹은 노총각이 되었다.

이들의 삶에서 느긋함에 대한 열정은 사라졌고, 그 대신 삶에 대한 투덜거림이, 불안감을 숨기고자 과장하는 버릇이 들어섰다. 가볍게 아페리티프를 마신 듯한 흥쾌함을 앗아간 대신 시간이 채워넣은 것은 빈정거림과 자기파괴적 성향의 유머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나도 이제 슬슬 이들의 처지에 동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탬즈강을 여행하는 유쾌한 세 남자를 상상하며 이들의 여행에 동참했던 난 사라지고 글래스에 폭탄을 제조하며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는 현재의 모습이 남았다. 보드카를 연속으로 몇 잔 들이켠 듯 혀가 꼬이고 얼굴에 핏줄이 솟아오른 남자들에게 남은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처럼.

2009/01/31 23:02 2009/01/31 23:02

_길에서 옛 친구를 만났다. 뜬금없이 그녀가 전하기를 봄바람처럼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맑고 뽀얀 얼굴의 옛 연인이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그녀의 어설픈 친절이 밉살스러웠다. 그녀의 상냥한 마음이 내게는 풍문의 여신인 파마의 주름진 얼굴을, 유배지에서 고통받은 시인의 삶을 떠올리게 하였다는 것을 빼곤 사실 그녀의 잘못은 없다.

세상에는 좋은 소식이 분명한데도 모르고 넘어가는 편이 나은 소식도 있다. '잘 됐네' 하고 대답하고 바보처럼 웃는 것이 이리도 힘든 일이었을 줄이야. 차라리 주정뱅이처럼 소리치고, 착한 것을 빼고는 가진 것이 없는 자처럼 불쌍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 먼 훗날 길에서 이 아이를 안은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난 어떤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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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이에 '서른 즈음'에란 노래를 부르기에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on the street where you live'를 콧노래 하며 걸었던 그 길은 도시개발에 지워졌고, 처음 아라비카 커피를 맛보았던 찻집은 볼썽사나운 음식점이 되었다. 단 하나 변하지 않고 남아있으리라 믿었던 나무 등걸도 지난여름 태풍에 몸쓸 정도로 상해버렸다. 어느새 소년이 청년으로, 소녀가 처녀가 될 만한 시간이 지났음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_ 인파에 시달리는 퇴근시간이 한가로운 퇴근길보다 좋은 유일한 이유는 핸드폰을 만지막거릴 공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사라졌다 믿었던 옛 버릇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되돌아왔다. 빡빡한 장문의 문자메세지를 작성했다가 이유 없이 지우기를 반복한다. 통화버튼을 눌렀다가 이내 연결종료버튼을 눌러버린다. 사람의 마음을 정직하게 전달할 방법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마음은 항상 조심스럽다.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언제까지 마음을 여밀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불행은 나를 지나치지 않기에 풀린 여밈 사이로 보인 언저리만으로도 난 반 보 전진 일 보 후퇴의 행로를 반복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내 삶은 또다시 책읽기를 좋아하고, 쉬이 술 한 잔을 비우자 청할 수 있으며, 홀로 있는 것이 자연스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될 것이 명백하다. 사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밀린 책이 책장 가득 이고, 공부할 것이 쌓여 있으며, 배울 것이 많으니 이런 것들에 시간을 보내며 서른을 맞는 것도 좋지 않을까? 다시 쌓인 십 년을 비웃으며 서른을 맞이하는 끝에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_ 나에게는 아주 가끔 '힘내'란 말을 건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친구 하나가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삶의 고비마다 이 녀석에게 대가 없이 얻은 '힘내'란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오늘도 이 녀석에게 힘내란 말을 또 한 번 염치없이 요구해버렸다. 걱정스레 시작한 녀석과의 통화는 유쾌한 농담으로 끝났다. 이 녀석이 아무에게도 가지 않았으면, 평생 좋은 친구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또 혼자 되뇌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란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참으로 무치한 사람이다.

2009/01/16 23:50 2009/01/16 23:50

Inter arma silent leges라는 라틴어 문장은 만나는 매 순간 기이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평온한 표정 뒤에 숨겨진 광기와 폭력을 이끌어 내는 주문이랄까? 극적인 무대장치를 통해 대중의 이성을 현혹할 수 있었던 선동정치가 혹은 사회공학자 겸 정치깡패들이 세계를 이끌던 시대의 순종적인 군중이 된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있어 불행은 저 문장을 통해 전쟁의 피해나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선량한 면모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법이 침묵이 강요당하는 순간에는 이미 양심 따위를 지킬 여유가 없다는 것, 전쟁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살아남는 투쟁 외에는 어떤 선택지도 남아있지 않다는 깨달음은 얼마나 나를 망쳐놓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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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사박물관(Warfare in the classical world)

고대를 다룬 수많은 역사서의 전투 기술은 다분히 문학적이다. 작가들이 묘사하는 것만으로 상황을 이해하기란 여의치 않다. 이 책은 이런 문제점에 대한 대안이다. 모든 전투를 개괄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어느 전문가 못지않게 까다로운 어조로 잘못된 고증에 대한 비판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화려한 삽화다. 나처럼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머릿속으로 그려내지 못할 문헌상으로만 만날 수 있던 존재들과의 해후는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P.S. 장르소설을 긁적거리는 아이들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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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First World War: the war to end all wars)

Great War 혹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으로 불린 1차세계대전이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전쟁을 위한 서곡이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록 일관된 전략 아래 수행되는 대전략의 부재에도 국지적인 각 전선의 규모의 합은 그 전시대까지 인류가 전쟁에 쏟아부은 모든 자원을 능가하는 규모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이 책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맞추어져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아예 벗어나지도 않지만 기술된 관점의 상당수는 당시 사람들이 지녔던 견해를 수용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무엇보다 다른 1차세계대전사에서 다루지 않았던 동부전선에 대한 고찰과 현대의 군사적 개념을 토대로 당시의 전략을 비판하지 않은 점은 후한 점수를 줄만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영연방군에 호의적인 서술에 호오를 드러낼 수도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것 역시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였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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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The Second World War)

존 키건은 리처드 홈즈와 더불어 영국이 자랑하는 전쟁사가 중의 한 명이다. 그가 내놓은 저술의 범위는 14세기부터 21세기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간대이지만 특히 그가 장기로 삼는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다. 그만큼 제2차 세계대전의 다양한 전장을 다룬 사가는 아직까지는 없다.

수많은 개인적 수기는 넘쳐나지만 개별 전선을 전문적으로 다룬 역사서는 턱없이 부족한 1차세계대전과 달리 제2차세계대전은 개별 전선을 다룬 책이나 제너럴십을 다룬 책은 넘쳐나지만 전쟁의 전방위를 조망한 책은 찾기 어려운 것이 실제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존 키건의 2차세계대전은 비록 태평양 전쟁을 가볍게 다루고, 유럽전쟁에 치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쳐도 유용성만큼은 후한 점수를 주기 충분하다. 영미의 전쟁위원회가 겪은 진통, USSR을 향한 히틀러의 돌격과 풍전등화와 같은 스탈린의 운명을 반전시킨 48시간, 무엇보다 태평양 전쟁의 당사자인 일본인이나 미국인이 아닌 영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태평양 전쟁의 양상과 해전이 아닌 해상력, 공군력과 결합한 해상력에 대한 이해 부족이 광대한 제국을 유지하던 마지막 숨결에 어떻게 치명적 일격을 가했는지를 고백한 글을 읽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지만 전쟁만큼 인간의 본성을,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의 물러날 수 없는 한 걸음을, 나약한 인간으로 이루어진 국가지휘부의 무모함과 부도덕성, 무책임함을 배우기 좋은 교재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순히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남은 시사점을 남긴다.

2009/01/05 00:01 2009/01/05 00:01

티치아노 미스터리

Posted 2009/01/04 09:16, Filed under: Review/Book

이언 피어스의 소설을 끊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핑거포스트1663』에서 보여주었던 재기를 다시 한 번 보여줄 것이란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핑거포스트1663』가 예외적인 소설이라는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새롭게 번역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실망감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이 소설들이 그의 초기작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해외 독자는 원서의 출간일보다 역서의 출간일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습성을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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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미술사 미스터리로 불리는 이 시리즈는 낱권으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라쇼몽>에 비견될 만한 재치를 보여주었던 『핑거포스트1663』에 다가서기에는 아직 너무 먼 거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시리즈의 첫 이야기인 『라파엘로의 유혹』에 난 그토록 강한 비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는 생생한 정도는 아닐지라도 읽고 있노라면 수만 킬로미터를 뛰어넘어 사건이 벌어진 공간을 엿보는 듯한 약간의 현장감이 있다. 시리즈의 첫 권을 읽은 독자에게는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는 점 또한 되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 다가와 연기를 펼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스케일이 큰 미니시리즈를 보는 듯한 기분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로 널리 알려진 티치아노는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화가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나체의 마야>나 <뒤로 돌아 거울을 보는 아프로디테>, <올랭피아> 같은 여성의 와상 누드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며, 그가 손끝으로 거칠게 표현한 짙은 바다가 인상적인 <비너스의 탄생>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앵그르의 누드 초상화와 사세리오의 아름다운 여인들 역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티치아노 미스터리』는 바로 이런 티치아노 연구를 위해 설립된 위원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살인사건의 이면에 깔린 진짜 이야기는 미술계와 인간의 추잡한 욕망에 관한 소고다.

2006년 여행에서 내가 본 물에 잠긴 베네치아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다. 찬란한 햇살이나, 바닷바람을 맞으며 플로리안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물에 잠긴 바다의 도시를 걸으며 느낀 아름다움을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되새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차마 이 소설에 악평을 남길 수가 없다.

2009/01/04 09:16 2009/01/04 09:16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Posted 2008/12/15 22:37,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누이들이 이 시집에 열광했을 때 솔직히 난 저 시집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문구가 궁상스럽고 못나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의 난 아주 가끔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되뇌게 된다. 지금 알고 있는 냉혹한 진실을 알았더라면 내 삶을 더욱 사랑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사랑하며 보냈던 시간을 나를 위해 쓰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요즘의 난 과거의 태만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천금과도 바꾸지 않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치르는 대가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쓰고 불쾌하며, 음습한 뒷골목의 좌판에 놓여 주인을 기다리는 방물처럼 처량하다. 참을 수 없는 비겁함에 나를 내던지는 거리낌도 사라졌고, 모욕에도 익숙해졌다. 자부심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나로서는 이제 더 빼앗길 것이 남지 않은 셈이다. 메마른 기계처럼 대답을 뱉어내는 내 입술은 어느 때보다 능변이지만 그 결론은 왜 이리 허무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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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지난 화요일에는 모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것과 부딪쳤다. 그날 아침, 삐뚜름하게 안경을 쓰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 남자는 '줄만 서면 붙는 시험'에 떨어진 나를 비웃었다. 꽤 알려진 경제신문사의 보스가 던진 한 마디는 몇 년 전 그 남자가 내게 보여준 겸손하고 사려 깊은 행동과 맞물려 나를 혼돈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박봉을 감내하더라고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에 대한 내 순진함을 저주하며 조용히 마주 웃어주었다.

어린 시절 이나 예전이나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왜 난 잠시 잊었던가? 삶에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패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울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일 때뿐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잊었던 것일까? 평범함이라는 피할 수 없는 굴레가 내 삶을 조이기 시작하는 이 즈음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탈출을 꿈꾼다. 삶이 이 창과 같다면 새로 고침이란 단추를 누름으로써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지 상상하는 내가 혐오스럽긴 해도.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은 나의 얼굴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었던 최고의 찬사였다. 하지만, 요즘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난 스물여덟의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되리라 단 한 순간도 상상하지 않았건만 지금 내가 쓰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백서다.

여기저기서 받은 면접비로 제법 비싼 만년필 한 자루를 샀다. 책 없는 삶은 죽음과 같다는 라틴어 문구를 각인시키며 한순간 의기양양해졌지만 이내 몸과 마음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 이 펜으로 무언가를 쓰기 위한 기다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P.S.

결국, 고용통계에서 포지티브항이 되는 데 성공했다. 오래전부터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학창시절 한 번도 내 첫 직장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연수를 받기 시작했다. 주변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지만 요약하자면 의외의 선택 혹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대세다. 하지만, 수상한 시절에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내 결론이 틀릴 것 같지는 않다.

2008/12/15 22:37 2008/12/15 22:37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

Posted 2008/12/08 22:49, Filed under: Review/Book

_서두를 열려고 얼마나 많은 문장을 쓰고 지웠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처럼 아름다운 소설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것은 쉽지 않다. 마음속을 뒤흔든 이 격랑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내 피가 너무 뜨겁고, 이 격정을 있는 그대로 문장으로 옮기기에는 내 능력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_르누와르가 그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여성들에게 느꼈던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을 읽으며 소년의 껍질을 벗고 어른이 되었던 스물둘의 그 겨울이 생각났다. 깊게 감긴 두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귀를 댈 수밖에 없었던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주가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의 전율과 감각이 문장을 읽는 동안 몸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부끄러움과 수줍음에 놀라 당시에는 미쳐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이 몇 해가 지난 다음에야 나를 찾아왔다. 이제는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누군가의 따스한 온기와 머리칼 냄새와 함께.

뱃놀이하는사람들의점심

_지금보다 한참 어렸던 어느 해 가을 지기들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의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 모두 알리사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이 안타깝다는 것. 줄리에타가 제롬에게 건넨 마지막 문장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만큼은 모두 동의를 표했다. 이제 그 지기들에게 고하노니 지드의 알리사가 우리에게 안겨주었던 가슴 먹먹한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인물이 한 소설에 등장했으니 어서 책장을 펴기를. 알퐁진이라는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두 번 세 번 문장을 씹어 삼키기를, 굽은 손의 르느와르가 당신 가슴을 그리고 싶었다고 내뱉는 장면에서 벅찬 감동을 느끼기를 빌어본다.

_귀스타브 까유보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화려한 재능을 꽃핀 대가들의 그림자에 가려 지금까지 제대로 조망 받지 못했던 그를 음지에서 끌어내 그의 업적과 고뇌, 삶을 보여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퐁 드 뢰로프>나 <비오는 날의 파리>를 그의 걸작으로 꼽지만 난 <바닦을 깎는 남자들>과 <노젓는 남자들>들을 더 사랑한다.

_어린 시절 처음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을 도록을 통해 보았을 때 몇 시간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을까, 그들의 시선이 바라보는 곳 찾기를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이 지닌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이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싶다. 만약 워싱턴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이 그림을 보고자 필립스 컬렉션에서 하루를 보낼 것이 분명하다.

_하나의 그림이 새로운 시대를 규정했다면 이 소설은 하나의 그림 속 인물과 그림의 완성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시대를 보여준다. 보불전쟁과 파리코뮌의 상처를 넘어선 1880년의 파리와 그 속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플라뇌르를 즐길 수 있다.

2008/12/08 22:49 2008/12/08 22:49

악마의 공놀이 노래, 이누가미 일족

Posted 2008/10/25 21:06, Filed under: Review/Book

누이들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책을 줄기차게 사들이는 내게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냉혹하게 평가하자면 오래되어 낡은 추리소설인데다가 내가 일본소설을 읽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번 난 추리소설이 아니라 전후소설을 읽는 기분이란 변명을 늘어놓곤 한다. 세이시의 플롯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전후 일본인에 대한 묘사와 이제는 사라진 일본추리소설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음산함이 매력이라는 첨언과 함께 말이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다른 추리소설에 비해 비교적 플롯이 명백하다. 다른 추리소설에서 하이쿠나 단어의 해석이 중요한 키워드인 것이 비해-물론 그렇다고 해도 논리적 일관성 앞에서는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살인이 벌어지는 공간의 비밀을 푸는 것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물론 살인이 벌어지는 공간의 문제와 거짓 진술의 문제는 이미 『옥문도』에서도 다루어진 부분이기도 하고 모든 추리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이긴 하지만 한층 원숙해진 인물 및 배경 묘사가 소설에 차별성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이누가미 일족』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추리소설의 종합판에 가깝다. 지금까지 다른 소설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기법들이 망라되어 있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다소 미군정시대의 일본에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성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소설이 나온 시기가 70년대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한다. 다만, 이런 현대성으로 말미암아 『옥문도』에서 보여주었던 것 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사실성은 다소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뭐 60년대와 군정시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혼란이 되려 소설에 특이성을 부여해주긴 했지만 말이다.

이누가미 일족
『이누가미 일족』에서 세이시는 언어유희나 살인이 벌어지는 제한된 공간의 비밀에서 벗어나 그의 소설에서는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었던 제3의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이 제3의 가능성 덕분에 추리소설은 명쾌함에서 더욱 멀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제3의 가능성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영미 추리소설에서는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는 범주에 속하고, 일본적인 특수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추리소설이 지닌 매력은 정서적으로 고립된 닫힌 공간이 지니는 폐쇄성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풀리지 않는 원한관계의 특수성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이 전후 일본이란 공간과 정신적 코마 상태에 빠진 일본인과 결합되면서 독자를 어둠의 심연으로 이끈다.

해소되지 않은 원한은 한 가족과 한 마을을 파괴하고 기괴한 죽음을 여기저기 흩뿌려놓는다. 하지만, 세이시는 숨겨진 정체를 지닌 가면의 인물들과 목적을 위해 손쉽게 살인이라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선택한 군상들 사이에 여러 빛깔의 사랑을 숨겨 놓는다. 게다가 복수의 집념이 남긴 것은 덧없는 죽음의 향연이라는 교훈을 빼놓지 않는다. 그렇기에 두텁게 낀 안개가 사라지고 고립된 공간이 온전하게 외부와 연결되었을 때 독자는 다시 한번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넘치는 평범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08/10/25 21:06 2008/10/25 21:06

A bunch of unanswered questions

Posted 2008/10/24 23:47, Filed under: About_A_boy/Only the things!

/가끔은 서늘한 그늘이 진 평상에 누워 트렁크만 입은 채로 모시 침구 속에 몸을 숨긴 채 언덕 마루에 넘어가는 구름을 세는 휴일을 꿈꾼다. 높은 베개를 베고 서재에서 꺼내온 소설을 한 아름 쌓아놓고, 귀에는 시원하지만 리듬이 번잡하지 않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꽃내음 향긋한 프랑스 홍차를 홀짝이는 주말은 얼마나 여유로운가?

/내가 소설에서 헤어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낯선 시대, 낯선 거리를 걷는 여행자로서의 만족감이다. 때로 펜 끝에서 흘러나온 문장은 어느 화가의 붓터치보다 더 강렬하게 한 시대를 함축한다. 결코 실제로는 경험할 수 없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현대라는 볼썽사나운 폐허에 가려진 옛 거리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 또한 소설만의 특권이다. 그리하여 난 결코 소설이 그려내는 몽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심코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가을 냄새가 쏟아져 들어왔다. 아홉 해 전 마르케즈의 납치일기를 품 안에 넣고 길을 걷던 순간에 느꼈던 냄새와 놀랄 만큼 똑같은 것이었다.

/내 나이 스물의 유행은 말 그대로 'stylish'한 일본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전공서적 사이로 보이는 가벼운 소설 한 두 권이 그 사람의 취향을 설명하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큰누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를 기준으로 단체로 스무 살에 접어든 우리 집 같은 경우에는 이 무렵에는 이미 불씨조차 남지 않은 철 지난 유행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소설 특유의 재미에 싫증이 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2008/10/24 23:47 2008/10/24 23:47

퍼스트 폴리오

Posted 2008/10/23 07:27, Filed under: Review/Book

농담으로도 가당찮은 이야기지만 만약 누군가 나에게 두 권의 책을 훔쳐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한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셰익스피어의 폴리오와 켐스콧판 초서의 캔터베리이야기를 고를 것이 분명하다. 시장성과 환금성, 가치저장과 희소성 측면에서 이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 두 권보다 진기하고 소중한 책들도 많지만 온전하게 소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서 투자가치를 지닌 책은 이 두 권이 유일하다.

그렇기에 영문학에 발 좀 적셨다는 사람들 모두는 벼룩시장에서 단돈 50펜스에 이 두 권을 거저 줍기를 꿈꾸고, 에코 같은 양반은 그의 마지막 소설에서 조부의 서재를 정리하다가 폴리오를 발견한다는 다소 뜬금 없는 희망을 나열한 것이 아닐까?

Interred with bones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책은 이런 셰익스피어의 폴리오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제목 하나만으로 나 같은 인간의 구매욕구에 불을 지르기에는 충분하지만 폴리오는 이 소설에서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the Folio와  folio를 구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폴리오가 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형편없다.

또 하나 구름잡는이야기를 더하자면 푸코의 추를 기점으로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성당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 결사가 팩트 소설의 주요 소재였다면 근래 영미권의 팩트 소설의 주요 소재는 셰익스피어로 바뀌지 않았나 싶다. 물론 스페인어권이나 독일어권에서 줄기차게 나오는 결사형 팩트 소설과 의도적인 차별화를 노린 것이 사실이나 그리 얄밉지는 않은 것이 독자로서의 내 심정이다. 문학사에서 이보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또 누가 있을까? 절대 풀리지 않을 진실이란 이야기꾼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작업 환경인가?

서론이 길었지만 이 소설 꽤 괜찮다. 문학적 가치나 아름다움을 지닌 소설은 아니지만 대학교양 이상으로 셰익스피어를 공부했다면 저자가 지닌 박식함에 놀랄 것이 분명하고,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현장감에, 글로브 극장과 와이즈너 도서관에 불을 지르는 대범한 상상력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지난 몇 년 사이 출간된 셰익스피어 관련 소설들의 완전판이라고 부르기에 추호도 손색이 없다. 유행처럼 번지는 미발견 원고에 대한 해석도 참신하고, 누가 진짜 셰익스피어인가에 대한 진실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도 유쾌하다. 추리소설로서의 플롯은 아쉽지만 셰익스피어를 주제로 이보다 근사하게 소설 한 편을 엮어내기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카르데니오>도 좋지만 <Love's labour's won>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서운함이 좀 남긴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마케팅과 제목 선정은 정말 최악이다. 분권은 용서할 수 있어도 『Interred with bones 』란 원제를 무시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출판사의 횡포다. 그 덕에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받았고, 무엇보다 소설 자체가 공항소설처럼 누추해졌다. 제목에 담긴 아이러니가 인물과 사건에 연결되면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묵언의 메세지는 반짝거리는 표지와 잔뜩 기운 조잡한 말장난 사이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2008/10/23 07:27 2008/10/23 07:27

연기로 그린 초상

Posted 2008/10/22 07:25, Filed under: Review/Book

낡은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그것이 갓 인쇄된 것일지라도 오래되어 눅은 종이냄새를 맡게 된다. 사실 환각처럼 머리를 맴도는 이 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소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빌 벨린저의 소설에는 레이몬드 챈들러가 창조해낸 필립 말로우 같은 캐릭터가 없다. 무의미한 가정이긴 하지만 빌 벨린저의 소설에 필립 말로우 같은 시대의 아이콘이 존재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해보는 일은 독자로서는 꽤 매력적인 체험이다. 말로우 같은 캐릭터가 있었더라면 조금 더 쉽게 소설에 몰입되지 않았을까? 섬세한 배경묘사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낯선 시대 낯선 거리를 걷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돌이켜 보면 빌 벨린저에게 필립 말로우는 어울리지 않는다. 벨린저의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평범의 범주에 속한 이름 없는 사내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에게 필립 말로우 같은 전형성과 입체성이 동시에 부여된다면 벨린저의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안개 낀 모호함은 사라지고 우리는 흔한 누아르 한 편을 더 얻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연기로 만든 초상』은 한 여자의 변신을 그린 연대기이자 한 남자의 추적을 그린 서스펜스 물이다. 사실 병렬 구성을 지닌 이 소설에서는 어느 쪽에 마음을 쏟느냐는 전적으로 독자의 마음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시카고의 이민자 가정에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비록 허무한 것일지라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다른 삶을 살게 된 한 여자의 여정과 어리석음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로 나누어질 수 없는 미묘한 경계의 소설들이 있다. 빼어남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에 대한 절망적인 탐식을 충족시켜주는 소설들이 바로 이런 소설들이다. 빌 벨린저의 소설은 이 영역에 속한다. 고전으로 살아남거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리라 예상하긴 어렵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쫓아 소설을 섭렵하는 바보들에게는 그가 묘사한 삶과 배경만으로도 눈여겨볼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2008/10/22 07:25 2008/10/22 07:25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Posted 2008/10/20 10:13, Filed under: Review/Book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를 익히 아는 친구들에게 난 100퍼센트라는 개념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루키의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만큼 공감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으며, 되려 길고 구차하며 초라한 오욕의 기록에 새로운 한 획을 더할 뿐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이 소설에는 꼭 '100퍼센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만나는 기분'이란 표현을 써줘야 한다. 그 외의 어떤 표현도 이 소설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고 초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만약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뒷머리에 전달되는 아찔한 멍함 따위의 표현을 이 소설에 쓴다면 그것을 이 책은 욕되게 하는 것일 뿐더러 내 삶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오랫동안 사람의 뇌리에 남을 화려한 결혼식 다음 날 아침 처참하게 살해된 한 남자의 운명을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극중 화자인 나의 해석을 통해 재구성한 소설이다. 그렇지만, 얇은 책장과 단순한 줄거리임에도 이 소설의 느낌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걸출한 문학적 재능을 선사 받은 사람들만이 투사해낼 수 있는 삶의 정수를 독자로서 느끼는 것과 표현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련의 주인공이 잠에서 깨어 살해되기 전까지 몇 시간 동안 그가 걷고 만난 사람들을 추적하며 마르케즈는 수많은 여러 우연이 만들어 낸 살인사건을 조명한다. 동시에 독자는 카브리해의 작은 항구 마을과 그 주민들의 삶을 내 이웃의 삶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눈앞에 영사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주변인물들의 나래이션을 듣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한 남자의 최후와 그 뒷이야기들을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잔인하기 그지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삶의 참모습을 깨닫게 된다.

마르케즈가 『납치일기』에 보여주었던 르뽀르타쥐에도 충분히 감탄했던 나로서는『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 더 남길 말이 없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능가하는 숨겨진 보물이라는 부연 아닌 부연이 내가 이 책에 더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 아닐까 싶다.

2008/10/20 10:13 2008/10/20 10:13

장미의 미궁

Posted 2008/10/19 22:20, Filed under: Review/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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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의 실수, 혹은 만행. 그런데 의외로 이 소설의 웹페이지는 매우 충실하다. 이 소설에 대하여 문장을 남기는 것 자체가 낭비이긴 해도...
2008/10/19 22:20 2008/10/19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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