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추(Il pendolo di Faucault)
Posted 2006/02/13 00:08, Filed under: Review/Book조금 황망한 분류이긴 하지만 난 ‘푸코의 진자’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 ‘푸코의 추’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곤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황망할 것도 없다. 내가 읽은 것은 검정색 표지를 달고 있는 ‘푸코의 추’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 ‘푸코의 추’를 읽었을 때 그 책은 조금 식기는 했지만 여전히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뭐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90년대 ‘푸코의 추’ 속에는 생생한 현재성이 살아 있었다.
‘주전자 뚜껑이 열리네’ 라는 문구에서 박장대소 했으며 아불라피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또 색인 카드를 가지고 문화계의 샘 스페이드가 되겠다고 법석을 떠는 주인공 까소봉 역시 이해가 되었다. 전쟁 말기의 어린 시절에 관해 늘어 놓는 벨보 만담들은 마냥 즐거웠으며 디오탈레비의 머뭇거리면서도 칠 사고는 다 치는 그 모습은 귀여웠다. 그래 아직 그때의 내 머리 속에는 이탈리아 월드컵때 보았던 이미지가 생생했다. 그 사람들이라면 이러고도 남을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 적군파는 농담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았으며 이제 막 베테통이 한국 시장에 상륙하던 시절이었다.
완전수에 대한 그 은큼한 이야기와 카불라, 생제르망 백작 역시 그랬다. 20세기 말엽에는 무언가 오컬트적인 요소와 기호학적 장난이, 위트있는 농담 따먹기가 즐거운 시대였다. Templar는 아직 게임용어가 아니었고, Jacque de Molay는 이제 막 태어난 ‘www시대’에 꽤나 인기있는 주제였다. 모짜르트가 프리메이슨이었으며 유럽의 위인들 중 일부는 장미십자회와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단신이 신문에 실리던 시대였다. 조금 지난 뒤에는 월요일 저녁에는 X- file을 했고, 타롯 카드가 호사가들의 취미로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오래지 않아 팩트 소설의 시대가 열렸다.
며칠 전 지친 표정으로 까페테리아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맞은편 테이블에는 앳되어 보이는 아가씨 둘이 앉아 있었는데 각자 <푸코의 진자>를 한 권씩 들고 이렇게 재미없는 책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불끈하고 화가 났다. 한여름 밤을 때우기 위해 이 손 저 손을 배회하던 6000원 짜리 <푸코의 추>와 자칭 해설가로 바빴던 내 과거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때에는 이렇게 비싸고 두꺼운 소설이 흔하지 않았다는 것도 밝혀둔다)
하지만 21살 남짓되어 보이는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고작 다섯살 차이가 밖에 나지 않지만 그네들과 난 서로 다른 시대를 보아왔고 다른 시대에 세상에 관해 눈을 뜬 것이다. 그들은 결코 <좀머씨 이야기>에 열광했던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으며 <콘트라베이스>와 <비둘기>가 자치했던 위상을 모른다. 하루키 스타일의 스타일리스트들이 대학가를 점령하기 전도 모른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모르리라. 에릭 시걸과 존 그리샴. 그리고 스티븐 킹이 왜 잘 팔리는 작가라 불리는지도 모를 것이다. 5.25인치 디스크를 먹던 컴퓨터를 보지 못했으며, 왜 비포선라이즈에 사람들이 열광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상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네들의 말이 옳다. 우리는 <푸코의 추> 속에서 공통 분모가 될만한 기호학적 코드를 발견했지만 코드는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재해석을 거치는 것이 되려 당연하다. <푸코의 추>이던 <푸코의 진자>이던 두번째 밀레니엄을 넘은지도 몇 년이 지난 이 즈음에는 그 어떤 현재성도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 낡았고 어떤 특이점도 없으며 교훈과 유머도 없다. 그들에게는 에코風의 소설들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던 모습 대신 팩트 소설이란 이름으로 시장에 흘러 넘치는 혼란스런 현재가 전부일 것이다. 대신 그들은 늙고 고루해져 버린 우리가 지니지 못한 그들만의 새로운 재미가 있을 것이며 내가 평생 이해하지 못할 어떤 글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을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누군가가 <푸코의 진자>에 관해 묻는다면 그냥 <푸코의 추>를 읽었다고 대답할 요량이다. 그리고 왜 읽어야만 하는지를 흥분한 어조로 쏟아내지도 않을 생각이다.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가 다르듯 <푸코의 추>는 우리 세대-엄격하게는 나보다 조금 나이든 세대의 것이 맞다. 난 우연찮게 교섭구역에 서 있던 셈이다-의 아이콘이다. 다른 세대에게 우리의 아이콘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 제일 세련된 태도다. 혹 다음에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푸코의 추>는 ‘Post hoc ergo propter hoc’이라고 말하리라.
‘주전자 뚜껑이 열리네’ 라는 문구에서 박장대소 했으며 아불라피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또 색인 카드를 가지고 문화계의 샘 스페이드가 되겠다고 법석을 떠는 주인공 까소봉 역시 이해가 되었다. 전쟁 말기의 어린 시절에 관해 늘어 놓는 벨보 만담들은 마냥 즐거웠으며 디오탈레비의 머뭇거리면서도 칠 사고는 다 치는 그 모습은 귀여웠다. 그래 아직 그때의 내 머리 속에는 이탈리아 월드컵때 보았던 이미지가 생생했다. 그 사람들이라면 이러고도 남을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 적군파는 농담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았으며 이제 막 베테통이 한국 시장에 상륙하던 시절이었다.
완전수에 대한 그 은큼한 이야기와 카불라, 생제르망 백작 역시 그랬다. 20세기 말엽에는 무언가 오컬트적인 요소와 기호학적 장난이, 위트있는 농담 따먹기가 즐거운 시대였다. Templar는 아직 게임용어가 아니었고, Jacque de Molay는 이제 막 태어난 ‘www시대’에 꽤나 인기있는 주제였다. 모짜르트가 프리메이슨이었으며 유럽의 위인들 중 일부는 장미십자회와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단신이 신문에 실리던 시대였다. 조금 지난 뒤에는 월요일 저녁에는 X- file을 했고, 타롯 카드가 호사가들의 취미로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오래지 않아 팩트 소설의 시대가 열렸다.
며칠 전 지친 표정으로 까페테리아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맞은편 테이블에는 앳되어 보이는 아가씨 둘이 앉아 있었는데 각자 <푸코의 진자>를 한 권씩 들고 이렇게 재미없는 책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불끈하고 화가 났다. 한여름 밤을 때우기 위해 이 손 저 손을 배회하던 6000원 짜리 <푸코의 추>와 자칭 해설가로 바빴던 내 과거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때에는 이렇게 비싸고 두꺼운 소설이 흔하지 않았다는 것도 밝혀둔다)
하지만 21살 남짓되어 보이는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고작 다섯살 차이가 밖에 나지 않지만 그네들과 난 서로 다른 시대를 보아왔고 다른 시대에 세상에 관해 눈을 뜬 것이다. 그들은 결코 <좀머씨 이야기>에 열광했던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으며 <콘트라베이스>와 <비둘기>가 자치했던 위상을 모른다. 하루키 스타일의 스타일리스트들이 대학가를 점령하기 전도 모른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모르리라. 에릭 시걸과 존 그리샴. 그리고 스티븐 킹이 왜 잘 팔리는 작가라 불리는지도 모를 것이다. 5.25인치 디스크를 먹던 컴퓨터를 보지 못했으며, 왜 비포선라이즈에 사람들이 열광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상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네들의 말이 옳다. 우리는 <푸코의 추> 속에서 공통 분모가 될만한 기호학적 코드를 발견했지만 코드는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재해석을 거치는 것이 되려 당연하다. <푸코의 추>이던 <푸코의 진자>이던 두번째 밀레니엄을 넘은지도 몇 년이 지난 이 즈음에는 그 어떤 현재성도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 낡았고 어떤 특이점도 없으며 교훈과 유머도 없다. 그들에게는 에코風의 소설들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던 모습 대신 팩트 소설이란 이름으로 시장에 흘러 넘치는 혼란스런 현재가 전부일 것이다. 대신 그들은 늙고 고루해져 버린 우리가 지니지 못한 그들만의 새로운 재미가 있을 것이며 내가 평생 이해하지 못할 어떤 글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을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누군가가 <푸코의 진자>에 관해 묻는다면 그냥 <푸코의 추>를 읽었다고 대답할 요량이다. 그리고 왜 읽어야만 하는지를 흥분한 어조로 쏟아내지도 않을 생각이다.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가 다르듯 <푸코의 추>는 우리 세대-엄격하게는 나보다 조금 나이든 세대의 것이 맞다. 난 우연찮게 교섭구역에 서 있던 셈이다-의 아이콘이다. 다른 세대에게 우리의 아이콘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 제일 세련된 태도다. 혹 다음에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푸코의 추>는 ‘Post hoc ergo propter hoc’이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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