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언

Posted 2005/08/26 00:15, Filed under: Review/Book
꽤 많은 장서를 자랑하는 모교의 도서관과 멀어진 다음부터 난 도서관보다는 서점에서 구매하는 책을 중심으로 간서치의 삶을 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는 서점에 들리는 것조차 여의치 않아 졌고, 점차 인터넷을 이용해 책을 사들이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친구들과 reviewer들 덕분에 후회할 만한 책들을 들인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대형 사고를 치고 싶다는 이상한 속삭임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결국 끈질긴 속삭임에 지친 난 휴가를 포기한 대가라는 어설픈 핑계를 대며 스스로에게 공항 소설 두 질을 선물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성수의기사단>과 <이중설계> 그리고 <히스토리언>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딱히 내용이나 리뷰를 참조해가며 고민하기 보다는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구매할 수 있는 공항 소설 두 개를 골라 냈다. 그렇게 나의 대형 사고는 서막을 열고 무대에 뛰어 올랐다.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히스토리언>은 흡혈귀 혹은 드라큘라로 불리는 존재를 찾아가는 역사가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이다. 하지만 이 바닥의 권위자인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와 비교해 보자면 십대의 습작처럼 거칠고 조악하다. 무엇보다 스토리 라인과 플롯. 개연성 사이의 엇박자가 볼만하다. 게다가 캐릭터는 인형처럼 뻣뻣하고 현실감이 없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는 평범한 일상에서조차 이유없이 남발되는 상상력에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거기에 번역은 호오를 떠나서 한마디로 어설프다. 사실 이런 번역을 오랜 시간동안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행의 시작일지도 모를 정도다.

하지만 이런 소설에도 장점이 하나쯤은 있다. 작가가 지닌 재능의 한계를 바라보는 것은 악취미지만 훗날 진정한 대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 그들의 재능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좋은 작품을 탄생시켰는지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책의 서평 혹은 독후감을 쓰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을 꼽으라면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읽고 나서 그것에 관해 힐난하는 글을 쓰는 순간이다. 애당초 착하지 않은 성정이 그대로 들어 나는 것은 물론이고, 에둘러 말하는 평소의 조심성을 벗어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비난은 칭찬보다 스트레스를 걷어 내는 데 한층 뛰어난 효능을 보인다. 게다가 <히스토리언>은 혹여 내가 틀리지는 않았나를 걱정할 필요없이 힘껏 혹평을 쏟아내도 꺼리낌이 없는 소설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난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를 읽으며 난 레스타와 아르망 그리고 마리우스의 캐릭터에 한껏 반해 있었다. 모름지기 공항 소설에는 이런 자유로움과 기괴함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고 소리 내어 웃곤 했다. 공항 소설이 스스로의 본분을 잊고 재미없는 것은, 혹은 능수능란하지 못한 것은 죄악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히스토리언>은 올해 읽은 최악의 소설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런 소설을 읽고 거액을 들여 판권을 사들인 소니 픽쳐스의 경영진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P.S.

2005/08/26 00:15 2005/08/2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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